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나는 살아가야겠지. 아직은 그녀의 흔적이 있지만(1)
창수가 차를 세웠다.
“여기가 아빠 건물이야. 5층이고, 아빠가 내가 하면 월세 500 안 받는 다고 하니까. 웬만하면 여기서 하자.
근데 여기 주인은 가게 빼란 소리 아직 못 들었어. 재계약하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보수공사 관련 때문에 온 거라고 둘러댔으니까 그리 알고 입 조심 해.”
“그래.”
나는 창수를 따라 학원에 들어갔다. 창수는 원장에게 보수 공사가 어쩌고 하면서 구라를 까고 있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시설이나 구조등을 눈에 익히려고 눈알을 굴렸다. 인테리어를 한 지 얼마 안 됐는지 깨끗했다. 생각보다 넓었다. 빈 강의실을 둘러보며, 강의실마다 학생들이 꽉꽉 채워 앉아 있는 상상을 했다. 1인당 한 달에 50만 원으로 계산을 한다면, 곱하기 100? 200? 그러면 월 수익이 5천도 가능했다. 월세도 없으니 돈을 정말 쓸어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노트에 5천이라고 적고, 창수에게 눈짓을 했다. 창수는 얼른 원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어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와중에 창수가 성급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안 하고 눈치를 줬다. 학원 원장이 저쪽에서 의심하는 눈초리로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에 올라타서야 말을 했다.
“여기 좋다. 나 이 건물 알아. 여기 건물이면 무조건 땡큐지. 돈 쓸어 담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저 원장이 쉽게 나갈까? 그게 쫌 걸려서 말이지.”
“그래? 그럼 여기 들어가는 걸로 하자. 아빠한테 전화할게.”
창수가 아버지한테 바로 전화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숨도 조용히 쉬었다.
“아버지. 나예요. 지금 현욱이랑 말씀하신 자리 보고 왔어요. 그럼요. 안 들켰어요. 아... 진짜 날 뭘로 보고, 정말 원장이 눈치 못 챘어요. 걱정 마세요. 현욱이도 있었으니까 좀 믿으세요. 에이. 아무튼 우리 여기 들어갈 거니까. 어차피 원장 내 쫒을 거니까. 그 사람도 금방 알게 될 건데 뭘.
네, 우리 들어가고 싶어요. 현욱이도 대박 자리래요. 너무 좋대. 응, 네. 응. 그럼 계획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할게요. 그럼요. 현욱이는 언제든 시간 되지.
오늘 저녁이요? 좋아요. 네. 그럼 이따 병원 앞 일식집으로 갈게요.”
창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입은 옷을 훑어보았다. 면바지에 셔츠, 반코트 차림이었다. 청바지를 안 입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수가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냐? 밥이나 먹을까?”
“밥? 지금 3시인데. 배고파?”
“난 좀 전에 깨서 밥 안 먹고 나왔거든. 존나 배고파. 요 앞에 중국집 가자. 너도 그냥 먹어. 매일 혼자 편의점 음식만 먹느라 배고플 거 아냐.”
“어... 그래. 가자.”
나는 창수 말이 틀린 것이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지난 식당은 한가했다. 창수는 자리에 앉으면서 메뉴판도 보지 않고, 점심 코스 2인분을 주문했다. 나는 뜬금없는 코스 요리에 조금 놀랐지만, 거들먹 거리는 창수를 보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생 때는 나보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는 낄낄이족 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약사 부인에, 재벌 아버지 덕에 자기가 금수저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는지 더욱 허세와 자랑끼가 늘어 좀 불편했다.
“그래서 아버님은 언제 만나기로 했어?”
“응, 8시에 병원 앞으로 오래.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참. 지금 너 핸드폰으로 나한테 보내주었던 서류 아버지에게 이메일로 보내드려. 아빠 이메일 찍어 줄게.
아빠가 너 한 번 보고 결정하신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 결정은 한 거 같아. 내가 포토 그만두고, 그래도 돈 될 거 같은 거 한다니까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지은이를 엄청 이뻐하시거든. 지은이가 애교 부리면서 설명하니까 고개를 막 끄덕이시던데.
근데 그거 있잖아. 너만 알아둬. 난 이걸로 돈 벌어서 다시 사진 할 거야. 하하하. 내가 사진 없이 어떻게 사냐?”
