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참을 수 없는 사랑과 기다리는 사랑 (4)
아기를 낳은 지 하루 지난 지은이의 얼굴은 좀 부어있었다. 머리카락을 밴드로 싹 올려,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을 다 내보여서인지 부은 얼굴이 더 똥그래보였다. 게다가 펑퍼짐한 산모용 원피스는 영 아름다움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지은이의 눈은 반짝반짝했다.
유리창 너머로 본 신생아는 빨간 어떤 물체 같았다. 민영이는 조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약간 신기할 뿐,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약간 호들갑을 떨며 애기가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치? 예쁘지? 몸무게도 딱 표준이라 낳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 근데 약간 황달기가 있대. 별거 아닌 거는 아는데, 그래도 걱정은 되네. 어쩔 수 없나 봐. 나 이러다 완전 예민하고 호들갑 떠는 유난 떠는 엄마 되면 안 될 텐데 말이야.”
“설마. 너는 안 그래. 창수 오빠면 몰라도.”
“맞아. 호호호. 오빠는 벌써 장난 아니야. 간호사가 애 떨어뜨릴까 봐 눈빛으로 쏘아보는데 내가 다 민망하더라니까. 게다가 딸이라고 벌써부터 세상이 흉흉한데 어쩌냐면서 주책을 부리는데 정말 웃긴다니까. 그래도 무덤덤한 것보다는 좋더라. 사실 혼전임신이라 애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건 아닐까? 애 낳고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등등 걱정이 없지는 않았어. 시댁에서 결혼 반대할 때, 오빠도 흔들린 거 알았거든. 아무튼 지금은 그런 걱정이 싹 사라졌어. 애 낳고 참 좋다. 이제야 내 인생이 제대로 세팅된 것 같아. 이 상태로 쭉 정해진 대로만 가면 아무 문제없을 거 같아.”
지은의 미소가 참 편안해 보였다. 간호사가 인사하며 아이를 안고 들어갔다. 지은이는 민영에게 방이 너무 덥다며, 병원 로비 소파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근데 왜 현욱 오빠랑 왜 같이 안 왔어?”
“너 불편할까 봐. 울 언니 보니까 애 낳고 손님 오는 거 안 좋아하던데.”
“뭐 그건 그렇지. 하지만 왠지 그게 다는 아닌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휴... 사실은 그냥 좀 안 좋아.”
“왜? 양가에 인사하고 결혼 준비한다면서?”
"원래는 오늘 우리 집에 인사 오기로 한 날이야. 그런데 취소됐어. 아무래도 오빠가 아직은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일 년 미루기로 했어. 일 년 동안 돈 좀 더 모으고, 그때 인사드리고 결혼 준비하자고 그래서.”
“아이구야. 넌 괜찮아?”
“나야 뭐...... 괜찮아.”
“안 괜찮을 거 같아. 나라면 진짜 화 날 것 같은데.”
“화난다기보다. 뭐랄까. 허무함? 무시당함? 나만 기대했었나 하는 바보같은 기분이랄까?
오빠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오빠가 좋으니까 기다리겠지만. 우리가 오래 만난 것도 아니요, 짧게 만난 것도 아니요. 사귀는 것도 아니요. 헤어진 것도 아니요. 사랑은 하지만 미래에 대한 그림은 각자가 다른 듯하고 등등 여러 가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오빠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인사도 미루고 천천히 하자고 내가 말하자마자 좋다고 활짝 웃기나 하고.
그러다 보니 이젠 만나도 그냥 얼굴 보고 영화 보고 술 먹고 섹스하고 밍밍해. 다음 퀘스트가 없어서 그런지 기대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현욱 오빠가 좋아? 다른 남자 만날 생각은 없고?”
“남자를 아예 안 만나면 모를까. 다른 남자는 별로... 이제 와서 썸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알아가고 하는 건 너무 귀찮아.
현욱 오빠가 좋지. 말 안 해도 내 취향, 스타일 아니까 편하고, 며칠을 붙어 있어도 형제처럼 편하고. 무엇보다 나 사랑해주는 것에 하나의 의심도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보통 인연이니.”
민영이가 습관적으로 반지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지은이가 반지를 빙빙 돌리는 민영이의 손을 잡았다.
“에혀...... 나 연애할 때, 힘들 던 그때 생각나네. 나도 8년을 연애하며, 시댁에서 계속 반대했었잖아. 그런데 말이야. 나는 오빠만 바라봤는데, 창수 오빠는 그러지 않았더라.”
“응? 창수 오빠가?”
“응, 어렴풋이 짐작은 했는데, 결혼하고 오빠가 정확히 말해줬어. 집안에서 워낙 반대를 하고 화를 내니까. 시어머니가 선 보라고 강요하면, 카메라 사주면 선 볼게, 옷 사주면 선 볼게, 그런 식으로 거래하면서 선 자리 나갔대.
