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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 Aug 04. 2018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Tree of Life)>

출근길 영화 한 편(2)

 오늘은 야식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선물로 받은 그래놀라 종이봉지를 뜯기로 한다. 한동안은 그대로 두려고 했다. 그대로 두면 새로운 것이 내 손안에 들어왔을 때의 만족감도 팽팽한 질소 속에서 보존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뜯지 않은 상태로 그래놀라를 감싼 종이 봉다리의 촉감은 딱 알맞게 거칠거칠하면서도 부드러워서 그 애틋한 모양새 그대로 한동안은 찢어지거나 손상되지 않게 보존하고 두고 싶었...으나, 에라 모르겠다. 역시 마시멜로우는 받은 순간 먹어야 맛있다지 않은가. 



아몬드 밀크에 시리얼을 타 먹으며 적는 영화 리뷰.

오늘의 영화는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2011)다.

The Tree of Life (2011), 2h 19min




비비씨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선 중 7위, 
역대 칸 영화제 종려상 수상작(2011년). 



영화의 타이틀. 훌륭하다. 이 영화 고급진 영화, 내 입맛에 맞을까? 


나의 취향은 과히 까다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영화만 찾아보지도 않다. 이것저것 먹는 잡식성 영화 관람가 랄까. 종종 한 가족이 지지고 볶고 울고 난리를 피우는 휴먼다큐류의 영화도 찾아보며 킥킥댄다. 의외로 인생에서는 미슐랭 별 3개의 식당에 앉아있는 것보다 선물로 받은 그래놀라 한 봉다리를 들고 침대에서 한 입씩 베어 먹는 맛에 위로가 될 때도 많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나의 영화적 취향에 대해 떳떳하게 잡식성이라고 밝히게 됐다. 

이 영화,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을 여러 개 써봤다. 이 영화는 텍사스의 한 소년의 우울한 유년기로부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텍사스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을... 왜 한 문장으로 써보는 게 쉽지 않지, 하고 고민했으나 간단한 답을 얻었다. 소년의 성장배경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배경이 주인공인 역설적인 영화. 이 영화는 주인공(主人公)이 없다.


주인공이 없는 영화?

말 그대로다. 사람이 나오고 그의 시점과 관점, 감각을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는 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영상은 어느새 밑도 끝도 없이 우주를 보여주거나 하늘을 보여주거나 소년의 그림자를 따라간다거나 고요한 침묵이 이끌어내는 누군가의 상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이 영화. 왜 이러는 걸까?


정제된 영화

 감독인 테런스 맬릭은 영화를 통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본인의 감정과 사상은 날카롭게 가다듬어 가장 영화스럽게 표현할 줄 알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테런스 맬릭은 미국의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라고 소개되어있고 맬릭(1943년 생)은 40년 동안 단 7개의 작품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매 영화가 지닌 호소력은 상당히 짙어서, 크리스토퍼 놀란과 데이비드 핀처는 그를 가장 존경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고 했다. 가공된 보석이라는 말 외에 어떤 표현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슬픔을 추스르는 아이를 안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신이었을까


 여기, 영화 속에 소년이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종종 사랑을 말하고자 하나 실패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대부분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거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윽박으로 끝나기 일쑤다. 사랑을 나누어주기에는 자신 안의 강박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라고 할까. 


 여리거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년기의 상처는 기억하기 마련이다. 나는 아직도 친구들과 만나 가족, 특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는 살을 부때끼는 존재들과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면서 성장하고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기보다는 사회의 챗바퀴를 돌리기 위해 정작 나의 상처들은 마음속에 파묻어두기 일쑤다. 상처를 대면하기에 그 상처는 아직도 너무 크고 깊어서 내면의 바닷속에서 끌어올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거나, 혹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독 테런스 맬릭의 다섯 번째 연출작인 트리 오브 라이프는 2011년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심사위원장으로부터 황금종려상에 '가장 알맞은(fit)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1950년대의 텍사스가 배경이며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라고 알려져 있다. 감독은 무덤덤하면서도 날카롭게 본인의 유년기의 공허함, 침묵, 슬픔, 우울을 한가득 꺼내놓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영화를 보는 모두가 잊고 있던 본연의 우울 속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강렬한 감정들이다. 그러나 보는 나도, 친구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면 모든 것들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정제된 슬픔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영화 속에 등장한 감독의 우울함은 날 것 그대로가 아니다. 아주 섬세하게 가공한 형태의 슬픔이다. 숙련된 보석 세공사의 날카로운 손길이 떠오를 정도다. 그래서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추스른 사람이 담담하고 초연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우울. 아름다워서 더 슬프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다들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원래 세 단락만 길게 쓰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꼭 한 번 적어보고 싶은 소재가 있어 한 번 숨을 가다듬고 한 단락을 더 길게 늘여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영화 속에 "나를 치유해준 힘은 신이었습니다."라는 직설적인 문구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이 차용한 방식은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생명체의 세포, 젊은 어머니와 빨래 사이로 보이는 햇빛, 혼자 있던 다락방에서 느껴졌던 누군가의 숨길 등이다. 우주의 거대함 속에서 소년의 우울은 너무도 자그마해져 마치 집어삼켜질 것만 같다. 그리고 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우주와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속에서 소년의 우울감은 자연스럽고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다.


