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매달린 이별 (1)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봤다. 민영이에게 전화를 했다.
“없는 번호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쥐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 붙은 사진 속에서 민영이가 웃고 있었다.
엠티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민영이에게 전화를 했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종종 그랬기 때문에 난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었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나는 조금 걱정스러워지며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수업을 들어야 했고, 조별 모임 스터디, 영어 스터디, 그리고 공모전 준비와 엠티로 빠진 과외 아르바이트 보충도 해야 했다. 그 사이 2~3일이 지났고, 민영이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밤 12시 버스 막차를 타고 겨우 집에 온 날이었다. 온몸이 젖은 휴지처럼 흐늘흐늘했다. 민영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녀가 토닥이며 ‘수고했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민영이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없는 번호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세 번 연거푸 전화를 하고 나서야 민영이가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일단 지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지은이는 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자기도 핸드폰 번호가 바뀐 것을 몰랐다며 기다리라고 다른 친구들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은이에게 들려온 대답은 민영이가 아예 핸드폰을 없앤 것 같다며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민영이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얘가 뭐하자는 거지? 이유 없이 잠수를 탄 민영이에게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계속 민영이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친친 감기 시작했다.
내가 엠티 갔다고 지금 이러는 건가? 내가 분명히 교수님 추천서도 필요하고, 또 동기들하고 관계도 좋게 유지시켜야 조별 과제 때 여러모로 편한 것도 있고 하니 간 것 뿐이다. 모두 다 장학금을 받기 위한 나름의 사회생활인데. 그렇게 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 민영이는 지금 어린애처럼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 안 한다고 이러는 건가? 솔직히 공무원 시험도 뒷받침해주는 부모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생활비도 없는데 어떻게 책을 사고, 학원을 다녀며 공부를 하느냐 말이다. 민영이야 부잣집 딸이니까 돈 걱정 안 하고 우아하게 공부에만 집중하면서 시험 준비하는 거지. 나 같은 고학생은 그럴 수 없단 말이다. 게다가 공무원 시험은 경쟁률도 엄청 높고, 무엇보다 정말 공무원이 된다고 해도 그 월급으로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남자인데, 정말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야망이 있는데.
민영이는 도대체 나를 나를 뭘로 생각하는 것인가? 민영이가 우리의 결혼을 위해 회계사가 된다고 말하는데, 나도 민영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왜 민영이는 그것을 못 알아주는 것일까. 나도 어떻게든 좋은데 취직하려고, 인맥, 학점, 토익 등 스펙 쌓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는 것 뿐인데 말이다.
민영이는 사실 나를 무시하긴 했다. 툭하면, 오빠 때문에, 가난한 오빠 때문에, 가진 것 없는 오빠 때문에 본인이 회계사 돼야 한다고 말하며, 나를 깎아내리곤 했다.
그런데, 그런 무시도 다 참고, 자존심도 버려가며 민영이를 사랑했다. 민영이도 그런 점 다 감수하며 날 사랑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왜???
내가 뭘 잘못 했는가. 만날 때마다 내가 하자는 것은 다 귀찮다고 하고, 아무거나 먹자고 하면서 막상 내가 고른 식당은 맛없다고 하면서, 모텔 가서 쉬자고 하면 날 짐승 보듯 하고, 또 그래서 모텔 안 가고 커피숍에만 있으면 답답하다고 하고, 그래서 공원 가자고 하면 다리 아프다고 하면서. 도대체 돈 없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거냔 말이다.
돈 없는 나를 배려해서 하기 싫은 회계사 되려고 한다고 말은 하면서, 왜! 왜!! 막상 얼굴 보고는 날 생각 안 해주는 건데!
도대체 내가 돈이 없는 것을 얼마나 더 말해야 했을까. 정말 돈이 없다고. 월세가 얼마고, 핸드폰비가 얼마고, 수도세가 얼마고, 차비가 얼마고, 책 한 권 살 돈 없어서 헌책만 사서 쓰는 것을 다 말했어야 하는가?
아니면 나도 내 미래가 두렵다고 기댈 부모도 없고, 조언해줄 멘토도 없고, 하고 싶은 직업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일단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고 구차하게 내 못난 모습을 다 보여주어야 했을까?
