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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Nov 09. 2016

[소설] 65. 끝이 없는 이야기

Chapter 5. 끝이 없는 이야기 – 현욱 (2)

민영이와 전화하는 꿈을 꾼 것이었다. 피곤해서 전화를 하려다가 잠이 들어 버려서, 꿈속에서 민영이와 통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허허 웃었다. 참 내. 사춘기 몽정도 아니고, 여자 친구 꿈을 꾸다니, 다시 만난 민영이에게 정말 내가 마음을 다 주었구나 싶었다. 하긴, 한 번도 민영이에게 마음을 안 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니, 12시였다. 1시에 회의가 있단 생각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씻고, 옷을 입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딸깍


바로 민영이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민영아!’하고 불렀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멘트였다. 딱딱한 목소리에 놀랐다. 시간을 보니 12시 40분이었다. 점심시간일 텐데 아마 직원들하고 함께 있어서 전화를 안 받은 것 같았다.


회사 안에서 사적인 통화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던 민영이었다. 나는 민영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예쁜아, 어제는 너무 바빠서 전화 못했어. 그런데 얼마나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꿈에서 노랑 전화 통화를 했지 뭐야.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화한 거야. 이따 또 전화할게 꼭 받아.]


학원에 도착하니, 1시 10분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내가 일등이란 생각에 체면이 안 깎인 것은 좋은데, 역시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서운함이 더 컸다.


나는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어 환기를 시켰다. 화분에 물을 주려고 했다가 멈췄다. 너무 물을 많이 주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표를 하나 출력해서 화분 뒤에 테이프로 붙였다. 화분에 물 주는 표였다. 그리고 오늘 날짜에 체크를 했다.


그때 이선생이 들어왔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오는 이선생에게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앞으로 화분에 물 주는 것을 부탁했다. 이선생은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지각한 것에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화분에 물 주는 일을 하겠다고 해주니 그걸로 다행이다 싶었다.


2시가 되어서야, 이선생, 박 선생. 신 선생이 모두 모였다. 1시 회의가 2시에 시작된 것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자, 모두들 잘 지냈지요? 어제 초등부 3명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선생님 그럼 그 학생들끼리 한 클래스가 되는 건가요?”


“네, 3명이 초4로 친구들이래요. 한 클래스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거고, 시간은 수요일 3시로 해달라고 먼저 말하더라고요. 음...... 그리고 여자애들이라 박 선생님이 수업해주면 좋겠다고......”


이선생이 말끝을 흐렸다. 누가 수업을 하느냐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기에 이선생이 눈치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초등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상관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박 선생은 초중, 나는 중고로 나눠 맡기로 합의된 사항이었다. 나는 박 선생을 쳐다봤다. 박 선생이 말했다.


“난 좋아요. 시간도 좋아요. 내가 하겠다고 하고, 다음 주 수요일 첫 수업으로 스타트 하지요. 내가 학부모님들께 전화 돌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오늘 저녁 8시에 학부모 설명회는 몇 명이나 올 거 같아요?”


“문과 논술은 8명이고요. 수리 논술 설명회는 3명입니다. 수리 논술은 다 신입 회원 분들이 시구요. 논술 학부모님들도 기존 분들이 데려오는 거라 다들 준비는 하고 오실 거예요. 문자 다 돌렸고, 설명회 세팅은 완료되었습니다.”


이선생이 대답했다.


“어제 설명회 3명이나 등록하고 분위기 좋았지요? 그래도 부족했던 부분 있는지 말해줄래요?”


“너무 길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샘이었다. 나는 당혹스러워서 박샘에게 물었다.


“길다고요? 내가 너무 길게 말했나요?”


“내용적으로는 좋았는데요.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니까 학부모들이 지루해하더라고요. 게다가 오늘은 중고등부 중심이니까 대부분 대충 다 알고 오는 분들이거든요. 대입, 특목 입시, 면접. 딱 요거에 중점을 두고, 15분 안에 끊어주어야 할 것 같아요. 게다가 어제는 4시에 시작이니 괜찮았는데, 오늘은 8시 시작이라. 시간도 늦어서 타이트 하구요.”


