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버블을 벗어나자 더 큰 세계가 보였다
다음 커리어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내가 취한 전략 중 하나는 내가 따르고 존경하는 선배들한테 연락하기, 특히 벤처캐피털 (VC)에 있는 분들에게 연락해서 포트폴리오 소개해달라고 하는 거였다. 그중에 전에 만났던 레전드 캐피털(Legend capital)의 박준성 파트너가 있었다. 전에 어웨어에서 중국 펀드레이징을 할 때, 사돈에 팔촌까지 다 동원해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VC 소개해달라고 해서 소개받았던 분이다. 그때 어렵게 시간 내주셔서 우리 어웨어 출장단에게 맛있는 밥도 대접해주시고 중국 시장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고 펀드의 방향성과 포트폴리오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셔서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니 어떤 VC가 처음 만나는, 아직 한참 갈길이 먼 스타트업한테 적극적으로 자기 펀드 철학을 설명하며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가. 알고 보니, 우리뿐 아니라 다양한 주위 사람들에게 늘 많은 도움을 베풀고 사람한테 투자하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 다년간에 걸친 낯 두꺼운 도움 요청하기로 단련이 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함에 있어서 프로가 아닌가. 그렇게 연락을 드리자 실리콘밸리 출장할 때 만나주시고, 다양한 기회들을 소개해 주셨고, 1월에도 한국으로 출장 오셨을 때 어려운 시간을 내주셨다. 아니 어려운 시간뿐 아니라 맛있는 밥도 사주시고, 저녁시간 한 번을 통째로 나에게 내주시고 나의 진로를 같이 고민해줬다.
그날의 대화는 이런 식이 었다.
J: 그래, 이제 마무리한다고? 수고했다. 다음 스텝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S: 회사 직접 하는 것도 고민해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요, 박사도 한번 고민해보고 있고, 아님 미국에서 지금 했듯이 좀 더 열심히 리크루팅 해볼까 다양한 고민 가운데 있어요. VC도 관심 있고요. 아직 갈피를 전혀 못 잡고 있는 것 같네요.
J: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해볼까? 미국에서 정말 좋은 스타트업에 들어간다 한들, 과연 그 전투의 장이 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에지 있는 곳인지, 더 잘 싸울 수 있는 곳인지, 너의 강점을 play 할 수 있는 곳인지 생각해봐라. 네가 누구와 경쟁할까. 미국에서 자라서 최고의 학벌과 계속 그쪽 테크 기업에서 자란 사람과 경쟁하지 않을까.
J: 미국에서 한국을 레버리지 하는 것도 잘 모르겠어. 한국을 레버리지 해서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업의 미국 진출? 물론 몇 개는 있겠지. 하지만 큰 그림에서 봤을 때 그건 한국의 대표주자가 아니지 않아? 한류/콘텐츠/화장품/반도체 이런 게 대표지 소트프웨어는 극소수일 거다. 한국의 강점을 살리는 플레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의 선두주자는 미국이잖아. 미국 소프트웨어의 한국 진출이 오히려 다 말이 되지.
J: 한번 주제를 돌려보자. 네가 생각할 때 네가 진짜 좋아하고 잘하는 게 뭔가 같니?
S: 제가 많이 고민해봤는데 전 정말 1) 호기심 많고 2)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하고 3) 거시적인 시각으로 문제 접근하는 것 좋아하고 4) 다양한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하는 Bizops 해결사 같은 역할도 너무 좋은 것 같아요.
J: 그렇구나, 나랑 비슷한 것도 많이 있는 것 같아. 넌 나중에 투자자 해도 잘할 것 같다.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자리에 왔는지 이야기해줄게. 사실 정말 운이 좋았어. 내가 일본에 가고 중국에 가고 레전드 캐피털에 들어오고 이 모든 게 정말 힘들 때도 많았고 맘대로 안되고 내 삶이 어디 가는지 모르겠었을 때도 있었지만 뒤돌아보니 맞는 시간에 맞는 자리에 있었던 게 천운이었던 것 같아. 산아 너도 보면 너무나 똑똑하고 너무나 열심히 살고 다 좋은데 진짜 맞는 자리, 맞는 시간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게 뭘까?
난 사실 네가 아시아에 와서 맘껏 일하면 훨씬 더 날개 달린 듯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에 대해 생각해봤니? 미국 시장은 내가 이야기한 그런 제약조건이 보인다면, 반면 일본은 진짜 기회가 많다고 생각해. 내가 요새 일본 시장 많이 보는데 정말 재밌어. 중요한 건 유니크 해지는 거야. 미국과 한국시장을 다 이해하고 경험한, 일본어도 하고 일본에서 비즈니스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 일본 회사에서 찾을 거고, 한국/미국 회사에서 분명 찾을 수 있어.
2월에 내가 일본 출장 가는데 한번 같이 안 가볼래? 일본 시장에 한번 베팅해봐. 지금은 한 회사에 올인해서 또 한 번의 커리어 리스크를 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은 마켓 포지션을 가져가서 마켓에 베팅할 때야. 앞으로 몇 년, 언어와 시장을 배우고 나서 40대가 될 때 내가 보장할게 후회 안 한다고.
