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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비주 Nov 21. 2023

생각을 접고 우주와 함께

밤새 내린 이슬은 서리가 되어 풀잎에 있다.

걷다 보면 생각은 없어지고 단순한 것들이 몸으로 들어온다.

여름 신발의 미끄러움이 곡면의 길, 솟았다 내려가는 길에서

경계를 요한다.

서리는 아침이슬이 되어 불빛에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지면에서는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직선의 길은 반듯해서 똑같은 간격의 걸음으로 앞을 잘 보고 간다면  주어진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신호등이 없는 산책길에선.

가끔 휘어지는 길을 만날 때 잠시 생각을 더 접고 몸을 휘어서 걸어가야 한다.


몸으로 체득한 모든 것들이 허망해지는 날들이 있다.

충만함으로 가득 차서 세상 모든 것들이 예쁘고 사랑스럽다가도

오직 혼자인 것 같은 날이 몸속을 파고들면, 몸의 곳곳에서 신호를 보낸다.

매운 것 넣어주세요.

아니오 단 것도요. 신 것도요.

마지막으로 씁쓸한 것을 꺼내어 마시다 짜디짠 것들이 생각난다.

이러한 시간들을 건너는 방법은 그저 몸을 생각의 한가운데

있지 않고 자연이 주는 에너지에 맡겨야 한다.

그저 있음으로써 충만해지는 시간을 만날 때까지

생각은 없어져도 좋다.

왼쪽 발바닥의 불편함이 무디어지고 허리와 등의 꼿꼿함이 드러나고 대퇴근의 자유로움이 몸에 느껴질 때

손은 손가락을 뻗쳐서 든든해진다.

온몸이 우주와 함께함을 자각하는 때이다.


1년간 많이 힘들었고 많은 어려운 일들이 지나갔다.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 삶이 아닌가

다시 단순해지고 몸에 성실해지는 시간 속에 들기로 한다.

그냥 걷자.

까마귀도 까치도 길냥이들도 이른 아침을 놓치지 않는다.

참으로 예쁘게도 잎을 떨구는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22.11.20


아침 산책 후 단상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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