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을 살리는 스마트한 수인가 아니면 무리수인가
미국에 온 지 이제 벌써 8년 차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리콘밸리에서 보냈고 학교 생활을 제외하면 스타트업 업계에 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이 분야에 있는 사람도 많이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한국 스타트업 중 미국에 진출하거나 미국/글로벌 자본 시장으로부터 펀딩을 받고자 하는 회사는 종종 연결이 되어 여력이 닿는 데로 도와준 적도 있다. 올해 들어 회사를 나오기로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자, 한국계 회사 중에 글로벌 시장 진출을 노리는 회사 몇과 연결이 되었다. 내가 그리고 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도 고마운 이야기이기에, 시간을 내서 전화통화나 만남을 가졌고, 그중 한 회사와는 꽤 심도 있는 대화까지 해봤다.
만나본 회사의 대부분은 한국인 중심으로 구성된 기술기반 회사였고,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건 글로벌 시장 진출이나, 미국 VC들로부터의 투자유치였다. 만나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 중 하나는, 이들은 나를 하나의 직장인으로 채용하려는 게 아니었다. 많은 임원급 채용이 그렇듯이, 이건 거의 자유계약 선수로서 아주 구체적인 성과를 염두에 두고 그 성과를 달성하느냐 못하느냐로 바로 판가름 나는 그런 기회로 느껴졌다. 실제로 미국 오피스의 헤드이자, 전체 회사의 임원급으로 나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에 아직 팀이 크지 않은 회사도 있었고, 팀이 어느 정도 크지만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이고 대표와 현재 임원들도 엔지니어들 중심의 회사라 CFO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네트워크 - 미국 시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미국에서 팀도 꾸리고 비즈니스와 펀드레이징을 해봤다는 경험, 미국 VC 네트워크 들 - 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워낙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 다르니 시너지가 날 영역도 분명 보였다. 분명 한국을 잘 이해하고 미국도 이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가능한 옵션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 나와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얼마나 한국인이 우수한가 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자기비판적인 부분이 많고, 글로벌 역량에 못 미치는 부분도 다양하게 있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 다양한 부분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인 것이 분명 있다. 한국인만큼 똑똑하고, 빠릿빠릿하고, 임기응변에 능하고, 끼도 많고, 열심히 하고, 진취적이고, 성공 의지가 높고, 그런 민족이 아주 많지는 않다는 걸 느꼈다. 지금의 BTS, LPGA 선수들, K pop/한류, 화장품, 반도체 이런 건 그냥 나온 게 아니리라. 분명 이런 부분에서 한국인은 글로벌 경쟁력이 있었고, 이런 걸 잘 살리면서 내가 미국에서 가진 경험도 잘 살릴 수 있으면 베스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이 가진 장점을 잘 레버리징 해서 글로벌 플레이를 한다 - 큰 그림에서 보면 완전 말이 돼 보였다. 특히나 내가 이야기하는 회사들은 진짜 우수한 한국인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기술기반 회사로서, 아주 구체적인 기술을 모르는 내가 언뜻 보기에도 분명 기술적으로는 매우 우수해 보였다. 여기에 내가 가진 경험과 네트워크로 시너지를 낸다면? 이런 생각이 저으기 들었다.
하지만 이 선택지는 생각보다 아주 큰 고민 없이 접기로 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아래 주요 생각을 적어본다.