“아...... 그렇군요. 알았어요. 오늘은 좀 더 짧게 전달할게요.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박샘 말이 맞아도, 다른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면박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안 좋았다. 하지만 이런 지적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꼰대 같고, 갑질 같아서 나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아... 그런데 원장님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너무 말이 직설적으로 나와서...... 원장님 말이 길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대도 그렇고, 어제보다 오늘은 학부모들이 좀 더 많이 알고 오는 분들이니까 그냥 짧게 이야기해도 좋겠다는 거예요. 어제도 좋았어요. 그러니까 등록도 하고 가지요.”


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박샘이 냉큼 사과를 했다. 그런데 이런 사과가 더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나는 넓은 마음으로 반응해야 했다. 게다가 동. 업. 자였다.


“괜찮아요. 게다가 박 선생님은 같은 원장인데 더 가감 없이 지적질해줘야지요. 그리고 나 이런 지적해주는 거 진짜 좋아해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지요. 하하. 참 신선생님 오늘 수리논술 설명회 준비는 잘 하셨나요?”


“네? 하긴 했는데...... 전 설명회가 처음이라 너무 떨려요. 어쩌죠?”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요. 박 선생님이랑 연습 좀 하시면 될 거예요. 이과니까 말 잘 못해도 괜찮아요. 질문만 잘 받아보세요. 특히 지난 입시 분석은 다 하신 거죠?”


“네, 그런 건 다 했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중등은 수리 논술은 이르잖아요. 초중등으로 서술형 수학 수업으로 한 번 어필해보면 어떨까요? 논술 학원이라 좀 콘셉트에 벗어날까요?”


“할 수 있으면 하세요. 어차피 강의실 하나는 신선생님을 위해 거의 비워둔 거니까요. 수업 개설되면, 선생님도 비율대로 수익 가져가고 좋지요. 지금은 논술, 국어, 수학이지만, 곧 영어도 개설할 거예요. 작문, 토론 위주의 영어로 생각하고 있어요. 독특한 종합 학원이 될 겁니다. 단. 일반적인 수학 수업이 아니라 철저히 서술형 중심의 수학이어야 해요. 그것만 약속하면 돼요.”


신 선생은 수줍은 듯 웃었다. 학생이 무조건 많아야 이익이 나는 현재로서는 되던 안되던 욕심내는 신 선생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 참. 생각해 봤는데. 어제 등록하신 학부모들 다른 학부모들이 소개해서 데리고 온 거 맞지요?”


“네, 소개받고 오신 분들이에요.”


“그럼 소개해준 학부모들에게 뭐라도 선물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물이요?”


박 선생. 이선생. 신 선생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초등부는 친구 데려오면 상품권 주고 하는 학원이 있다고는 들었어요. 태권도 학원 같은데요. 그런데 이런 학원은...... 글쎄요. 그냥 감사 인사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어설프게 주었다가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기면 어떡해요?”


박 선생의 말에 다른 선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민영이가 해준 말인데 싶어서 나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봐요. 꼭 돈이 아니래도 뭐라도 감사 표시를 해야 앞으로도 소개를 해줄 테니까요.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선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회의가 끝났다.


나는 바로 수업에 들어갔고, 다른 선생님들은 커피 한잔 하러 밖으로 나갔다. 박 선생이 보기와는 다르게 선생님들 잘 모아주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3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나는 건물 1층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하나 샀다.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핸드폰을 꺼냈다.


띠리링

딸깍


“민...”


민영이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녹음 멘트가 나왔다. 시간은 저녁 7시 30분, 퇴근 준비하느라 바쁠 시간이었다.


일반 회사를 다녀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 야근을 할 테니 아직 사무실일 것 같았다. 나는 민영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예쁜아, 야근해? 저녁 맛나게 챙겨 먹어. 나는 컵라면 하나 먹고 또 일하러 간다. 직원들이랑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안다. 이래서 월급쟁이가 좋은 건데 싶고. 너랑 정말 이야기하고 싶다. 이따 전화할게. 시간 되면 먼저 전화 줘도 돼.]


나는 서둘러 라면을 먹고, 학원으로 올라가 이를 닦고, 설명회 준비를 시작했다.


