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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강산갈래 Jan 26. 2023

그래서 너의 역할이 뭐야? 저요? 달리기요.

(미국 고교야구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규칙 – 1)

 1974년 오클랜드 에이스는 자국의 대표적인 단거리 선수 허브 워싱턴(Herb Washington)을 영입한다. 100야드를 9.4초에 뛸 수 있었던 그의 주력에 반한 당시 에이스의 구단주 찰리 핀리(Charlie Finley)는 워싱턴과 1년 $45,000라는 계약을 맺는다. 워싱턴은 1974년 92경기에 출전해 29득점 29도루 16도루자라는 다소 명성에 비해 초라한 기록을 남겼고, 1975년에는 13경기에 출전해 4득점 2도루 2도루자만 기록한 채 여름이 가기 전에 방출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인 서말구를 영입했었다. 하지만 서말구는 팀에 속해 있었던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프로야구에서는 달리기만 잘한다면 경기에 나서기 쉽지 않다. 경기당 사용할 수 있는 선수의 숫자는 제한적이기에 타자는 타격과 수비를 잘해야, 투수는 공을 잘 던져야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달리기를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타자인데 타격을 정말 못 한다면 그건 그저 상대방에게 아웃 카운트 하나를 거저 주는 것이고, 수비를 정말 못 한다면 매번 그 선수 쪽으로 공이 갈 때마다 불안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루와 루 사이를 2.6초에 오갈 수 있는 선수라도 수비와 타격을 못하면 반쪽자리 선수도 안 된다.

 하지만 미국 고등학교 야구에서는 타격과 수비를 못해도 달리기만 잘 할 수 있다면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그것도 경기 처음부터 끝까지, 선수 교체 없이 계속 나설 수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미국 고교야구의 특이한 규칙, Courtesy Runner 제도 덕분이다. 


 Courtesy Runner. 한국어로 직역하면 혜택주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지명주자라고 칭하겠다. 필자가 지명주자라고 칭한 이유는 후술하겠다. 사실 이 제도는 완전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유소년 리그 혹은 사회인 리그 몇몇 곳에서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주자가 된 투수와 포수 대신 출전 가능한 다른 선수가 주자를 대신 할 수 있는 규칙이다. 



NFHS Baseball Rules Book - Courtesy Runners

1. At any time, the team at bat may use courtesy runners for the pitcher and/or the catcher. In the event that the offensive team bats around, the pitcher and/or catcher who had a courtesy runner inserted on their behalf may bat in their normal position in the batting order. 


지명주자

1. 언제든지 공격팀은 투수와 포수를 대상으로 지명주자를 사용할 수 있다. 공격팀이 일순한 경우, 투수와 포수는 자기 대신에 지명주자가 출전했다 하더라도 원래 타순에서 타격할 수 있다. 


 사실 이 제도는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 도입된 제도이며, 지명주자 규칙은 야구규칙 본론이 아닌 부록 ‘경기속도 향상을 위한 추천 규칙(Suggested Speed-up Rules)’ 부분에 쓰여 있다. 다른 야수와 비교해 시간이 다소 필요한 투수와 포수가 벤치에서 다음 수비를 준비할 수 있도록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이 제도의 골자이다. 최근에 새로 생긴 제도도 아니다. 미국 고교야구에서 정확하게 언제부터 이 제도가 시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NFHS(미국고등학교체육연맹)가 1999년에 지명주자 규칙을 언급한 기록이 있는 걸 봐서는 최소 20년은 이어져 온 제도이다. 


 그러면 누가 지명주자가 될 수 있을까? 그 답은 지명주자 규칙 4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NFHS Baseball Rules Book - Courtesy Runners

4.  Players who have participated in the game in any other capacity are ineligible to serve as courtesy runners

지명주자

4. 경기에 어떤 방식으로도 출전한 선수는 지명주자로 출전할 수 없다. 


 위 4항에서 볼 수 있든, 현재 출전 중인 선수 혹은 교체된 선수는 지명주자가 될 수 없다. 즉, 11번째 선수가 투수 혹은 포수를 위해서 주루만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지명주자 규칙 2항은 ‘같은 주자가 투수와 포수 모두의 지명주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고등학교 야구에서는 이론상 한 팀이 동시에 최대 12명의 선수를 경기에 출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주루만 전문으로 하는 선수가 경기에 출전할 수 있기에 필자는 Courtesy Runners를 지명주자라고 부르려고 한다. 


 딱 9명 혹은 10명의 선수가 라인업 카드에 올라간 팀이 아닌 이상 보통 지명주자 제도를 사용하지 않는 팀이 드물다. 물론 팀마다 다르지만, 고교야구 수준에서 투수가 보통은 그 팀에서 가장 잘 치고, 잘 달리는, 잘 던지는 소위 전천후 에이스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투수를 위한 지명주자는 상대적으로 덜 사용되는 편이다. 하지만 포수가 출루에 성공하면 공격팀은 지명주자를 곧잘 쓴다. 포수들이 덩치가 큰 것은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비슷한 편이며, 포수의 체력적 부담도 덜 할 겸 공수교대도 빠르게 할 겸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미주리(Missouri)주의 경우 고교야구 1군(Varsity)은 3월 중순부터 5월 초까지 9주 남짓 되는 기간에 40경기 전후를 치르기 때문에 포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조금이나마 휴식을 주는 것 같다.  


 그럼 누가 지명주자 역할을 맡을까? 평범한 수준의 팀이나 2군(Junior Varsity) 이하 경기에서는 야구 경험이 부족하지만 신체적 능력은 뛰어난 친구들이 주로 지명주자로 나선다. 달리기를 잘하지만, 슬라이딩이나 주루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선수들이 경기 경험을 쌓기 위해서 지명주자로 나선다. 하지만 선수층이 두꺼운 강팀의 경우 도루도 곧잘 하며 한 베이스를 더 따낼 능력이 있는 전문 대주자 요원들이 지명주자로 나선다. 


 지명주자로 설정된 선수라 하더라도, 차후에 다른 포지션으로 경기를 나설 수 있다. 지명주자 규칙을 종합하자면 지명주자는 지명주자의 역할로 출전한 그 이닝에는 다른 포지션에 들어갈 수 없지만, 다른 이닝에는 교체선수가 되어 경기에 나설 수 있다. 물론 다른 야수가 되어 경기에 출전한다면 그 선수는 이 경기에서 지명주자 역할을 다시 맡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회초 2루타를 치고 나간 F2를 대신해 R1이 지명주자로 나갔다면, R1은 1회초 공격에는 F2의 지명주자 역할만 할 수 있다. 만약 1회말 F9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경기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R1이 F9를 대신해 우익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 경기에서 R1은 2회부터는 F2대신 주루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규칙인 지명주자를 알아보았다. 이 규칙은 시간 단축이라는 원래의 목적 외에도 빠른 주자가 투입되기에 경기를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며 11번째, 12번째 선수가 출전할 수 있기에 더 많은 학생이 팀 스포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을 찾기 거의 어렵지만, 굳이 꼽자고 하면 심판이 기록지에 한 줄 더 쓰고, 수비팀에 한 마디 통보를 더 해야 한다는 정도다. 이런 규칙이 우리나라 고교야구에도 도입된다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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