기억을 품고 있는 사진들
재작년 10월 무렵부터 찍었던 일회용 필름 카메라의 필름을 인화했다. 굉장히 오랜 시간 한 컷 한 컷 찍어온 터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난생처음 입원하는 게 신기해서였는지 병원에 카메라를 챙겨갔었더라. 그리고 타입캡슐이 열리듯 꺼내진 그때의 기억.
1.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리 잡은 동네에 벌써 9년째 살고 있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긴 했어도 그리 멀리 가지 않았고, 거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나로서 신촌 세브란스는 어떤 랜드마크 같은 곳이었다. 길을 찾을 때, 누군가를 만날 때,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뭐 그런 상황에서 기준점으로 잡는 곳.
그런 곳에 내가 환자로서 들어간다니.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 감각이 신기했던 것 같다. 입원 수속을 하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 창밖으로 펼쳐진 신촌의 풍경은 더더욱 그러했다. 저기는 친구랑 자주 갔던 가게, 저기는 연극을 보러 갔던 극장, 저기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 모두 내가 아는 곳들인데 왠지 낯설었다. 익숙한 신촌의 풍경이었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신촌은 내가 아는 곳과 닮은 듯 달라서 수술 전 검사를 위해 계속해서 병실과 검사실을 오가다가도 병실에 돌아오면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2. 수술이 끝나고 잠시 시력을 잃었다. 손의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는 수 밖엔 없었다. 손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이 상황이 신기한 것도 잠시, 의사 선생님이 말했던 것보다 암흑의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이 몰려왔다.
늦은 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침대 리모컨을 사용하는 법을 설명해 주기 위해 나의 손을 리모컨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고는 내 손 끝이 버튼을 하나씩 짚어가는 걸 기다려주며 버튼의 위치와 기능을 설명해 주었다. 리모컨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조차 낯설어진 이 상황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덮쳐왔다. 그날 밤, 나의 시력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과 함께 뒤집힐 나의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3. 다행히 다음 날 서서히 시력이 돌아왔다. 고작 하루였지만, 암흑 속에 있다가 눈을 뜨고, 빛을 마주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불안이 나를 맞이했다. 세상 모든 게 두 개로 보였다. 시력은 돌아왔지만 초점이 맞질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가 그 이유를 깨닫고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두 개의 눈동자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내가 두 개로 보였다.
16층 로비의 소파에 앉아 착잡한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 옆에 두었던 안경을 집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두 개로 보이는 상황에서 진짜 안경이 아니라 틀어진 초점 때문에 생긴 상을 잡으려 허공을 휘적였을 때의 철렁함을 잊지 못한다. 시력은 돌아왔지만, 두 개의 것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알 수 없었던 그때. 눈 대신 다시 손의 감각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4.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시기였던지라, 병원 로비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다시는 눈동자가 제 위치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잠 못 들던 그 밤, 손에 의지해 내려간 어둑한 로비에서 밝게 빛을 내는 트리 앞에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소원을 빌었다.
5. 오래 걸렸지만, 시력도, 초점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나의 일상이 뒤집힐 수도 있었던 순간을. 그리고 또 생각한다. 어느 순간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일로 나의 일상이 뒤집힐 수도 있다고.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어렵다.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자막과 음성해설에 의지해 연극을 보는 사람들을. 장애 유무에 앞서 모두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이동하고, 문화를 즐기는 게 당연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직도 그들의 목소리는 유별나고 그들의 등장은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만 같다. 장애를 특별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 누구나 오갈 수 있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언제쯤 만날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