박샘 말대로 간단하게 설명을 끝내기는 했는데, 짧은 설명이 역시 부족했는지 중3, 고2 남매를 둔 학부모가 한 시간을 넘게 붙잡고는 질문과 상담을 하는 바람에 머리가 아팠다. 가만히 보아하니 학생 실력이 부족한데, 학부모들의 목표가 높아서 남들 따라 학원이란 학원은 다 다니는 스타일 같았다. 질문에 대답을 할수록, 저런 학생은 논술만으로는 해결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현재는 수능과 내신 등을 병행 준비해야 하고, 기초실력 쌓기를 위해 사실 전 과목 코칭 과외 선생을 하나 붙이는 게 더 필요한 상황이고, 논술은 지금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논술이 이해력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논술을 함으로써 다른 과목 점수도 올리고, 논술로 대학 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작전을 짜는 게 좋다. 일단 시작해서 차곡차곡 준비하자’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논술만으로는 힘들다. 다른 학원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내 실력을 부인하고, 논술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학부모가 원하는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자 박샘이 수업 시작 시간이 되었다는 거짓말로 나를 빼내 주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샘이 능숙하게 수강 등록으로 주제를 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원장실에 숨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학생이 따라만 온다면, 이론적으로 논술을 바탕으로 내신 성적도 올라가는 것이 맞고, 또 지난 10년간 실제로 그렇게 성적을 올린 학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내가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학생은 10년 동안 세 명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말로 나는 열심히 진심을 교육할 것이다. 학생들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민영이 생각이 났다. 이런 내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다. 냉정한 민영이가 ‘다들 그렇게 학원 운영하는 거야. 그나마 오빠는 정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오빠 말대로 해서 서울대 간 학생들도 있잖아.’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띠리링 전화 연결음과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박샘이 들어왔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박샘이 웃으며, 3명이 6개월을 결제하고 갔다고 했다. 수리 논술도 1명 등록했다고 말했다.


나는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며, 활짝 웃었다.


뒤따라 이선생과 신 선생이 시간표를 들고 들어왔다. 시간표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들이 말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직원들을 봤다. 평소 여성을 존중하는 나이지만, 지금은 왠지 세 명의 직원들이 짹짹 거리는 암탉같이 보였다. 내가 정말 피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너무 늦고, 피곤하니 시간표 관련은 내일 이야기합시다. 일단 다들 퇴근하세요.”


퇴근하라는 말에 신 선생과 이선생은 빙긋 웃으며 바로 가방을 가지러 나갔다. 박샘은 신나서 퇴근하는 둘을 씁쓸하게 보더니, 미적거리면서 내 방에 머물러 있었다.


“왜요? 할 말 있어요?”


“그냥...... 우리 맥주 한 잔 할까요?”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피곤했고, 민영이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박 선생과의 교류도 중요했다.


나는 가볍게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만 마시고 일어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박샘이 가방을 챙기러 가는 짬에 서둘러 민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멘트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박 선생과 함께 학원 문을 닫았다. 1층 편의점에서 맥주 2캔과 새우깡을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박 선생은 이선생과 신 선생이 너무 초짜인 것 같다면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돈을 투자하지 않고 월급만 바라는 사람에게는 기대를 할 수 없다면서 차라리 인센티브를 없애고 철저한 월급제로 가고, 선생들을 더 많이 일 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쥐고 켰다 껐다 하면서 ‘아직 월급을 안정적으로 줄 수 있을지 없을지가 확실하지 않으니까 좀 두고 봐야 한다. 우리도 일을 시키는 방식이 좀 서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샘이 홍보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 앞 현수막과 연습장 전단지 돌리는 광고도 좀 하고, 이선생 같은 경우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인터넷 블로그 광고나 지역 카페 광고 같은 부분을 좀 알아보는 것이 어떤지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예전에 고등학교 방과 후 강의 나갔을 때 이미지가 좋았다면서 동네 고등학교 방과 후 강사 지원을 해보는 것이 어떤지 물어봤다.


“최쌤, 아니 원장님. 일단 우리 방과 후 강사 지원을 빨리 합시다. 지금은 모집 기간은 아닌데, 방법이랄까 그런 건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딴짓하던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끄고 자세를 바로 하며 되 물었다.


“뭐요?”


“방과 후 강사요. 우리 둘 다 방과 후 강의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고등부 방과 후는 들어가기 어렵다고는 하는데, 하면 괜찮을 거 같아서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이상해요.”


