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강산갈래 Nov 27. 2021

[땡큐, 블루!] 스포츠는 좋아하지만 잘 못하는 아이

공놀이가 너무 좋아 멈출 수 없는 사람의 심판 이야기 - 1화

 저는 어릴 때부터 각종 스포츠를 가리지 않고 시청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시점의 기억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결승전, 당시 황영조 선수가 주경기장 마지막 바퀴를 돌고 금메달을 따는 모습일 정도니까요. 


 스포츠를 본격적으로 시청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낯선 환경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경기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서정원의 후반 막판 동점골, 볼리비아전의 졸전, 아쉬웠지만 끝까지 추격했던 독일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1994년 저의 관심을 확 끌었던 것은 야구였습니다. 당시 저는 삼촌들, 고모들과 한 집에서 같이 살았었는데, 야구 경기 결과를 꼬박 챙기셨던 한 삼촌께서 이제 유치원 졸업을 앞둔 저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1994년은... 그렇죠. 모 구단이 리그를 지배하던 시즌이었습니다. 

(그리고 27년째 우승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TV를 틀고 야구 중계가 시작되면 나오던 라인업 소개, "1번 타자 유격수 ㅇㅇㅇ"이라는 말은 지금도 저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던 저는 당연히 서울 팀을 응원하기 시작했고, 제가 응원하는 팀이 지는 방법을 모르는 팀이었기에 모 구단에 더욱 애착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선수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 타격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그 팀에는 유능한 좌타자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 때문에 항상 4번 타자보다는 1번 타자를 먼저 하겠다고 외치던 저였지만, 타격은 쭉쭉 뻗는 공을 치고 싶었기에 어릴 때 친구들이랑 동네 야구를 할 때부터 왼손으로 공을 쳤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저희 집에는 그 팀의 깃발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잠실야구장에 종종 친구들과 놀러 갔는데, (당시에는 초등학생 입장 무료, 7회 이후 입장 무료 등이 있었죠) 하루는 어떤 분께서 경기에 졌다고 난간에서 흔들던 깃발을 그냥 버리고 가시더라고요.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주워와서 잘 세척한 다음에 야구장 갈 때마다 들고 다녔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할 기회는 많았습니다. 야구로 유명한 ㅁㅁ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바로 집 앞에 있었기에, 동네에서 야구를 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동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달리기는 곧잘 하고 체력과 근성은 좋은 편이었지만, 키도 크지 않고, 눈도 좋지 않았으며, 가장 큰 문제는 운동 신경이 영 꽝이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조르기도 했었지만, 부모님은 제가 운동에 영 소질이 없는 걸 아시고서는 절대 시켜주지 않으셨었죠. 특히 어릴 때부터 공을 멀리 보내기는 하는데, 제구력은 정말 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박찬호 선수가 잘 던지면 오버핸드로, 김병현 선수가 잘 던지면 언더핸드로 던지고 놀았는데, 제겐 정말 큰 스트라이크 존이 필요했습니다. 


 대신 남들보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기에 다른 쪽으로 제가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자 했습니다. 규칙을 열심히 공부해서 힘보다는 머리로 뭔가를 얻어내고자 했죠. 친구들과 같이 운동을 하거나 보다가 애매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혹은 규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가 앞서서 상황을 정리했었고, 규칙이 허용되는 한에서 할 수 있는 영리한 플레이들을 하면서 제 부족한 신체 능력을 메꿨습니다. 커서 심판이란 일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던 것은 어릴 때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많이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와 박지성, 이영표 등 축구 스타들의 해외 진출로 축구 붐이 일었던 시절이니까요. 친구들과 점심시간, 방과 후, 주말 가리지 않고 축구를 했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보급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 등 경기를 놓치지 않고 시청했었습니다. 야구는... 학교에서 자습을 하다 보면 야구를 볼 수도 없었고, 또한 그 팀이 한창 못할 때다 보니 관심도 덜 가기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하면서도 각종 규칙을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월드컵에서 스위스전 당시 오프사이드 논란에 대해서, 저는 안타깝지만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죠. 리플레이로 본 화면도 화면이지만, 규칙에 따르면 부심이 깃발을 들어도 주심이 최종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속이 상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는 골을 먹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저의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정리해보니, 어릴 때부터 몸보다는 머리로, 실전보다는 규칙과 더 친숙했던 저의 경험들은 고스란히 성장해가면서 심판이라는 자리에 익숙한 저를 만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저는 심판이라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시작했을 때 전혀 두려움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물론 심판이 어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심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 저의 대학교 이야기에서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