“그래, 내가 너 돈 벌어서 사진 다시 시작하게 해줄게. 기다려봐. 근데 그건 그렇고, 밥 먹고 나면 시간이 좀 남네. 우리 사전 조사 차원에서 프랜차이즈 가맹 상담받으러 가볼까?
혹시 몰라서, 오늘 두 군데에 방문 상담 예약은 해뒀거든.”
“내가 뭣하러 가. 난 봐도 뭐가 뭔지 모르는데. 너 혼자 갔다가 아빠 병원으로 와. 나는 동네 부동산에 스튜디오랑 여기 학원 자리 담보로 대출이 얼마가 될지나 알아볼게.”
창수가 핸드폰으로 만화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창수를 훑어보았다. 아디다스의 빨간 삼선 츄리닝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다. 아무리 부자래도 츄리닝 차림의 동료를 데리고 미팅을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밥 먹고 헤어졌다가 7시 40분에 병원 앞에서 만나자. 중간에 전화할게.”
음식이 나왔다.
“그래, 일단 먹고 말하자, 많이 먹어.”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밥을 후다닥 먹고, 후식으로 차를 마실 때였다.
“근데, 너 괜찮냐?”
창수가 대뜸 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질문을 했다.
“뭐가?”
“민영이랑 헤어졌다면서.”
“지은이가 말했어?”
“응, 민영이가 진짜로 헤어졌다고 하는데,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더래. 평소에 신세 한탄하는 거랑은 다른 거 같다고. 진짜 헤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 진짜 헤어진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창수가 친구인지, 동업자인지, 상사인지 알 수 없기에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얼마 전부터 민영이가 결혼을 좀 보챘어. 나는 지금은 아니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민영이는 내가 결혼을 주저한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결국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일단 놓아줬어.”
“민영이가 쌍년이구나!”
창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야! 말조심해. 민영이는 잘 못 없어. 29살인데, 조급 할 만도 해. 그냥 여기까지인 거야. 다들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흥! 좋아하면 기다릴 줄 도 알아야지. 근데.. 사실 난 너도 이해는 잘 안 간다. 좋으면 결혼하는 건데, 왜 미루냐? 뭐 그것보다 결혼을 조를 정도로 좋다고 하면서 못 기다리는 민영이가 더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민영이는 그냥 결혼하고 싶은 노처녀고, 너는 뭐 결혼은 싫은 자유인이냐? 둘 다 너무 잘나서 나는 잘 이해가 안가네.”
“무슨 민영이가 노처녀냐? 요즘엔 33살은 돼야 노처녀 아니야?”
“순진하게 말하기는, 여자는 27살 넘으면 다 늙은 여우지. 이제 몇 달 뒤면 서른인데 노처녀지. 뭐 처녀는 아니겠지만 흐흐흐.
암튼 그래도 난 니 편이니까 민영이 욕해줄게. 그년은 너 버리고 엄청 후회할 거다. 나중에 병신이랑 결혼하고 후회할 거야.”
“야! 너야말로 서른 넘은 애아빠가 말을 뭘 그렇게 하냐? 게다가 너도 민영이 알면서 뭐 그런 악담을 해. 그러지 마. 나 화나.
우리 나쁘게 헤어진 거 아니야. 그냥 타이밍이 안 맞아서 그렇게 된 거야. 너네도 결혼하는데 8년 걸렸잖아. 뭐든 시간과 타이밍이 필요한 거뿐이야.”
“나야, 결혼하고 싶은데 집에서 하도 자꾸 딴지를 걸어서 시간이 걸린 거고. 뭐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좀 한눈 한 번씩을 팔았지만 그래도 지조는 지키고 결혼은 추진했었어. 타이밍이랑은 안 맞지.”
너는 결국 집안의 돈이 필요했던 거잖아 라고 소리칠 뻔했지만, 참았다.
“그래, 너네는 사랑했었고, 나는 그게 아니었나 봐. 첫사랑 다시 만나서 그냥 그게 좋았었나 보지 뭐. 사랑은 아니었나 봐.”