내 평생 유일하게 사랑하고, 기대고, 안을 수 있는 여자에게, 내가 어떻게 그러느냔 말이다.
연락도 되지 않는 민영이를 향해 나는 속으로 소리 질렀다가 하소연했다가 독백을 했다.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별통보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은 점차 민영이에 대한 치사한 배신감과 분노가 되었다.
우리의 지난 시간이 그녀에게는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는지.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지. 내 얼굴을 보고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조차 피하고 싶을 만큼 나와의 사랑이 그녀에겐 버러지 같았는지.
그녀가... 내가 알던 그녀가 맞는지. 민영이에 대한 실망감까지 내 가슴을 때렸다.
아...... 어쩌면 그녀가 변했을 지도 모른다.
수능 성적도 나보다 낮은 주제에 회계사만 붙으면 더 잘나지는 줄 알고, 벌써 자기가 대단한 전문직이 되기라도 한 듯 잘났다는 착각에 민영이가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니가 의사랑 선봤는데, 의사라도 사람이 별로라서 언니가 의사도 차버렸다는 말도 하고, 지은이가 창수랑 여행도 가고, 무슨 선물도 받았다는 말도 더 자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민영이도 회계사가 되어, 재산 많은 전문직 남자를 만날 생각에 나를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민영이는 그런 된장녀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정말 된장녀라면, 이미 진작에 나를 떠났어야 했다.
시간이 또 흐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민영이가 이별통보를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이는 내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민영이는 어쩌면 잠시 혼자 있고 싶을 수도 있다. 수험생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가. 나 역시 삼수를 하면서 오만가지 잡생각에 힘들었었는데, 나이 먹어서 공부하는 민영이는 정말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더 도와주었어야 했다.
천사 같은 민영이에게 너무 찌질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문제였다.
부잣집 딸이지만, 민영이는 고양이에게 밥 주는 날 보고 마음의 문을 열고, 가난한 남자친구를 위해 인생을 걸 줄 아는 여자였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하고 심플하게 인생을 설계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였다.
민영이는 변하지 않았다. 된장녀도 아니고, 우리의 사랑을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힘들고, 외롭고, 나에게 실망했을 뿐일 것이다.
내가 잘못하고, 내가 찌질하고. 내가 그 깊은 뜻을 몰랐을 뿐이다.
내가 다 잘못했구나......
민영이가 떠난 것을 깨닫게 된 나는,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별의별 생각에 빠져 허우적되며 하루를 보냈다.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어떻게든 민영이를 만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그녀의 집앞으로 갔다.
이른 새벽부터, 민영이네 아파트 정문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걸어나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차들만 계속 아파트에서 나올 뿐이었다. 몇 시간을 서성이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 그래도 민영이를 볼 수 없었다.
그 날 부터 나는 학교 가기 전 새벽과 일과를 마친 저녁이면 아파트 입구에서 민영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민영이를 만나면 뭐라고 말할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과를 할까. 아무렇지 않게 대할까. 무릎 끓고 빌까. 붙잡고 울어버릴까. 어떻게 해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며칠을 서성이며 고민한 끝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민영이는 날 사랑하니까 내 눈을 봐준다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눈만 마주친다면, 그녀는 그냥 나에게 와서 안길 것이다. 그래 구질구질하게 주절주절 말하지 말고, 그냥 민영이를 보자마자 확 품에 안으리라.
그렇게 거의 몇 주가 지나서야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어제였다.
어제 저녁, 나는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민영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민영이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되었을 때, 나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커다란 검은 차가 들어오더니 조수석에서는 민영이가, 운전석에서는 민영이 어미님이 내렸다.
민영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온 몸이 딱딱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영이 어머님이 민영이에게 다가가 가방을 뺏어 들고 앞장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민영이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엄마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민영이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민영이 어머님이 곁눈으로 슬쩍 나를 보며 스쳐갔다.
어머니가 지나가고, 그 뒤로 그녀가 나를 마주보며 다가왔다.
민영이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 역시 간절함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더 가까워졌다.
왠지 추웠다.
나는 덜덜 떨리는 것을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 민영이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조용히 내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엄마, 같이 가요.” 하며, 나를 지나갔다.
잠시 뒤, 순찰을 돌던 경비 아저씨가 나를 내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