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생각한 것들.
걸어보자.
근데, 나 마지막으로 걸었던 게 언제였지?
걷기 위해 처음 나의 발과 길이 만나는 순간,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아니 사실, 계속 걷긴 걸었다. ‘제대로’ 걷지 못했을 뿐. 생각해 보면 ‘제대로’ 걸었다는 생각이 들 땐 마음이 고요할 때였다. 내가 어딘가로 꼭 향하지 않아도, 몇 시까지 가야 하지 않아도 되는 때. 온전히 그 시간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가 돼서야 나는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걸어보기 전까진 단 하루도 마음이 고요하질 않았다.
1월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집을 보러 다니느라 바쁘게 지하철과 버스로 서울 이곳저곳을 오갔다. 한 달여 만에 겨우 찾아낸 집은 계약 당일날 계약을 못하게 되면서 다시 길 위로 내던져졌고, 퇴거하는 날을 맞출 수 있는 집을 찾기 위해 15분 단위로 부동산과 약속을 잡았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걷고, 뛰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돌아와 지쳐서 잠들면 다시 부동산과의 약속이 빼곡한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에겐 내 마음의 건강을 확인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깜박거릴 때 뛰어서 건널 수 있나? 저 멀리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를 타기 위해 뛸 수 있나? 정말로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상태일 땐 정말 조금만 뛰면 탈 수 있는 버스인데도 출발하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만 보며 터덜터덜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런 기준이 있다 보니 나에게 뛰지 못하는, ‘걷기’는 아픈 상태라는 공식이 어느새 생겨버려 걷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았던 탓도 내가 제대로 걸을 수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이런 사설들은 뒤로하고, 오늘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서라도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이사 온 동네는 원래 살던 곳에서 애매하게 떨어져 있어 잘 알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하는 동네였다. 눈앞에 놓인 커다란 사거리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발을 옮기려 했다. 문제는 사거리에 주민센터가 보였고, 미뤄두고 있던 행정업무들이 생각났다. 일단 행정업무를 처리해야 마음이 고요해질 것 같아서 주민센터를 찾아갔는데 지갑을 두고 온 게 내 차례가 다 오고 나서야 생각났다. 신분증이 없으니 행정처리도 하지 못한다고 마음을 다시 진정시키고 길 위에 섰다.
날씨가 좋아 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고, 천천히 걸으며 이 길 위에 이런 건물이 있구나, 이런 상가들이 있구나를 살폈다. 조금 걷다 보니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멈춰 통화를 하다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어서 통화가 길어져 그냥 통화를 하며 걸었는데 정말 그냥 걸을 때와는 다르게 전화를 하던 순간부터 끊을 때까지 내가 걸었던 길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통화를 하며 길이 이어 진대로만 따라 쭉 걷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인테리어 편집샵이 나왔다. 다른 길로 이 편집샵에 왔던 적이 있었는데, 이 길이 이렇게 이어지는지는 몰랐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편집샵으로 거의 빨려 들어갔고 새로운 집에 달 커튼도 신나게 구경하다 다시 본분을 찾아 길 위로 나섰다.
아무것도 안 하고 걷다 보니 자꾸만 안 한 일들이 생각나 핸드폰을 꺼내 무언갈 찾고, 보내고,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행히(?) 회사 전화가 길어진 덕분인지 배터리가 바닥을 향해 가고 있어 강제로 핸드폰도 주머니 속으로 넣고 다시 걸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의 끝에는 한강다리가 있었다. 한강이라니! 고요한 한강을 상상하며 신나게 한강으로 향했는데 평일 낮 시간이었는데도 한강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냥 그들이 걷는 것처럼 유유히 한강을 따라 걸었다. 햇살은 따스해 어느새 외투는 손에 걸치고 있었고, 한강에는 옅은 초록색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초록색들이 이사로 험난했던 나의 겨울이 끝나간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초록을 따라 한참을 걷다 다음 수업에 여유롭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냥 눈에 보이는 나들목으로 향했는데, 공교롭게도 정말 강제로 걷게 만들어놓은 나들목이었다. 이번엔 나들목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햇빛 그림자를 구경하며 걸었다. 기울어진 길을 걷기 위해 달라진 나의 허벅지힘과 발바닥의 기울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걸었던 길들이 모두 평지 거나 내리막이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아챘다. 그렇게 잠시 또 멈춰 햇빛 그림자를 구경하다 나들목을 빠져나왔다.
나들목을 빠져나오자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것만 같았다. 한강을 끼고 높이 지어진 아파트들이 가득한 길에 우뚝 서버린 나는 떨떠름하게 길을 따라 걸었다. 아파트들을 올려다보며 대체 여긴 얼마일까라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고, 집을 찾아 헤매느라 힘들었던 나의 겨울들이 스쳐갔다. 높고 굳게 잠긴 그들의 철문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세상을 상상했다. 오늘 걸었던 길들과는 다르게 빨리 그 길을 빠져나오고 싶어 자꾸만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드디어 아는 길을 만나게 되었다. 계속 모르는 길을 걷다가 아는 길을 발견하니 무척 반가웠다. 수업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근처에 있는 따릉이 대여소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모르는 길을 걸을 때 약간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힘찬 발걸음으로 바뀌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아는 길이었지만, 또 낯설고 재미있기도 했는데 그 길은 부모님의 차를 타고 여러 번 지나 알고 있는 길이었다. 처음으로 걸으면서 길을 구경했는데, 횡단보도가 특이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횡단보도 끝에 있는 따릉이를 타고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달리는데 오늘 걸으며 지나친 길들과 정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길이 빠르게 지나가고 통과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쉬우면서도 익숙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 편안해짐과 동시에 갑갑함을 느꼈다.
나는 언제 또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