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의 글 [일본5일]
먼저 떠난 너에게 후지산을 글로 남긴다. 후지산을 보러온 우린데 끝내 산의 끄트머리만 보고 가는구나. 양껏 즐기지 못한 후지산을 이렇게라도 진하게 남겨보려 적어. 네가 먼저 간 아침에 나는 차를 마시다가 후다닥, 바나나를 먹다가 후다닥, 짐을 싸다가 후다닥 밖에 나가보았어. 마지막 날, 혹여 끄트머리라도 드러냈을 후지산 풍경을 놓치고 갈까봐.
내가 가와구치코 마을을 택한 건 오직 후지산 때문이었지. 어느 사진을 봤거든. 선명하고 웅장한 후지산의 만년설을 앞에 뒤에 두고도 태연하게 학교를 가고, 운전을 하고, 식당을 하는 마을 사진말이야. 마을 도로 끝에 산이 끝과 시작의 경계 없이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마을과 거리감이 크지 않았어. 저 도로를 타고 차로 계속 달리다보면 오래지않아 우뚝, 산 앞에 멈춰 서겠구나 싶게. 그만큼 후지산은 마을에 배어있었지. 마을을 지키는 정승으로. 유난스럽지 않은 일상과 후지산의 조화가 탐이 났어. 나도나도, 그 그림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듯 끼어들고 싶어 향한 길이었어.
그래서 나른 길. 오직 후지산을 보기위해 서울서 도쿄로, 지하철로, 다시 버스로 두 시간을 달렸는데. 이게 웬일이야. 사방에 후지산 사진과 캐릭터로 분위기는 충만한데 정작 후지산이 없는거야. 눈 뜨면 코앞에 후지산과 함께 사흘밤낮 지낼 날을 기다렸는데. 한껏 마신 시골공기가 좀 허무해졌어.
아무렴 사흘 내내 못볼까 싶었지. 구름이 서려 하늘과 분간되지 않는 저 곳에 구글은 후지산이 있다고 가리키고 있는데. 겉만 훑는 내 눈보다 경험 부자 구글을 믿을 수밖에. 보이지 않는 후지산의 무탈함을 확인하면서 내일은 안개가 걷히려니 했어. 일어나서 한 번, 길을 나설 때 한 번, 걷다가 또 한 번, 해가 지기 전 한 번. 안 보여도 거기있을 후지산을 확인하는 건 우리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됐지. 그러다보니 동서남북 분간 못하는 나도 후지산 방향은 몸에 익혔어. 동굴을 보러가서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후지산이 어디있지?” 빈 안개 속을 확인하던게 짧은 습관이 됐어.
한 이틀 그러고 나니까 우리 구호는 좀 달라졌지. “후지산이 어디있지?”에서 “있다고 믿으면 후지산”으로. 안개로 뒤덮인 날, 후지산이 잘 보인다는 호수 스팟을 찾아가고 후지산 전망대를 간 이유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무탈할 후지산, 우리가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게 중요하니까. 호수와 전망대에서 역시나 감감무소식인 후지산의 기운을 가득 들이마시고 돌아오는 길, 나는 후지산 마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기다릴 것이 있다는 건 꽤 좋은 일이라고.
실적없는 노력을 하던 마지막 저녁에 오늘도 후지산 너는 잘 지냈니, 습관처럼 후지산을 확인하다 탄성을 질렀어. 후지산이 후지산이, 드디어 안개를 뚫고 나온거야. 후지산이다! 목소리를 미처 낮추지 못한 우리를 보고 지나가던 외국인은 비웃었지만 그런 시선은 보이지도 않았어. 당장 우리는 후지산에 더 가까워져야하니까. 사흘만에 구름을 뚫고 나온 후지산은 신선 사는 산처럼 아른거렸는데 신기루로 믿고 있던 것이 실제로 신기루처럼나타나니 더 감격스러웠어. 들떠 찍은 사진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뿌렸는데 미지근하더라. 대체 여기 산이 어디 있는거냐고 묻대. 그럼 어떠니. 조금이라도 산의 몸통을 뿌리부터보겠다고 운동장으로 밭으로 길 끝으로 옮겨다니면서 마지막 저녁을 후지산으로 물들였는데.
정말 신기루처럼 해가 내려가자마자 따라 쏟아진 구름이 후지산을 가렸어. 순식간에 사라진 우리의 “있다고 믿었던” 후지산이었지. 돌아오는 길, 축제처럼 스시도 먹고 그 힘으로 비닐봉지 달랑거리며 먼 길 깔깔 걸어왔잖아. 입밖으론 안냈지만 우리 그 날 들뜬 기분은 그간 믿음과 노력이 헛된 게 아니구나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깟 후지산이 뭐라고. 나도 후지산을 기다리고 또 볼 때는 별 생각이 안들었거든? 그런데 돌이켜보니 “있다고 믿으면 후지산”은 꽤 힘이 있는 구호였던 것 같아. 내게도 네게도 신기루 후지산같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금이라 더 그랬을까. 믿다보니 진짜 믿고 싶어지고 믿음이 생기니까 후지산 없는 후지산 마을은 하나도 초라하지 않더라. 보지 않고도 좋았고, 봐서 신기루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지난 사흘이 나는 오래 남을 것 같아.
네가 가고 없는 아침에 희미한 의미를 어디서 끌어다가 부여하고 있으려니 뭔가 울컥하는데. 마무리는 원래 청승을 덧대야 깊어지지 않겠니. 지금 쯤 너는 새벽잠을 쫓으면서 도시로 상경하고 있을테지. 나는 사실 내가 해야할 일들을 최대한 미뤄보려고 비행기를 가장 밤으로 예약했어. 발은 오래 굴렀는데 미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힘이 좀 빠지는 법이잖아. 그렇지만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나만의 후지산 마을로. 짧게라도 후지산을 보고 가 다행이야. 기운이 빠질 때 안개를 뚫고 드러냈던 후지산을 꺼내들면서 아, 있다고 믿으면 언젠간 후지산, 내게 주문을 외어야지. 먼저 조심히 돌아가렴. 가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