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만 덥고, 땀나지만 시원해
지난 여름 친구들과 설악산에 갔다. 본래 목적은 케이블카를 타려던 거였는데 하필 딱 그 시간에 강풍이 심해서 운행이 불가하다고 했다. 수학여행 이후 거의 15년 만에 온 설악산인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싶어서 조금이라도 걸어가 보기로 했다. 아마 이때가 등산에 호감을 갖게 된 시작점인 것 같다. 정상까지 가진 못했지만 너무 좋았던 경험이라 서울로 돌아와서도 산에 꼭 가리라 속으로 생각했었다. 친구들과도 45살쯤 아웃도어를 입고 등산스틱을 갖고 설악산에 다시 가자고 약속했다.
마을버스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 2개의 산이 있다. 이 동네에 4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올해 들어 처음 가보게 됐다. 이유는 단순.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으로 운동도 제대로 다닐 수 없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워 혼자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는데, 내 기준에서 가장 접근성이 낮고 안전한 게 등산이었다. 하지만 초급자 코스로 추천되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저질체력이라 그런지 완전 땀 뻘뻘. 너무 더웠는데 정상에 서서 바람을 맞으니 몸도 시원하거니와 꽉 막힌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나 음악을 들으며 걷는 걸 좋아한다. 언제부턴가 30분 정도 걷는 건 당연하게 여겨져 지하철 2-3개 거리는 걸어 다니는 편이다. 요즘에는 목적지 없이 그냥 걷기도 한다. 해질녘 나가서 일단 걷는다. 아는 길을 지나서 모르는 길이 나와도 그냥 가본다. 어쨌든 길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너무 멀리 가면 버스나 택시 타고 돌아오면 되지 뭐'라는 마음으로. 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에는 모르는 산에 혼자 간다는 게 살짝 무서웠다. 길 잃으면 어쩌지? 혼자 온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지? 막상 올라가 보니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일단 등산로 입구에 가면 등산객들이 많다. 따라가면 된다. 산속에서도 마찬가지. 나있는 길을 그대로 가다 보면 내려가는 길은 반드시 있었다. 처음에는 한 명이라도 있는 길을 선택했는데 요즘은 아무도 없는 길로도 가본다. 낯선 길을 통해 내가 아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 기분은.. 마치 어떤 미션을 클리어한 것 같다. 재밌고 왠지 모를 성취감까지 든다. (물론, 해 질 걱정 없는 아침이나 대낮에)
평지에서는 웬만큼 걸어도 땀까지 나지는 않는데 산은 10분만 올라도 몸에 열이 나고 땀이 맺힌다. 지난주에는 서대문 안산에 올랐다. 날이 추워서 패딩까지 입었는데 오르는 중에 땀이 많이 나서 결국 패딩은 벗고 반팔로 정상까지 올랐다. 기분이 진짜 묘했다. 바람은 찬데 몸에는 열이 나고.. 땀은 나는데 너무 시원하고.. 한해 한해 지나면서 추위를 더 타게 돼서 집안에서도 긴팔을 입는데.. 산은 야외인데도 옷을 더 벗게 된다. 그러다 콧물을 훌쩍이긴 하지만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가 면역력 상승에 도움이 되고 산에 오르는 것 자체로 근력운동이 되니 건강해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일까? 아무튼 에너지 소모량이 많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는데 아직 그 효과는 경험하지 못했다.. 언젠가 효과가 있길 기대해보며.. 일단은 몸에 힘이 좀 생기고 건강해지면 좋겠다.
등산은 굳이 친구들과 시간과 장소를 맞추지 않아도 내가 가고 싶을 때 아무 때나 갈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또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좋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정상에서 김밥도 먹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는 재미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인들과 서울의 산 몇 곳을 다녀왔다. 다들 몇 년 만에 하는 등산이라 너무 만족해했다. 운동도 되고 기분 전환도 된다며. 그런데 회사생활에 지치고 피곤하니 매번 함께 하진 못한다. 아쉽다.. 그래서 등산의 장점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원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산에 올라가 보고 싶다. 아이 니드 등산 메이트.. 어른들이 왜 산악회에 가입해서 다니는지 이해되는 요즘이다.
여행과 운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캠핑, 등산, 골프 등 아웃도어 활동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등산에 입덕하는 일은 없었겠지. 심심해서 하는 수 없이 시작했지만 이제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대도 꾸준히 하고 싶은 취미활동이 되어버렸다. 집에 있으면 마냥 눕고 싶고 기대앉고 싶고 늘어지는데 일단 나가기만 해도 괜찮아진다. 처음엔 춥지만 금세 몸에 열이 난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파란 하늘과 나무들을 보면 정신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
- 장기하와 얼굴들 '등산은 왜 할까' 중 -
처음에는 이 가사에 매우 공감했는데 막상 해보면 그 답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을 왜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