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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강산갈래 Feb 27. 2023

심판은 코치의 친구?

미국에서 경험한 코치와 심판과의 관계

 이 글은 코치라운드 뉴스레터 제22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년간 야구 심판 활동을 하다가 2019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사를 와서 생활하고 있다. 오늘은 미국에서는 코치들이 심판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경험한 수많은 다른 야구 문화 요소 중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코치와 심판이 서로를 친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2019년 세인트루이스 심판 교육에서 가장 처음으로 들었던 이야기는 코치와 경기 전, 혹은 라인업을 교환하면서 인사를 하고 편하게 통성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성(Last name)이 아닌 이름(First name)으로 서로를 부를 수 있도록 코치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교육받았다. 코치들 또한 심판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다음에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면 편하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봐 준다. 물론 경기가 고조되었을 때 항의를 격하게 하는 것은 이와 별개의 사안이다.      


 이런 문화는 사실 필자가 한국에서 심판을 볼 때는 경험하기 어려웠다. 경기 시작 전 라인업을 주고받을 때, 필자의 이름을 코치와 선수들에게 알리기는 하지만 코치들과 통성명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코치들이 필자에게 이름으로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보통은 필자는 ‘심판님’, 때로는 ‘심판’, ‘엄파이어’ 정도로만 불리고, 필자 또한 양 팀의 코치를 ‘코치님’ 혹은 ‘감독님’으로만 부르며 비즈니스 차원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반말을 듣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한 번은 항의하러 나온 코치에게서 ‘내가 야구 경력이 30년인데’라는 말도 들어봤다. 고작 30대밖에 안 된 심판인 내가 살아온 만큼 자기는 야구를 해왔다며 필자가 내린 판정이 틀렸다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모든 한국 코치들이 심판을 이처럼 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에서 심판을 볼 땐 보통 코치들과 묘한 긴장감 속에서 경기를 보곤 했다. 

     

 미국 코치들이 심판을 친근하게 대하는 이유는 자기 팀에 대한 판정을 잘 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일상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필자와 L학교의 3군(Freshmen) 코치 S나 M학교의 1군(Varsity) 코치 J와의 관계를 예로 들고자 한다. 2021년에는 L학교 3군 경기에, 2022년에는 M학교의 1군 경기를 유독 많이 맡게 되면서 이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는데, S나 J 모두 경기 전, 후 편하게 인사를 먼저 해주고 안부를 물어봐 주는 정말 신사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최근 경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난 경기에서 다른 심판이 했던 아쉬운 판정 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이들은 자기 팀의 승리를 위해 열정적이고 끈질긴 사람으로 바뀐다. 달리 말하면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심판에게 어필을 한다는 것이다. 불과 30분 혹은 1시간 전에 친근하게 다가왔던 사람이 경기장 안에서 돌변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어필이 받아들여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경기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필자가 경기 전에 만났던 신사적인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다.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 선수들과 코치들이 심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가 끝나면 코치-심판이라는 다소 위계적일 수 있는 관계에서 해방되며, 다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돌아간다.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코치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경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을 필자와 공유하며, 규칙에 대해서 본인들이 잘 몰랐던 것에 대해서 편하게 질문을 한다. 즉, 경기장에서 있던 일은 경기장에 남겨 두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경기장 밖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과거 H모 구단에서 뛰었던 J선수가 감독으로 있던 유소년 팀 경기의 심판을 본 적이 있었는데, 경기 중 강력하게 어필을 했던 J감독이 경기 끝나고 살며시 필자에게 다가와 팀의 분위기를 위해서 자신이 불가피하게 강하게 어필을 했다면서 사과한 적이 있었다. 심판을 보면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꽤 얼떨떨했지만, 이게 프로 출신의 경험과 포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필자가 겪었던 경험에 따르면,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강도 높은 어필을 한 코치와 경기가 끝나고 편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어필을 강하게 한 팀이 이겼으면 필자를 운이 좋은 심판으로 바라보고, 졌으면 필자를 패배의 주역으로 보는 시선을 종종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코치 선에서 남아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것이 선수들에게 전염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물론 현지에 있는 코치들 입장에서 이 심판을 한번 보고 말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기실 이 지역에서 야구 및 소프트볼팀과 심판과의 관계는 정말 오랫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필자가 느끼기에는 경기 전후로 코치들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어떠한 의도를 찾아볼 수 없다. 코치들이 웃으면서 건네는 “Good afternoon,” “How’s going,” 혹은 “It’s a great day to play a ball game” 과 같은 인사는 자칫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공간일 수 있는 야구장 혹은 소프트볼장이라는 곳을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인사를 주고받는 데에는 나이나 성별, 인종 또한 중요하지 않다. 인사를 통해서 심판은 심판이자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받는다. 그런 만큼 심판인 필자 또한 코치, 선수, 그리고 관객을 항상 존중하려고 한다.  

     

 학생 야구와 소프트볼이 열리는 경기장은 성적이 우선시되고, 경쟁만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다. 엄연히 교육의 연장선에 있는 곳이다.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은 경기장에 있는 어른인 코치, 심판, 경기 관계자 및 학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특히 선수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코치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할 수밖에 없다. 코치들이 경기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기본적인 예의와 친절함은 특별하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보고 배우게 될 것이다. 미국 코치들이 심판을 적대시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나이나 성별, 인종 등과 관계없이 동등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대하려는 모습은 우리나라 코치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① 미국에서는 Arbiter라는 시스템을 통해 심판 일정을 전산으로 임의로 배정하며, 심판은 자기가 설정한 출장 가능 거리(Travel limit)에 따라 경기를 배정 받는다. 

② 세인트루이스에는 야구와 소프트볼을 하는 학교가 100개가량이 되고, 특히 어떤 학교는 3군까지 운영하기도 한다. 야구는 봄에, 소프트볼은 가을에 각각 두 달가량 정규 시즌을 진행하며, 약 30~40경기로 이뤄져 있다. 보통은 한 코치가 야구와 소프트볼 코치를 겸업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다. 

③ 현지 베테랑 심판들의 경우 각 팀의 코치들이 고등학교에서 선수로 뛰었던 당시에도 심판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필자가 속한 조직 및 미주리주 협회에 등록된 심판 중 가장 고령인 85세 심판분의 경우 50년간 심판 활동을 하면서 셀 수도 없는 지역 출신 야구 및 소프트볼인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 https://bit.ly/3vK4aSp                    




 94년 LG의 우승을 보면서 야구에 빠지게 된 이금강은 대학교 동아리 야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야구 관련 일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스누리그 심판위원장 및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KBO 심판학교를 수료하고 전국야구심판협회에서 심판 활동을 했다. 현재는 유학 중인 아내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세인트루이스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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