오빠 생각에는 부모님이 하라는 데로 좀 맞춰줘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나를 엄청 구박할 것 같더래. 그래서 나 모르게 선을 몇 번 봤고, 그중에 몇 명은 또 두세 번 만나기도 했데. 나름 비교한 거지.
근데, 오빠 말로는 조강지처는 지은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래. 남자니까 눈은 돌아갈 수 있어도 결혼은, 조강지처로는 나를 박아놔야겠다나.
그즈음에 나 약학 고시까지 패스하고 나니까, 오빠가 내 월급으로 대강 먹고는 살겠다 싶어서 임신을 질러버린 거야. 부모님도 다른 여자 다 만나도 결혼은 지은이랑 한다고 말하고, 애까지 가져버리니까 그냥 허락한 거고.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 한동안은 배신감 들었는데. 결혼 전이기도하고, 다 생각하고, 고려하고도 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오히려 기분 좋기도 하더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된 거 너도 창수 오빠처럼 편안하게 장기적으로 생각해. 현욱 오빠만 바라보면서 네 인생 버리지 말고. 오빠 일 년 동안 돈 모으면서 준비할 동안, 너는 네 취미도 만들고, 선도 보면서 편하게 살라고. 어차피 결혼하면 연애는 끝인데 나중에 못할 거 다 질러버리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라고. 나이도 많은데, 선 보는 정도는 바람 피거나 양다리랑은 다르니까 양심에 찔릴 일도 없고.”
민영이는 지은이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지은이가 진심으로 친구를 위해서 하는 말인 것을 알지만, 대놓고 다른 남자도 만나보라는 이런 충고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지은이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응. 엄마 오시지 말라고 해요. 피곤하게... 알았어. 그럼 모시고 와요. 참 도시가스 비용이랑 관리비 내라고 전화 왔어. 그리고 집에 보일러 고치는 거 알아보고. 시어머니? 그건 내가 전화할게. 응. 애기는 잘 있어. 아버님께 한 달 안에 출생 신고해야 한다는 것 말씀드리고. 응. 알았어. 이따 봐.”
가만히 지은이의 통화를 듣는데, 연인의 대화가 아니라 손발이 잘 맞는 동업자의 대화 같았다. 지은이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창수 오빠가 보호자이고, 지은이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가족이라는 것들이 부러웠다.
‘나는 언제 저렇게 현욱 오빠랑 공공연한 한 팀이 될 수 있으려나......’
아줌마 같은 지은이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부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힘들었다. 민영은 가방을 어깨에 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갈래.”
“벌써? 밥도 먹고 더 있다 가지.”
“아니야. 생각보다 오래 있었어. 너는 환자인데 쉬어야지. 종종 놀러 올게. 몸조리 잘해. 창수 오빠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주차된 차에 들어가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켜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일요일 3시.
현욱 오빠는 집에서 쉰다고 했다. 하지만 현욱의 집에 가기 싫었다. 풀 메이크업에 차려입었는데 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다 벗고 누워 있는 것이 아까웠다.
카톡의 친구 목록을 봤지만 딱히 연락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가입한 카페 목록을 쭉 훑어봤다. 사진동호회, 자동차 동호회, 유럽여행 동호회, 가죽공방 동호회 등 잠깐식 활동했던 카페 목록을 쭉 훑어보다가, 자동차 동호회에 번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결국 인터넷 창을 닫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현욱에게 전화가 왔다.
“민영아, 어디야?”
지금 막 잠에서 깬 목소리였다.
“지은이 면회 왔다가 지금 막 나왔어.”
“그래? 다 건강하데? 애기는 예뻐?”
“그냥 그렇지 머. 신생아는 좀 이상해. 빨갛고.”
“그렇구나. 그럼 우리 집으로 올 거야?”
“아니, 집에 가야지.”
“왜? 우리 집에 오지.”
“좀 피곤해서. 오늘 조카도 오기로 했고.”
“그래...... 오늘 인사드리러 가기로 했던 날인데... 너 속상하지 않아? 정말 혼자 있어도 돼?”
“됐어. 지은이 보러 오느라 운전해서 피곤해. 엄마도 일찍 오라고 잔소리 엄청하고, 그냥 집에 일찍 갈 거야.”
“그래...... 생각 바뀌면 전화해. 대기하고 있을게.”
“...... 봐서......”
민영이는 차의 시동을 켰다.
