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 Baek 백산 Apr 01. 2020

한 대한민국의 남성의 편지 - 미처 몰랐습니다.

N번방 사태에 부쳐

대한민국의 남성분들께


안녕하세요. 이번 N번방 사태에 부쳐서 대한민국 남성의 한 사람으로서, 동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남성분들께, 제 친구분들께, 제 이웃들께, 용기를 내어 사랑과 존경과 희망의 마음을 담아 이 편지를 드립니다. 


먼저 간단히 제 소개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 나이 38살에 두 아이 (곧 세 아이)의 아빠가 되는 대한민국 남성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습관적인 인터넷 음란물 시청이나, 자극적인 사진을 인스타그램 등의 미디어를 통해 보는 유혹에 계속 빠져들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드리기 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방비로 잘못된 성문화에 노출됐습니다


여느 제 주위 친구들과 다름없이, 전 초등학교 고학년 때 처음 음란물을 접했고, 중학교 때부터 상습적으로 이걸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적 욕구가 불붙듯 끓어오르는 사춘기에 접한 음란물의 세계는 너무도 자극적이었고, 그 유혹에 빠져서 습관처럼 계속 음란물을 봐왔습니다. 학교나 세상에 나서면 남성으로서의 나의 위치가 늘 불안정한데, 인터넷 세계에선 늘 내가 원하는 자극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달콤했고, 그 유혹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제가 접한 사회는 이런 것 - 다른 여성을 나의 성적 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 이 큰 잘못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성을 즐기는 게 자연스럽다고 가르쳐 줬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반 유혹반으로 다양한 것들을 기회가 될 때 큰 죄책감이나 부담감 없이 접해봤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그것들이 아주 기분 좋았던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가서 술 먹고 뭔가 왁자지껄한 분위기 안에 취하고 할 때는 자극적이었지만, 끝나고 나면 그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저도 그러려니 여기게 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배우고 접한 성은, 저로 하여금 성욕이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성욕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그걸 해결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성욕이 생기면 한 번씩 인터넷으로 욕구를 풀고, 그러면 또 다른 일에 집중하면서 정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게, 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용기를 내어 고백하건대 제게는 제가 성적으로 상대를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늘 있었습니다. 아마 인터넷 음란물을 접하며 나도 모르게 생긴 부담감과 비교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이게 공짜가 아니란 걸


이 모든 것은 별것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일부 이런 문화를 탐닉하는 사람에 비해서, 전 혼자서 인터넷 음란물은 볼지언정 그이 상의 행동은 크게 좋아하지도 않고 거의 하지도 않으니 남보다 낫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인터넷 음란물을 보는 것도 언제든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전 정상적인 삶을 살고 가정을 꾸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인터넷 음란물을 제 삶에서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준비해서 맞이한 결혼생활 처음에 경험한 성생활은 이제껏 제가 알던 것과 너무 달랐습니다. 더 이상 성은 나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아내의 사랑과 헌신 앞에 상대방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졌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막연한 부담감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하듯이, 대화하면서, 상대방을 위하고 하나 됨을 경험하는 성은 기존에 제가 경험했던 그 무엇과도 달랐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짝퉁 명품만 써보다가 진짜를 경험해본 것, 늘 인터넷으로만 하와이 사진을 보다가 직접 하와이를 가본 것 같은 느낌, 진짜를 확실히 알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중독은 여기서 끝나고 앞으로 꽃길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평온했던 기간도 잠시, 아내가 첫째애를 낳고 하면서 쉽지 않은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성적인 인티머시 - 하나 됨을 원했지만 아내는 아이 보느라, 변한 몸을 추스르느라, 힘들어했습니다. 성적인 만족을 통해 삶의 수많은 스트레스를 푸는데 익숙했던 저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원치 않는 아내가 괜히 밉기도 했고, 그런 스트레스와 미움이 제가 다시금 인터넷 음란물에 빠지게 하는 합리화가 됐습니다. 