일본? 사실 생각해본 적 거의 없었다. 일본은 한국보다도 더 답답하고 느린 나라가 아닌가? 실리콘밸리처럼 다이내믹하고 변화를 선도하는 곳, 그중에서도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개척하는 스타트업에서 열심히 전진하던 내게는 아주 큰 후퇴를 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미국 온 지 8년, 영주권도 생기고 결혼도 하고 일도 고군분투 중이지만 어찌어찌 해오며 어느 정도 정착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일본이라니 이건 좀 말이 안 되게 느껴졌다. 하지만 최근에 만난, 그 사고의 깊이가 너무나 깊고 정리되어 있어서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마지않는 이 김동조 (트위터)란 분도 일본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 난 일본의 저력을 높이 평가해. 깊게 들어가면 일본의 기술력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고 경쟁력의 깊이가 깊어. 그 국민성도 대단하지. 지난 30년간 실질소득이 하락했지만 국민이 견뎌냈고, 이제는 갈 때까지 갔다는 위기의식으로, 전진에 대한 합의 (consensus)를 이끌어낸 나라야. 기업의 대차대조표를 보더라도 군더더기가 다 빠졌고 알짜만 남았지. 일본의 향후 십 년 이상은 계속 전진이 있을 거고 그건 아주 탄탄할 거야. 난 애들에게 계속 일본어를 가르치려 하고 있고, 일본이 한국의 미래 중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야."
그래. 분명 말이 되는 면이 있다고 느꼈다. 나의 Gut이, 제대로 한번 알아보라고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일본에 있는 친구들, 전 직장 동료들에게 연락해서 2월에 일본을 방문할 것이며 일본에서의 커리어에 관심이 많다고 하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러고 나서 2월 중순에 박준성 파트너와 함께 1주일간 일본에 거짓말처럼 출장을 가게 됐다. 박준성 이분은 일본에서 본인이 하는 다양한 미팅에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나를 데려가 주기도 했고 (이분은 일본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해서 일본어가 정말 유창했다), 가난한 내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호텔방도 셰어 하고 밥도 다 사주고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에게 잘해줬다. 어지간히 낯이 두꺼운 나로서도 진짜 이 정도로 인텐스 하게 누군가에게 단기간에 도움받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경험한 일본은 진짜 진짜 재밌었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이었다. 두부 하나를 썰어도 한 10년 썰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미국에서 스타트업 쪽에 한 5년 정도 있었는데, (MBA 시간들까지 하면 거의 8년) 이제 한번 더하면 이 분야의 나름 전문가는 되겠구나. 하지만 일본에 가보니 왜 아시아에 오라고 했던 건지 느낄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미팅들을 가졌고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는지 소개하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왜 일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일본에서 영어 하는 외국인 직장인으로 사는 것의 장단점에 대한 내 생각을 소개한다.
Why Japan
1. 일본 기업/기술의 글로벌화 에는 upside, undrealized assets, potential 이 크다.
- 산업적으로 - 일본에는 원천기술이 많은데 완제품/브랜딩 + 글로벌 플레이가 부족해서 저평가
- 인구적으로 - 글로벌화되어있는 언어와 문화를 이을수 있는 인재가 많지 않다.
2. 일본과의 관계는 한국의 미래다.
- 한국은 앞으로 일본과의 원활한 협업이 계속 중요해질 것이다. 한국의 산업구조를 볼 때 대만처럼 일본의 인프라를 잘 활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콜레스테롤이 쌓인 기업이 많다. 이런 기업을 한국이나 대만이 인수해 일본을 자극한다면 서로 ‘윈윈’하는 거다. 일본의 선례에서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나라지만 또 매우 서로 잘 모른다.
3. 일본은 언어/문화적으로 한번 해볼 만한 시장이다.
- 중국의 경우 외부에서 뚫고 오기 쉽지 않다. 언어도 그렇고 외부인으로서 한국어/영어 한다고 레버리지가 많지 않다.
- 일본은 선진 사회로 외부 인력에 열려있고, 글로벌 인력에 대한 목마름이 크다. 언어/문화적으로 해볼 만하다. 라인 같은 회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 동남아는 꽌시, 화교, 가진 자가 꽉 잡고 있다.
- 미국에선 unique 해지기 어렵다. 창업을 해서 성공하거나 하지 않으면 적당한 employee가 될 뿐이고 한국만 가지고선 미국에서 레버리지 할게 많지 않다.
4.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 난 기술, 사람, 자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40-50대에 이를 연결하는 VC or PE가 하고 싶다.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 영어 하는 한국인이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살기에) 좋은 점과 나쁜 점
좋은 점
- 시장이 크다
- 영어 하는 expat에게 기회가 많다. 한국/일본을 같이 보는 APAC manager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꽤 있다. 일본 사람은 영어와 진취성에서 한국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 음식이 맛있다. 문화가 너무나 수려하다.
- 사람들이 선진시민이다. 일하는 거나 배울게 너무 많다.
- 한국이 가깝다.
나쁜 점
- 시장 변화가 느리다. 일본 기업에서 올라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 글로벌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이 나오기 어렵다.
- 외롭다 사람들이 아주 마음을 열지는 않는다
- 돈을 많이 받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