일단 서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공부, 운동, 취미 뭐든 좋으니 서점에 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 가는 길에 신호에 걸려 잠시 차를 멈췄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햇빛에 반짝였다. 민영이는 눈이 부셨다. 그대로 반지를 뺐다. 민영이는 반지를 문짝에 달린 컵홀더에 넣었다.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파란불이 되었다. 민영은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창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승민씨가 창문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어머, 눈 와요. 올해 첫눈 멋지다.”
다른 직원들이 의자에 앉은 채,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내밀며 창문 밖을 한번씩 쳐다봤다.
김부장님이 신발을 끌며 창가로 왔다.
“그러게... 정말 멋지네... 그런데 난 눈 오면 길이 질척여서 싫어.”
"어머 부장님. 왜 그러세요. 낭만 없이.”
승민씨랑 김부장님이 눈이 어쩌고 하는데, 민영은 무표정하게 창을 흘끗 보고는 계속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민영은 핸드폰 옆구리를 눌러 진동을 멈추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후에 카톡이 왔다.
[예쁜아, 바빠? 전화 안 받네. 밖에 눈 와. 엄청 많이. 좋지? 내가 퇴근하고 들릴께. 같이 저녁 먹자.]
민영이는 메시지 미리보기로 내용만 보고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고 서랍에 집어넣고 계속 일을 했다.
잠시 후에, 김부장님이 네이트온으로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을 걸었다. 점심 멤버 네 명은 회사 건물 1층의 중국집으로 갔다. 메뉴를 고르며 김부장님이 말했다.
“눈 오니까 정말 겨울이 온 게 느껴진다. 임자 있는 두 명은 오늘 데이트해요?”
“데이트라기보다는... 오늘 웨딩 플래너 만나기로 했어요. 숙제하는 기분이에요.”
“그게 데이트지 머. 그리고 결혼이란 게 원래 그래요. 매일매일 둘이 조별 과제하는 거랑 비슷해. 그냥 매일 그렇게 살 거니까. 즐기는 법을 익혀야 해요.”
이회계사님의 냉정한 말투에 승민씨가 입을 삐쭉거렸다. 김부장님은 그 둘을 모른 척하며 민영에게 말했다.
“민영회계사님은 데이트 안 해?”
“네? 모르겠어요. 만나자고는 하는데...... 좀 귀찮기도 하고.”
“왜? 한창 좋을 땐 데. 참, 양가에 인사드렸어요?”
“좀 일이 있어서 인사 미뤘어요. 결혼도 미뤘구요. 요샌 좀 별루예요. 오래 만나다 보니 데이트 코스도 똑같고, 지루하고, 지난번에 영화관에 갔는데 다 본거라 그냥 나온 적도 있어요.
먹는 것도 똑같고, 특별한 곳에 놀러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요.
승민씨처럼 숙제가 있으면 만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냥 다 귀찮고 늘어지네요.
오늘도 만나봤자 길만 막히고, 부장님 말씀대로 옷만 지저분해지니 걷고 싶지도 않구요. 늙었나 봐요.”
“어이, 내 앞에서 늙었다고 말하면 안 되지.”
“호호 죄송해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겨울이라 그럴 거야. 봄 되고, 날이 좋아지면 놀러 가고 싶어서 안달복달할걸, 게다가 자기도 막상 결혼 준비 시작하면 승민씨처럼 힘들다고 징징댈 거고.”
민영이의 묘한 분위기에 이회계사님이 위로하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일이 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내가 지칠까 봐 두려워요. 아무튼 뭐 운명을 지켜보는 거지요.”
민영이가 순간 본인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 주문이나 해요. 이모님. 여기요.”
민영이가 고개를 뒤로 하고, 손을 살짝 들어 이모를 불렀다. 그런데 민영의 손에 반지가 없었다.
승민씨가 순간 ‘어! 반지...’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김 부장님이 승민씨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세명은 서로 눈짓으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첫눈은 함박눈이 되어 계속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민영이는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민영아, 퇴근해? 나 회사로 갈까? 말까?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걱정된다.]
민영이는 카톡을 확인했다. 하지만 바로 답을 하지 않고 고민을 했다.
현욱이가 싫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만나서 대화를 할 때면, 민영은 승민씨의 결혼 이야기나 지은이의 신혼 이야기를 하곤 했고, 그런 이야기에 현욱은 스트레스 받아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대화 주제가 없었다. 결국 텔레비전 틀어놓고 술만 마시다가 섹스 한번 하고 헤어지는 데이트만 반복될 뿐이었다. 이런 뻔한 데이트에 짜증이 나도, 둘 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뿐이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는 무엇을 하며 웃고 행복해했었는지 이젠 아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현욱에게 전화가 왔다.
“민영아, 카톡 봤는데 왜 대답이 없어?”
“지금 카톡 보내려던 참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일이 많이 바빴어. 아직 사무실이야. 정리하려고. 그리고 오늘은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셔서 데이트는 힘들 것 같아.”
