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을 일 없는 짝사랑

이게 덕질의 효용성

by 삼로로

며칠 전 어떤 드라마를 봤다. 극 중 주인공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래 사귄 전 연인에서 심한 배신을 당한 후라 이제 누굴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그 감정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때 갑자기 떠올랐다. '이래서 내가 덕질을 하는 걸 수도 있겠구나' 하고.


덕질은 쌍방이 아닌 일방적으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매체를 통해 그 사람의 일상적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도 어쨌든 화면 너머의 모습일 뿐이다. 그 모습은 언제나 '괜찮은' 모습이다. 즉 그 사람의 '별로'인 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고 실망할 경우도 드물다는 말이다(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는 예외). 그래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 그를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전에 좋아했던 배우가 있다. TV드라마와 뮤지컬, 연극 공연을 두루두루 하는 분인데 좋아하던 당시, 시간만 되면 공연장을 찾았다. 사인도 받고 선물도 주면서 막공까지 쫓아다녔다. 그게 내 삶의 낙이었는데 어느샌가 내 생활이 바빠지다 보니 덕질도 시들해졌다. 만약 그게 실제 사람과의 관계였다면 그렇게 스무스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재회도 힘들 거다. 그렇지만 덕질에서는 가능하다. 좋아하는 감정이 식거나 소홀해졌더라도 나중에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좋아할 수 있다.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아이돌을 좋아하는 내 친구는 그 가수가 공개연애를 한다면 탈덕을 하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 말이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연애를 안 한다고 나랑 만나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입덕을 하고 보니 친구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만약에 내 배우가 연애하는 걸 들켰다? 공식 인정했다? 라고 상상해 보면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배우는 내가 짝사랑하는 '내 주변에 있는 실제 인물'이 아니고 화면 속의 캐릭터와 같은 사람이니까 그정도의 배신감이나 충격까지는 아닐 것 같다.


요즘 팬카페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그리고 SNS와 유튜브에 올라오는 콘텐츠도 실시간으로 본다. 어떨 땐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도 되나 싶다. 그런데 끊을 수가 없다. 그 배우가 좋은 것도 맞지만, 어쩌면 실제로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대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마음을 누군가로 채워서 충만하게 만들고 싶은데 당장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 얼마 전 소개팅을 했는데 상대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가꿔나가야 하는 것에 부담이 생겼다. 남들 눈엔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게 사실인 걸 어쩌겠어. 일단 지금 행복하니까 이 덕질은 계속해 나갈거다. 상대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아도 혼자만의 짝사랑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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