몇 년을 참다가 다시 접한 인터넷 음란물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습니다. 마침 아내도 잠자리 생각보다는 잠이 더 절실한 상태라 핑곗거리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의 잘못된 성을 소비할수록, 현실의 성은 더 큰 ‘일'이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론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분명 이건 저희 부부관계에, 그리고 저의 내면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내 이외의 여성으로부터도 (그것이 인터넷이라 해도) 성적 만족을 얻을 때면, 아내를 표면적으로는 사랑할지언정, 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로맨스의 사랑으로 대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제가 굳이 시도하지 않으니 성관계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던 적도 있고, 아 이러다 보면 그 말로만 듣던 ‘섹스리스' 부부가 남의 일이 아닐 수 있겠다는 경각심도 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여성을 성적 상품으로 본 것은 제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고, 주위에서 접하는 보통 여자들도 나도 모르게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스스로에 놀랐고 맘에 들지 않았지만 제맘대로 잘 제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몇 달씩 참다가도 한 번씩 아내와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하면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생기면 다양한 내면의 핑곗거리를 만들어가며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막 태어나 자라나는 어린 딸을 보고, 사랑하는 아내의 잠든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를 다독이고 마음을 강하게 먹으며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고자 했지만 그건 참 쉽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마치 몸속에 깊숙이 박힌 내장지방을 제거하는 것처럼, 20년 가까이 반복해온 습관을 빼는 건 그다지도 어려웠습니다. 그 어떤 결단보다 더 힘들었고 더 많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재작년부터 같은 중독에서 고생하다가 자유로워진 친구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와 격려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패해도 끝까지 믿어주며 위로해주고 사랑해준 분이 있어 그분의 따뜻한 보살핌과 격려 안에서 점점 더 인터넷 음란물을 멀리할 수 있었고, 작년에서야 드디어 중독의 터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여자 사진을 보고 있지도 않고, 아내나 딸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고, 무엇보다 여기에 쏟았던 에너지와 시간을 더 제 주위를 사랑하는 데에 쓸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지긋지긋했던 중독의 끝에서 어렵게 찾은 자유를 이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냐고요? 제가 당신과 같은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임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의리라는 허울에 이끌려 유흥업소도 가보고, 어렸을 때 접한 음란물을 결혼 후까지 보고, 그러면서도 아주 멀쩡히 사회생활하고, 아주 멀쩡히 살았던 보통 대한민국 남자임을. 그리고 이게 저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 - 그것이 드러났든 드러나지 않았든 - 을 초래했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음란물을 제 삶에서 끊어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성을 가꾸어 가는 게 이다지도 어렵고 힘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N번방 사태와 나


대한민국 남성 여러분, N번방 사태 어떻게 보셨는지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셨는지요? 아니면 조주 빈에게 돌을 던지고 분노하셨는지요? 그렇지만 나는 이런 변태적인 것들은 보지도 가담하지도 않는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셨는지요? 


잠깐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아시는지요? 백인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뺏기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전 세계가 흑인 인권을 해방시켰지만 남아공의 백인들은 자기들의 사정은 다르다며, 과거와 비교해서는 흑인의 인권이 많이 나아졌다며 억지 합리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파 타이로 감추어진 흑인들의 삶에 관심도 제대로 기울이지 않고 본인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본인들의 기득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내면 깊숙이는 이게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소극적으로 동참하거나 침묵했습니다. 아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몰랐거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성문화는 이런 사회적 부조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노예제도,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 기득권 세력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관습과 제도로 옥죄 멘 역사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사회적 부조리는 일부 이를 주도하고 선동하는 소수의 선동자들과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방관한 대다수의 대중에 의해 재생산되고 세습되어 왔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성문화는 인종차별과 같이 더 제도화되어 있고 직접적인 계층 탄압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관습과 문화란 이름으로 여성의 존엄성과 인권을 낮추고 여성의 이미지를 왜곡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성문화는 분명 이런 사회적 부조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성문화가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지표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2020년 기준, 한국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서 조사국 153개국 중 108위를 차지했고, 특히 경제활동 참여기회나 (127위), 정치적 권한 (79위)에서 하위권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의 성매매시장규모가 세계 6위권이란 연구결과와, 성인 남성 두명중 한 명이 성구매 경험이 있다고 답변한 설문도 있습니다. 비단 이런 지표가 아니라도 강남역 인근 윤락업소를 찾으면 걸어갈 곳에 수십 건의 검색 결과가 나오는 현실, 버닝 썬과 N번방 같은 사건이 매년 터지는 사회는 분명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부끄러운 감출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나는 조주빈 같은 사람과는 다르다고. 나는 보통 사람일 뿐이라고. 맞습니다. 분명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범법을 저지른 성 착취 범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성을 소비한 일반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범죄자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과, 처벌기준 강화와, 모든 관련된 법적 조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곡된 성문화에 침묵한 대중에게는 과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잘못된 남성문화에 젖어들거나, 소극적으로 동조해 살고 있을 때, 아니면 침묵해 왔을 때, 우리는 이를 용인하고 재생산하고 있었던 게 아닐지요? 그리고 이 삐뚤어진 성문화가 곪고 터져서 버닝 썬 사태, 조주 빈과 N번방 같은 일들이 발생한 것이 아닐지요? 과연 엄격한 법집행 만으로 제2 제3의 N번방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요?  


