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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민 May 23. 2023

걷다보면 걱정이 사라진다

말로만 듣던 올레길 걷기

이틀 전 급 끊은 제주행 티켓

프로 퇴사러인 나에게 지금 회사는 왜 이렇게 쉽지 않은지 모르겠다. 상사는 우선 쉬어 보라며 금요일과 월요일 휴가를 줬다. 여행을 가는 것까진 정했는데 해외는 애매하고 국내 다른 지역은 아무리 다녀도 제주만큼의 임팩트는 없는 것 같아 바로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버렸다. 성수기임에도 토-월 2박 3일 일정 비용은 나름 괜찮았다.


혼자여도 다 할 수 있네?

몇번 혼자 여행을 해봤지만 낯을 가리고 소심한 탓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들이 많다. 20대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땐 혼자 레스토랑에 갈 자신이 없어서 낮에 피자 한 조각으로 때웠던 기억, 몇 년 전 제주 여행에서도 혼밥을 못해서 테이크아웃해서 숙소에서 먹던 기억. 현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가는 건 괜찮은데 왜인지 모르게 혼자서 뭘 하는 건 쑥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난 정말 개인주의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가 보다. 근데 이번에는 혼자서도 다 했다! 가고 싶은 식당도 가고 분위기 좋고 예뻐 보이는 카페도 갔다. 용기를 낸 것도 아닌데 그냥 해지더라. 아무렇지 않았고 사람들의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의 나였으면 절대 못했을 텐데.. 여러 영향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것도 스스로 성장했다는 거겠지?


해변가와 오름을 한 번에, 올레길21코스

특별한 계획 없이 동네만 정하고 잡은 숙소. 근데 이 숙소 바로 앞에서 시작되는 올레길 코스가 있단다. 될놈은 다 된다더니 올레길 마저 나를 돕네~ㅎㅎ 속으로 뿌듯해하며 조식을 먹고 바로 숙소를 나섰다. 원래 길치인지라 '올레패스 앱을 계속 켜고 다녀야 하나.. 보조 배터리가 없는데..' 걱정을 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올레길 표시가 곳곳에 있어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오히려 폰을 보지 않고 리본과 화살표만 찾으면서 가니까 미션을 클리어하는 거 같아서 지루하지도 않고 좋았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친하든 안 친하든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굳이 안 해도 되는 말까지 하게 되고 꼭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을 왜 했지? TMI를 너무 많이 말했네 싶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혼자서 걸을 땐 내가 가야 할 길, 눈앞 경치에만 집중하면 된다. 노래 가사를 음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멍을 때리기도 하고. 이 자체로 피로도가 줄고 힐링이 되는 것 같다.


왜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있지?

걷기 초반에는 내 삶의 모든 카테고리를 돌아가며 곱씹고 생각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원래가 이렇게 생겨먹어 안 할 수가 없었다. 특히 고민되는 연애와 직장생활에 대해 혼자 분석하고 결과에 대한 가설과 방안도 세워봤지만 그 꼬리의 꼬리를 무는 공상의 끝은 '될 대로 되겠지'였다. 부정적이고 내려놓는 뉘앙스가 아니다. 몇 시간을 혼자 걷다 보면 '왜 내가 답도 없는 똑같은 생각을 계속하고 있지?' 저절로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 의미 없는 고민은 그만하자 싶어지는 시점! 너무나 진리인 그 말을 굳이 고생하며 힘들게 걸어야만 깨우칠 수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확실히 다른 것 같다. 누구에게 조언으로 듣거나 책에서 읽는 교훈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라서 더 확실하게 꽂힌다!

내가 할 수 없는 건 아무리 고민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도저히 모르겠는 남자친구의 머릿속. 일을 왜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는 회사 동료들.. 이건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질 않나. 나는 그저. 사는데 부족하지 않게 돈을 벌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내 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남들과 부정적인 소통을 하며 스트레스를 쌓아가는 그런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걷다 보니 또 나아갈 힘이 생긴다

아줌마 아저씨들만 걷는다고 생각했던 제주 올레길. 먼저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잘되어 있어서 놀랐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모바일 어플도 있는데 처음 걷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편하게 되어 있다. 다만 힘은 든다. 코스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걸은 코스는 오름을 올라야 해서 웬만한 등산만큼 숨이 찼고 온몸이 땀범벅이 될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힘듦을 잠시만 견디면 세상 유일한 제주도의 멋진 전망까지 감상할 수  있다.

지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

운동 이상의 의미를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제주 올레길. 앞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면 또 다른 코스를 찾아 제주에 오게 될 것 같다. 아마도 조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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