“사실......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여자? 여자 생겼어요?”


“네, 새로 만난 건 아니고요. 예전에 만나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됐어요.”


“어머, 혹시 그 첫사랑?”


“네, 하하하.”


“어머어머 웬일이야. 다시 만나요?”


“그게, 지난 일요일에 어쩌다가 만났어요. 좋게 이야기하고 헤어졌고요. 그런데... 오늘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요.”


“지금이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자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회사 다니면 피곤한데, 잘 시간이지요. 아직 확실하게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니면, 너무 귀찮게는 하지 마세요. 천천히, 편안하게 스며드는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그러게요.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혹시 벌써 들이댔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나도 모르게 보자마자 다시 시작하자고 해버려서....... 그럼 안 되나요? 그래도 십 년의 인연인데.  민영이는 날 아니까 괜찮을 거예요.”


“에이. 최쌤. 다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요. 하다못해 머리 잘 못 자른 미장원에 다시 가는 것도 엄청 고민되는 데, 한 번 이별을 택한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진짜 진지하고 어려운 고민이에요. 그걸 막 보자마자 달려들면 어떡해요.”


“그런가......”


“여자분 입장에서는 한 번 사귄 적 있다고 쉽게 보나? 지금 그냥 외로워서 찔러보는 거 아닌가? 할 수도 있지요. 왜 동창회에서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그렇잖아요. 수년만에 만나서 감상에 젓어서 실수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다시 고백을 할 때는 처음 만나서 대시할 때보다 더 조심히, 더 진지하게, 더 진심으로 다가가야 마음을 겨우 열까 말까예요.”


“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박샘은 그런 나를 보고 당황스러운지 다시 괜찮을 거다, 자기가 뭘 아냐. 한 남자만 만나와서 연애를 모른다. 그냥 나 따위가 한 말 신경 쓰지 말아라. 그분은 최샘을 더 잘 알 거고, 지금은 그냥 피곤해서 전화를 안 받는 것뿐일 거다.라는 위로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박샘도 그런 나를 보며 허겁지겁 맥주를 원샷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샘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나도 곧 택시를 잡아 탔다.


마지막에 원샷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핑 돌면서 취기가 올라왔다. 그래도 나는 택시에서 민영이이게 전화를 했다.


띠리링.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받는 소리가 들렸다.


“민영아!”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또 녹음된 성우 멘트였다. 하루 종일 민영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다 똑같은 멘트였다.


나는 혹시 민영이가 수신 거부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오르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내일 술이 깨면 다시 전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 올렸다.


징~징~징~


전화 진동에 눈을 떴다. 손에 든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거실 한가운데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다.


핸드폰을 보니 아침 10시, 엄마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엄마?”


“엄마야. 잤어? 오늘 학원 개원이지? 잘 하라고 전화했어. 그런데 자고 있었어?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 오랜만이에요. 개원은 월요일에 벌써 했어요. 오늘이 3일째예요. 늦잠 잔 거 아니고, 학원이라 3시까지 나가면 돼요. 어제 늦게까지 상담하느라 피곤해서 자고 있었지. 암튼 고마워요.”


“아이고, 벌써 시작했구나. 미안하다. 엄마가 도와주기는커녕 날짜까지 모르고, 엄마가 너무 바쁘고, 가진 게 없어서 미안해...... 그래도 넌 잘 하니까 믿는다.”


나는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엄마, 나 피곤해서 더 잘게요.”


“어, 그래. 늦잠 자지 말고. 언제 한 번 내려와. 얼굴이라도 보자.”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그대로 누웠다. 잠을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곧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의 전화는 전혀 격려가 되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외로움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엄마의 인생도 쉽지는 않기에 원망스럽지는 않다. 돈 달라고 하는 아빠보다 낫다. 그래도 그냥 조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외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사방이 조용했고, 아무도 엿들을 걱정도 없었다. 시간도 바쁜 출근 시간이 지난 10시, 전화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민영이에게 전화를 했다.


띠리링.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를 끊었다.


확실했다. 민영이는 지금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날 스팸 번호 같은 걸로 등록해 놓은 것 같았다. 카카오톡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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