“그래 그거 좋다. 잠깐 옛날 추억 놀이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다시 만난 기간은 얼마 안 되잖아. 1년 좀 넘었나? 암튼 별거 아니니까 잊어버려. 곧 좋은 여자 만날 거야. 내가 소개팅 많이 해줄게.”
“됐어. 돈 벌어야지. 너 부자 되기 싫어? 내가 일해야 너가 돈 버는 거 아냐.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딨냐?”
“아.. 그런가? 그럼 일단 돈 벌고 소개시켜 줄게.”
“그래. 일어나자.”
창수는 나를 전철역에 내려줬다.
나는 전철을 타고 미팅 장소를 향했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논술 관련 정보를 뒤적이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다. 가지고 있던 주식이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주식 사이트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전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3천만 원으로 주식을 샀었다. 원래 학원 창업에 쓸 돈이었지만, 창수가 전 금액을 투자한다고 해서 그냥 주식에 쓸어 넣어 버린 것이다. 월세 보증금 할 바에야 100원이라도 벌 수 있는 주식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주식을 사놓고는, 매일 심장이 두근거려서 힘들었다. 주식은 매일 오르락내리락했고, 그때마다 내 심장도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주식 사이트에 접속해서 계산을 해보니, 지금 주식을 팔면 100만 원의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물론 세금이랑 수수료 떼면 더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100만 원이었다.
2천만 원으로 한 달도 안돼서 100만 원을 번 것이다.
대박이었다!
순간 나는 월드컵의 결승골을 넣은 박지성처럼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이 기쁜 마음을 티 내지 않게 꾹 참으며 나는 주식 환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2천100만 원으로 투자할 주식 종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미팅을 끝내고, 시간에 맞춰 창수 아버지를 만날 장소로 갔다. 창수는 츄리닝 차림 그대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아무리 니 아버님이지만, 고급 식당이고,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 츄리닝은 좀 아니지 않냐?”
“뭐 어때. 그래 봤자 식당이고, 아빠랑 밥 먹는 건데. 너야말로 긴장하지 마. 짜식. 그냥 친구 아빠랑 밥 먹는 거 가지고 유난 떨기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창수는 담배꽁초를 던지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약속 시간 정각에 아버님이 들어오셨다. 창수는 앉은 채로 ‘오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앉아. 편하게 있어.”
아버님은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넥타이도 풀러 옷걸이에 걸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현욱은 어정쩡하게 아버지가 앉으실 때까지 서 있었다.
아버님이 자리에 앉으시고, 내가 앉고, 그렇게 겨우 셋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물을 한잔 쭉 마셨다. 그리고 바로 일 이야기를 하셨다.
“이메일로 대강 읽었다. 초중고 논술 학원하고 싶다고. 그래. 좋아 보이더라. 그런데 나는 프랜차이즈는 싫다. 그건 남자답지 못해. 사업을 하려면 내 거를 해야지, 가맹점은 다 호구일 뿐이야. 프랜차이즈 없이 시작할 수 있다면 내 허락 하마. 할 수 있냐?”
“네,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프랜차이즈는 안 하려고 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나는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안 댄다는 생각에 바로 대답했다.
“그래, 좋아, 그럼 시작해. 내일 원장한테 권리금 줄 테니 나가라고 말할 거다. 법률팀이 조정할 테니 걱정 말고, 가게 빠지는 날 짜 정해지면 알려줄 테니까. 준비 시작해.”
시작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긴장이 확 풀어졌다. 나도 모르게 ‘휴......’ 하고 숨을 뱉었다.
아버지가 물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고 물을 마셨고, 창수는 자기랑 상관없는 이야기인 양 스끼다시를 먹고 있었다.
“현욱이 너가, 오랫동안 애들 가르치면서 성실하게 살아온 것 잘 알고 있다. 사실 창수 옆에 너 같은 멀쩡한 친구가 있다는 것이 가끔은 신기해. 저 녀석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으니까 말이야.
지금 나는 현욱이 너에게 투자를 하는 거야.