왜 우주인가

이 영화는 연필로 쓴 수필 같은 영화로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 많았다. 군데군데 연필심이 문질러진 도 있고,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흐리기도 했다. 감독은 바느질을 잘했다. 영화속 군데군데 구멍이 난, 엉성하게 엮어놓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사이를 거대한 역사의 흐름들로 메꾸고 스토리의 시점을 평범한 소년에서 신의 시각으로 변화시킨다. 화면 전환은 비논리적이고 감각적이다. 소년의 우울함은 어느새 우주로, 세포로, 백악기의 모습으로 바뀌어있다. 나사(NASA)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별들과 행성으로 가득찬 우주. 고등학교 이후로는 들춰본 적도 없는 지구과학 책에 등장할 것만 같은 인간 세포 속 작은 움직임들. 상대를 쓰러뜨리고 밟은채 일어서는 공룡들. 그리고 주인공 소년의 성년형태로 추정되는 한 남성의 상상 속 유토피아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왜 우주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의 경우는 서구의 뿌리 깊은 기독교 세계관 때문이라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드높은 하늘의 별과 태양을 우러러보면서 서구의 작가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상하던 오랜 전통이.


힐링을 넘어선 치유 :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

우울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대들기를 기대했을까? 우울한 소년이 자라나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새로운 행복을 만나길 기대했을까? 나는 이 소년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하고 돌아봤을 때, 나는 내가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다른 무언가를 내심 기대하고 영화를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바람을 투영한 것이리라. 예민하고 섬세한 소년이 오롯이 행복하기에는 세상은 아직 행복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공간이니까. 어느새 나의 마음속 속삭임이 새어 나와 있었다. 나 스스로 어느새 포기하고 있었다. 나 홀로 오롯이 행복할 수 있는 온전한 존재라는 믿음.



신은 죽었다

대학교 시절 배웠던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니체의 글에 대해 다시 한번 찾아보면서 알게 된 문장이 있다. 신은 죽었다 뒤에는 어떤 문장이 따라오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었는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 즐거운 학문(1882) 中-

 다들 신을 죽인 건 우리였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위로할 무언가를 잃어버렸을까.


나와 당신에게 감독이 던지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도발

 우리는 행복을 사고파는 시대에 산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 화폐라는 가치는 우리의 삶 자체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내가 매는 가방, 내가 신는 구두, 내가 타는 차, 심지어는 나의 여자 친구, 남자 친구까지 평가를 당하기 딱 좋은 이 세상. 우리는 평가에 치여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늙어간다. 이때  이 세상이 잘못된 걸까 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잔잔한 한 편의 시처럼 녹여냈다.





내가 이 거대한 영화를 잘 소화시켰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가 없다. 지금, 나는 배가 고플 때 아몬드 밀크와 선물로 받은 그래놀라 한 봉다리에 만족하고 더 큰 그 무엇도 필요하지가 않다. 하지만 때때로 방향을 잃은 누군가에게 필요할, 신의 선물 같은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라는 린넨 위에 한 폭 한 폭 수 놓인 아름다운 성경 한 편.


 나에게 총 12편의 영화를 추천해준 나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친구 지혜에게 감사하며.


추천: 종교, 철학적인 주제를 깊이 탐구하고 싶거나 유년기의 상처에 대해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보려는 학구파

비추천: 가벼운 시간 때우기용 영화는 절대 아님


참고문헌

[1] 나무 위키, 트리 오브 라이프

[2] 다음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3] 테런스 맬릭, 위키 피디아

[4] 테런스 맬릭, 나무 위키

[5] 니체,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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