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나와 가장 잘 맞는 옷일 수도 있지만...
2019년 1월, 나를 대학교 시절부터 아주 잘 아는 선배형, 이제는 경영학 교수가 되어 미국에서 가르치다가 한국으로 온 형이랑 오랜만에 케첩 해서 회포를 풀었다. 형한테 스타트업에서의 4년여의 시간과, 이제 새로운 길을 찾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니 형은 생각지도 못하게 박사를 권했다.
“산, 그래, 멋지다. 그리고 정말 훌륭한 경험 한 것 같아. 이제는 뭐할 생각이니? 난 네가 진짜 잘하는 걸 했으면 좋겠어. 과연 미국에서 회사에서 경영을 하는 게 네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걸까? 내가 아는 백산이 제일 잘하는 건 공부, 연구, 그리고 그걸 알기 쉽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거야. 그렇지 않아? 박사 진짜 이제라도 한번 안 해볼래? 인생 길어. 내가 볼 때 네가 공부하는 과정을 즐길지는 모르겠지만 넌 분명 잘할 것 같아.”
허.... 이게 또 갑자기 웬 달나라로 가자는 소리인가. 안 그래도 옵션이 많고 생각할 것 많은데. 하지만 선뜻 그 형의 말을 내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은 다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아내: “오빠, 진짜 교수 어때? 내가 볼 땐 진짜 오빠 천직이야. 오빠 공부하기 좋아하고 가르치기 좋아하고 후배들이나 눈 빤짝빤짝한 사람들한테 투자하고 같이 노력하는 거 너무 좋아하잖아. 만약 한다고 하면 난 진짜 적극적으로 응원할게요!”
수년을 같이 일한 회사 대표: “너 진짜 교수한 번 생각해봐. 내가 볼 때 최고의 교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형한테 이런저런 거 물어봤다. 아래는 문답 내용.
“산: 형, 교수는 결국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민간이 어떻게 비즈니스 하는지 연구해서 케첩만 하는 거 아닌가요?”
“형: 그렇지 않아.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분야의 정점에 있는 교수들은 정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 클레이튼 슨 교수님 봐봐. 아담 그랜트를 봐봐. 한두 산업과 한두 비즈니스를 훨씬 뛰어넘는 분석과 식견으로 경제와 산업 동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새로운 전략이나 기업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지.
“산: 형, 그렇군요. 그렇지만 VC들이 더 그런 역할을 잘한다고 보이는데요”
“형: 그건 네가 그 세상에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 그것만 보이는 거지. 그리고 분야의 최고가 되면 정점에서 만날 수 있어. 존 도어 같은 VC가 영향 미치는 거나, 아담 그랜트 같은 사람 영향 미치는 거 봐봐. 결국 중요한 건 네가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는지, 네가 니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지야. 너 VC가 되고 싶다고? 결국은 사람을 읽고 투자하는 건데 그게 네가 진짜 제일 잘하는 거니? 너 눈치 뒤지게 없잖아 ㅋㅋ 난 잘 모르겠다.
“산: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하나도 틀린 게 없는. 진짜 한번 고민해볼게요. 너무 막연한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형: 결국 크게 보면 세가 지야. 거시경제를 하고 싶은지, 기업/조직을 연구하고 싶은지, 사람을 연구하고 싶은지. 결국 학문을 한다는 건, 네가 한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내고 하는 거니 일단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간 다음에 나중에 다른 섹터로도 넘나들 수 있으니. "
"산: 그렇군요, 그리고 구체적으론 어떻게 하면 될까요?"
"형: 지금 너의 나이와 경력을 봤을 때 경제학 박사는 무리야. 대부분의 top tier 경제학 박사는 아주 어린 나이에 시작하고 academic 트랙을 밟지. 경영학에는 너처럼 다양한 경험 가진 사람도 종종 있어. 일단 GRE보고, 추천서 잘 받고 정말 열심히 지원하면 분명 top 스쿨도 가능성 있어. 그러면 한해에 약간의 돈이 나오고 학교에서 살 곳도 줄 테니 크게 풍족하진 않겠지만 분명 불가능한 건 아니야. "
그래서 저으기 고민해봤다. 형이 보내준 논문들, 책들도 읽어보고, 그런 교수님들도 찾아보고, 주위에 잘 아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박사/교수를 절대 하지 말라는 쪽에선 이런 이야기들을 해줬다.
"산, 넌 정말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야. 그 에너지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박사하고 교수 트랙으로 가는 순간 넌 답답해 죽고 말 거야. 저얼대 가지 마. 그건 너의 생기를 꺾어버릴 거야."
"이미 많은 대학이 문 닫고 있고 교수 사양길이야. 한국은 특히나. 그렇다면 미국에 남아서 교수하기?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야?"
충분히 좋은 길일 수 있다는 쪽에선 이런 이야기들을 해줬다.
"인생 정말 길잖아. 자기 분야에서 꾸준히 뭔가를 연구하고 쌓아가고 후학과 교류할 수 있다는 거, 특히 그게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을 몰라도 너는 잘할 것 같아. 절대 아직 늦지 않았어."
"회사가 학교보다 더 현장에 있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교수로서 마치 VC가 하듯이 정말 다양하게 비즈니스에 관여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 그리고 한 회사는 하나밖에 못 보지만 교수/지식인은 정말 많은 걸 보고 다른 가치를 줄 수 있지. 그것 또한 필요한 역할이며 많은 progress와 가치를 가져다주는 거잖아."
고민 많이 했지만 결국은 아래 몇 가지 이유에서 이 선택지도 접게 됐다.
더 현장에 있고 싶었다. 비즈니스를 만들고, 팀을 꾸리고, 사람들과 같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일이, 무언가를 혼자 연구하는 일보다 조금 더 하고 싶었다. 경영학 박사들이 쓰는 논문들을 읽어봤는데 재미가 좀 (꽤) 없었다. 이걸 혼신의 힘을 다해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걸 즐길 수 있을지 판단이 안 섰다.
지금 다시 공부하고 다시 지원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자신이 좀 없었다. 아직 커리어에서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좀 세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다양한 경험을 해봤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책 만들기, 거시경제정책, 스타트업 운영, 글로벌 기업 마케팅/사업개발 등). 이제는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좀 알 것 같고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완전히 새로운 (?) 공부라는 분야에서 또 GRE보고 원서 내고 연구하고 그런 새로운 시작을 할 자신이 좀 없었다.
그래. 아쉬움이 안 남는 건 정말 아니다. 연구하고, 그걸 나누고, 후학과 교류하고 하는 건 어떻게든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스탠퍼드 MBA의 조엘 피터슨 교수님이나, 지금 NYU Stern에서 강의하는 전 카카오 임지훈 대표님 같은 분처럼? 그렇게 난 또 하나의 선택지를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