어떤 사람은 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1억은 껌 값이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1억은, 그리고 매달 500만 원의 월세를 일단 포기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난 내 아들을 위해서, 너란 사람을 믿고 투자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기회가 너에겐 엄청나게 큰 기회일 것이다. 당장 너에게 돈을 빌려주고, 기회를 줄 은행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일단은 손해만 나지 않게, 은행 이자 정도의 수익률만 나와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그래도 내가 목표하는 최종을 말하자면, 사실 나는 학원 이사장을 만들고 싶어. 나중에 잘 돼서 학교 하나 세우면 좋을 거 같거든. 학원이 학교가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경험 쌓으면서 알아보면, 초등학교나 특수 고등학교 같은 거, 뭐든지 암튼 학교 하나 세워서 이사장 할 수 있지 않겠나.
창수 저거, 저거는 어차피 평생 한량이 될 건데, 명함 하나 그럴듯하게 해줘야 할 거 아냐.
현욱이 니가 도와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무튼 부담 갖지 말고, 니가 선생으로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나중에 학교까지 차릴 수 있도록 꿈을 잡아봐. 너에게도 괜찮을 테니까.”
그때 창수가 트림을 끅 했다. 아버지는 쩝 소리를 내며 찡그리며, 창수를 쳐다보았다.
“암튼, 나는 창수 저거가 사진 나부랭이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흥.”
“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네.”
나는 그제야 마른입에 물을 축일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메인 회와 술을 가져왔다.
종업원이 음식을 내려놓고 나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잠깐만 하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5만 원을 꺼내 ‘오늘 잘 부탁하네.’ 하면서 팁을 줬다. 종업원이 익숙한 듯 고맙습니다. 하며 공손히 팁을 받고 나갔다.
나는 태어나서 팁을 주는 것을 처음 봐서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창수나 아버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자 한잔 하자. 창수는 뭐 그냥 막 마시는 놈이고, 현욱이 너는 술 좋아하냐?”
“전 술을 잘 못합니다. 한 잔만 받기만 하겠습니다.”
“그래? 아주 맘에 드네, 술 잘 마시고, 좋아하는 놈 치고 멀쩡한 놈이 없어. 그리고 술 못 마시면 한 잔도 받지 마. 술 아까워. 이거 비싸고 맛있는 술이거든, 술맛 모르는 놈에게는 아깝다. 그리고 창수 너도 이거 마실 생각하지 마. 너는 따로 시킨 소주나 마셔. 니 놈에게 이 술은 과분해.”
“아. 아빠. 나도 한잔만 줘요. 맛만 볼게요. 거 한 잔은 줄 수 있잖아요.”
“됐어. 인마. 넌 맛도 모르면서, 이거 소주나 마셔.”
“칫. 치사하기는.”
둘이 투닥거리며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에 순간 내 아빠가 생각났다. 그리고 저들이 부러웠다.
음식을 먹으며, 창수 애기 사진을 보며, 애기 이야기를 한 참 경청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후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대뜸 물었다.
“근데 현욱이는 결혼 안 하냐?”
“아빠! 그건 물어보지 마세요. 이 새끼 며칠 전에 헤어졌어요.”
“그래? 잘 됐네. 내가 좋은 집 아이 중신 좀 서주마. 내 새끼는 내 맘대로 장가 못 들였는데, 너는 내가 좋은 집 아이 소개 시켜주마.”
나는 당황했다.
“아닙니다. 일단은 일을 해야 하니까요. 아직 어리구요. 그런 건 천천히 하겠습니다.”
“이놈아 일은 일이고 연애는 연애야. 일한다고 밥 안 먹나? 아무리 바빠도 연애할 시간은 있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리고 사업하는 남자는 아내가 필요해. 난 독신남은 안 믿어. 남자는 결혼하고 애가 생겨야 정신을 차리는 거라고. 그러니 빨리 결혼해. 알았어? 조만간 내가 나오라면 바로 나와서 잘 해봐. 알았지?”
“... 네...”
나는 그냥 웃으면서 네네 대답을 했다.
창수와 헤어져 고시원으로 들어온 시간은 11시였다.
사람들에게 방해 안되게 조심히 문을 닫고, 옷을 벗었다. 나는 씻을 힘도 없어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면, 오픈 전에 교재를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오픈 두 달 전부터는 교재 개발에 들어가야 할 것이고, 강사들에게 월급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기간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강사들은 강의가 없으면 집중을 하지 못하고 헛짓거리나 하면서 시간만 때우기 일쑤이기 때문에 뭔가 자극제가 필요했다. 사람을 혹 하는 언변이 있는 것도 아니란 생각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나는 일어나서 옷을 다시 입고 밖으로 나가 길을 걸었다. 고시원을 끼고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마다 고시원, 원룸 등의 간판이 달려 있었고, 다닥다닥 붙은 빨간 벽돌의 빌라 건물의 창가에는 뜨문뜨문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골목 안 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불이 켜진 집을 볼 때마다 저 집은 몇 평일까. 보증금은, 월세는 얼마일까 생각했다.