“그래... 그럼 내가 케잌 사갈 테니까 집 앞에 잠깐 나올래?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거야.”
“아니야. 집에 뭐라고 말해. 가지고 들어가기 곤란해.”
“...... 그래......”
현욱이는 민영이네서 둘이 헤어진 것처럼 알고 있으며, 그것이 차라리 덜 스트레스 받는다는 민영이의 말에 동의했던 것을 생각했다.
“미안해.”
현욱이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이제 11개월 남았는데, 계획대로 대고 있어?”
“응, 회사랑 연봉 조정도 조만간 할 거고, 과외도 알아보고 있어. 그리고 좀 허름해도 월세 더 싼 곳으로 이사하려고 방도 알아보고 있어.”
“그래. 알아서 해.”
“근데. 예산에 맞는 집은 너무 허름해서 너가 보고 놀랄까 봐 걱정이야.”
“휴~ 오빠. 난 반지하 단칸방도 좋다고, 나 좀 믿어줘.”
“그래. 근데 정말 고시원을 알아봐야 할지도 몰라서......”
“고시원? 왜? 보증금은 있잖아.”
“그게 보증금 빼서 주식을 할까 싶기도 해. 재테크를 해야 돈이 모이지.”
“휴...... 괜한 짓 하다가 있는 돈까지 까먹으면 어떡하려고.”
“야. 너도 나 좀 믿어줘. 내가 여태 투자금이 적어서 그렇지, 수익률로 보면 굉장하거든.”
“...... 오빠를 믿지. 하지만 주식은 도박 같은 거잖아.”
“주식이랑 도박이랑 다르지. 넌 배운 애가 뭐 그리 무식한 말을 하냐? 암튼 알아서 할게. 잘 되고 있어.”
“...... 그래.”
“......”
“......”
“예쁜아.”
“뭐야. 뜬금없이.”
“사랑해.”
“...... 휴...... 나도.”
“정말 안 만날 거야?”
“...... 알았어. 근데 오빠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 서울숲에서 만나자. 거기서 조금 걷자. 그리고 나는 빨리 집에 들어갈 거야.”
“그래. 그러자. 그럼 40분 뒤에 서울숲에서 만나.”
현욱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서울숲은 이미 너무 깜깜해서 운치도 없었다. 나란히 차를 세우고, 현욱의 차에 민영이가 옮겨 앉았다. 민영이는 포장해온 김밥 등 분식을 차 뒷좌석에 풀었다.
아무 말 없이 김밥을 먹던 현욱이가 말했다.
“정말 불편하고 운치도 없다. 추운 날에는 공원은 아닌 것 같아. 차에서 분식 먹는 것도 쫌 별루다.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게. 시간이 갈수록 데이트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아.”
“맞아. 안이해져서 그런가?”
“글쎄.”
먹을 것을 다 먹은 둘은 차에서 나와 걷기로 했다.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 길이 미끄러웠다. 현욱이가 민영이 손을 잡았다. 둘은 결국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고 바로 다시 차로 돌아왔다.
“정말 진짜 별루다.”
커피를 마시며 민영이가 말했다.
“미안해.”
“오빠가 뭘.”
“우리, 집에 갈까?”
“그래. 길 더 얼기 전에 가자.”
“그래, 냉장고에 맥주도 있어. 가서 맥주랑 영화 보자.”
“뭐? 오빠 집에 안 간다고. 나는 각자 자기 집에 가지는 거였는데?”
“그래? 알았어. 그럼 잠깐 더 있다가 가자.”
민영이는 커피잔을 든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현욱이가 그런 민영이의 옆모습을 봤다. 입술이 툭 튀어나와있었다. 현욱이가 민영이의 커피잔을 뺏어 대시보
드에 올려놓고는 민영이를 꼭 안았다. 민영이가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현욱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영이를 계속 안고만 있었다. 민영이가 갑자기 흑흑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오빠”
“응.”
“정말 나 놓지 않을 거지?”
“그럼. 널 놓은 것은 한 번으로 족해. 다시는 널 놓지 않아. 나 믿어줘.”
“응, 꼭 잡아. 나 놓치면 오빠 후회할 거야.”
민영이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현욱이가 민영이에게 키스했다. 민영이가 살짝 웃었다. 둘은 포옹을 했다. 잠시 후, 민영이가 말했다.
“근데 이제 정말 가자.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그래. 오늘은 이만 가자. 나도 이사도 알아보고 할 게 많다.”
둘은 차에서 내렸다. 현욱이가 민영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민영이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현욱이도 곧 차를 움직였다. 공원 주차장을 나와, 민영이는 오른쪽, 현욱이는 왼쪽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