일의 가장 큰 기본 중 하나는 신뢰관계 (Trusted relationship)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에버노트, 라인, 그리고 어웨어에서 일하면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으면서 이것들을 계속 맞춰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느꼈다. 그리고 내 주위에 보면 간혹 한국 회사의 미국 오피스를 맡고 있는 선배들이 있다. 이들이 떨어져 일하면서 신뢰를 쌓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호흡을 맞추는데 들이는 노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어쩔 수 없었다. 미국 오피스가 전략적으로 그게 중요하지 않고 R&D 중심의 리서치 센터로 운영되거나, 완전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면 모를까, 미국 오피스의 퍼포먼스가 투자유치든, 시장 개척이든, 수익 창출이든 전체 회사의 존속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미국 회사의 업무를 함에 있어서 한국 오피스의 인력과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면 (제품 관련 서포트든, 신규 프로덕트/서비스 론칭이든), 거의 매일 아주 상당한 양의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했다. 실제로 에버노트에서 아시아를 다 매니징 한 내 전 매니저는 굳이 이메일을 보내거나 통화하지 않아도 서로의 업무 진행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상황판을 에버노트로 잘 만들어놓고 늘 거기에서 일의 진행상황과 주요 이슈에 대해 커뮤니케 잇 하는 시스템을 너무나 잘 만들어놔서 불필요한 출장과 커뮤니케이션을 최소화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길게 통화했고 두어 달에 한 번은 꼭 출장을 갔다. 라인에서 미국 오피스의 수장을 맡고 있었던 전 라인 미주법인 대표는 거의 매일 새벽 한국 오피스와 짧든 길든 통화를 했다. 어웨어에서는 나를 비롯해서 우리 대표와 CTO분이 번갈아 가며 한국 오피스에 출장을 가서, 당장 일이 있든 없든 다양한 것들을 싱크 했다. 일을 함에 있어서 늘 페이스타임 (얼굴을 보며 일하는 것)을 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페이스타임 없이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도 확실히 배웠다.
전 재경부 차관: 세종시로 내려가고 나서 느낀 게 뭔지 알아? 사무관과 과장/국장 간에 시각차가 너무 크다는 거야. 이번에 신재민 사무관 일만 봐도 마찬가지야. 그 친구의 그런 생각이나 어려움들을, 옆에 있었으면 과장이나 국장이 분명 아우르고 들어주고 어떤 부분은 설명하고 설득하고 할 수 있었을 거야. 근데 이제는 서울에 주로 국과장이 있으니 그런 게 없는 거야. 그냥 보고서로 왔다 갔다 하고, 딱 일적인 이야기만 전화로 하고 그래서는 절대로 예전과 같은 도제식 교육이나, 자연스럽게 서로 신뢰를 쌓고 눈빛으로 몸짓으로 하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한 거지. 계속 삐걱거리는 거야.
미국에 거주하며 한국 회사의 임원급을 맡고 있는 지인: 일주일에 한두 번은 거의 한국시간에 맞춰서 자정 넘까지 일해. 나 때문에 내 시간에 맞춰서 회의를 무조건 하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체력적으로도 시달리고,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지 싶을 때가 많다야.
내게 연락 온 회사들은 상당히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것 같은, 분명 잘 플레이하면 될 것 같기도 한 회사였다. 팀도 탄탄했다. 이미 스타트업을 해본 사람들이 리더십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엑싯경험을 가진 경우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일단 이들은 내가 원래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술기반 회사들이다 보니 내가 이 산업에 대해 아는 게 크지 않았고 깊이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회사의 핵심인 기술이나 서비스를 판단할만한 전문성이나 식견이 없었다. 결국 나보고 이 회사에 투자할 거냐고 물어보면, 내 돈 있으면 넣겠냐고 물어보면 자신 없었다.
결국 내게 요구되는 일들 - 이 제품을 바탕으로 필요한 투자유치를 하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만들고, 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업체나 서비스에 접목시키고 - 이 모든 일들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품과 서비스를 적당히 알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불확실한 게 너무 크다고 느껴졌다.
이건 분명 매년 연봉 계약하는 자유계약 선수, 임원의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걸 최대한 활용하여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고 결과를 내는 것에 특화된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직은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아직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물론 가진 것을 활용하기와 새로운 것을 배우기 - 이 둘이 서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고, 양립하지 못할 것도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새로운 걸 배운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나도 파이를 만들고 뭔가를 줘야 하는 건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고, 마찬가지로 내 가진 것을 당장 활용해서 용병처럼 싸우더라도 분명 그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배움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용병처럼 단기간에 결과를 내는 게 주가 되는, 나의 개인플레이에 많은 결과와 성과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을 지금 당장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 한국계 회사는 아닌 것 같다. 특히나 미국 오피스는.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