가끔 보이는 부동산 앞에는 걸음을 멈추고 창가에 붙은 종이를 천천히 들여다봤다.
전세 2천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보증금 2천에 월 40 정도는 돼야 바로 집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고시원에서 나가고 싶었다. 옆방 사람의 땀 흘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하지만 당장 돈이 없고, 아까웠다. 보증금 2천을 다 넣고, 관리비니 뭐니 해서 월 50 가까이를 내야 하는데, 예전처럼 따박따박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은 돈이 아까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도 굴리고, 월 70만 원씩 방세를 내도 아깝지 않았다. 돈을 모아봤자. 티끌모아 티끌인데 싶었고, 또 내가 과외 하나 더 하면, 강의 하나 더 하면 된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너무나 돈이 아까웠다.
100원이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내일을 약속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따뜻한 캔커피를 샀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이 진동을 하며, 불 빛을 깜빡였다. 화면에는 <300일 기념일>이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기념일 알람이었다.
나는 핸드폰 스케줄러에 들어가 모든 기념일을 삭제했다.
하얀 피부에, 눈도 코도 귀도 모두 알맞은 자리에 정답처럼 앉아 있던 단정하고 예쁘장한 민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뻤다. 평생 그렇게 예쁜 얼굴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당연히 달려들어 그 자식을 때려눕히려고 했다. 그러나 진짜로 발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저 새끼를 때리고 민영이 손을 잡으면, 그다음엔 내가 뭘 할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민영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어쩔 건데.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어쨌든 민영이는 피하지도 않고,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 남자 품에 안기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단 사라졌다.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어떤 건물 뒤에 그림자에 쪼그리고 잠시 앉아 있었다. 어지럽고, 메스껍고, 머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영이에게 전화가 한 번 왔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혹 내가 본 게 민영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했다. 카톡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고,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내가 본 것이 민영이라는 것이 확실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여러 번이나 그녀가 힘들어하고, 헤어지자고 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외면하며, 그녀를 투정 부리는 어린애 취급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 자존심도 지키면서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1년을 약속했으니, 1년은 기다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생각보다 더 불안했고, 조급했고, 사랑이 식어갔었나 보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녀도 날 사랑했었는데.
아...... 정말 날 사랑한다면서, 결혼하자면서, 불안하다는 이유로 조급하다는 이유로 날 떠나다니.
“하아...” 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술을 마실까 생각했지만 없는 돈에 맛없는 술을 굳이 먹으며 돈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머리를 흔들었다. 돈도 시간도 없었다.
나는 다 식은 캔커피를 마시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난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낮에 빈소에 갔다가 저녁에는 강의를 해야 하는 강사였다. 강의하는 기계 말이다. 학생이 죽어도, 부모님이 죽어도, 내 자식이 죽어도 강의를 하는 그 정도의 강사다 되어야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강의하는 기계가 되어 돈을 벌기로 했으니까.
이혼한 것도 아닌데, 이별 따위로 그것도 나 싫다고 떠난 사람 때문에 하루를 몸에도 안 좋은 술을 마시며, 돈을 쓸 수 없었다.
지금의 난 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한 것이다.
나는 가난뱅이 일 뿐 아니라, 이기적인 병신이었다.
내 여자가 바람피우게 만든 병신.
내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헤어져 주던지, 아니면 정식으로 결혼이나 약혼으로 붙잡던지 했으면, 그녀는 일부러 보란 듯이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니까.
내가 먼저 꺼져주었어야 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랬어야 했다. 날 위해서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사랑한다면 그때 놓아주었어야 했다.
“병신, 병신.”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병신 새끼. 머저리. 등신. 씨발 개새끼.”
나는 내가 아는 욕들을 나를 향해 웅얼거렸다. 조금 속이 후련했다.
어둠 속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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