대한민국의 눈물과 분노, 그리고 아픔 


대한민국 남성 여러분, 대한민국 여성의 눈물과 분노가 보이시는지요? 느껴지시는지요? 어떤 사람들은 소위 말해 ‘악에 받혀' 있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쳐있고, 어떤 이들은 이제 무감각해져서 지키고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미투 운동이나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서운 칼을 빼들고 나오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나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기에. 너무나 진저리 나기에. 이들의 분노는 이제 극에 달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은 이제 유훙업소에가고 음란물 보고 성비하적 발언을 하거나, 그렇게 말은 안 해도 그 문화에 젖어 들어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진절머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아이를 낳기를 거부하고 이런 남성문화로 대표되는 명절이나 전통적인 직장 회식을 몸서리치게 싫어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독을 품고 있습니다. 또 많은 여성들이 병들어 있습니다. 쉬운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 가는 여성도 있고, 자기의 외모에 자신감을 잃고 의기소침하여 살고 있는 여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도 병들어 있습니다. 성을 상품화하고 여성을 성적 만족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문화에 어렸을 때부터 젖어 들어서,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여성을 외모로 판단하고 점수 매기고 놀리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혐오와 억울함과 지배욕을 배우고, 음란물을 통해 그걸 분출하며 키우고, 그러다가 제2 제3의 조주 빈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관점으로 자기의 겉모습을 보도록 주입받은 어린 여학생들은 본인의 겉모습에 자신감을 잃고, 일부 청소년들은 스크린 앞에서 별다른 죄책감 없이 음란한 행동을 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들이 본 대한민국 사회는, 기성세대는 어떤 모습일지요. 과연 우리 사회는 이런 중고등학생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상황일지, 자라나는 세대에게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습니다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한국의 성문화가 이다지도 병들어 있음을. 정상이 아님을. 저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위에서 말씀드린 제 부끄러운 경험 - 인터넷 음란물 중독이 제 결혼생활과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걸 극복하는 게 얼마자 어려웠는지 -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자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유독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본인의 겉모습에 극도로 신경을 쓰고, 자신이 없고, 표정이 다 매한가지인 것을 느꼈습니다. 부부간 성을 소중하게 가꾸어 가기보다는 섹스리스가 되고 심지어는 그렇게 멀어진 부부관계로 이혼까지 이르는 것을 흔치 않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닝 썬 같은 사태부터, 25살 남성에 의해 자행된 N번방의 내용을 접하면서,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과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이렇게까지 갈 줄은 정말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의 소극적 동조는, 또는 침묵은 절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병들어 있고 한국의 가정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비방하는 글을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합계출산율 0.98 (2018년)로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그리고 이런 병든 사회는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비용과 아픔을 - 그것에 줄어든 출산율에 의한 경기 둔화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든, 아내와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명절 때마다 너무 머리가 아프거나 직장에서 여자 동료나 직원을 대할 때 편안히 대할 수 없어 거리를 두게 되는 거든, 아니면 우리 자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문화에 더 깊이 빠져들고 희망을 잃고 자신의 겉모습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거나 음란물 중독에 빠져버리는 - 초래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도 다 똑같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자란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인터넷 음란물을 접하고 지금도 가끔 소비할지언정, 대다수는 훨씬 더 양성화된 성교육을 받고 성이 자연스운 문화권에서 자라면서 무엇이 아름다운 성이고 무엇이 왜곡된 성인지 구별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음을 보았습니다. 유럽 출신 친구들은 아이 출산 장면을 생생하게 봄으로서 - 동영상으로든, 동생 출산 시에는 형/누나를 꼭 참석시켜서 - 성의 아름다운 부분, "생명인 성"을 접하고 인식하며 자란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대다수의 친구들은 여성이 나오는 유흥업소에 가보지도 않았고 그런 문화를 경험해본 적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무엇이 아름다운 성이고 무엇이 삐뚤어진 성인지 배웠더라면?? 만약 우리가 처음 술집을 갔을 때, 그 행동이 매우 부끄러운 거라는 걸 배웠다면? 사회의 리더서부터 솔선수범하고 존경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의 방관자나 소극적 동조자가 되기 전에, 은연중에 이 잘못된 문화에 속수무책으로 젖어들고 이걸 끊어낼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음 시대의 성문화


저는 절대로 지금 정죄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전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전 감정을 끌어올려 억지 주장을 피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버닝 썬과 N번방과 수많은 성적 범죄를 낳고 있는 이 시대의 성문화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할 뿐입니다. 전 잘난 척을 하거나 위선을 떨거나 오버를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전 아무런 숨겨진 정치적 의도나 다른 의도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전 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N번방에서 많은 남성들이 환호하고 서로 경박하게 웃는 사이에 죽어간 여성들에게 가슴 깊이 죄송한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부담감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이 잘못된 성문화에 침묵으로 동조하거나 방관한 많은 한국 남성분들도 이 시스템과 문화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진 성상품에 길들여져 있는 사이, 가정이 흔들리고 점점 더 갈곳 없이 더욱더 이런 성상품에 빠져들어가고 있거나, 잘못된 것은 알지만 별다른 대안도 없어서 침묵하고 있는 동시대 남성분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며 눈물 흘리고 손 내미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 사랑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드립니다. 안 그래도 많이 힘드시죠? 경제도 어렵고, 사회도 혼란스럽고 이것저것으로 참 만만치 않은 시대를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제 편지가 버거운 삶에 괜한 부담이 되고 껄끄러운 가시처럼 목에 걸리지 않을지 많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이 혐오와 불신과 아픔의 고리를 끊는 열쇠가 있다면? 만약 우리의 작은 선언이, 작은 손길이, 작은 의지가,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이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와 문화를 만드는 첫걸음이 된다면? 그래서 우리 남성들이 여성들을 감싸 안고, 우리는 손자 손녀와 함께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들의 이런 노력을 후대에 기린다면? 우리 어린 세대들이 우리의 이 각성으로 변화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의 작은 각성과 결단이 모여서 사회의 아픔과 분노를 녹이는 시발점이 될 것을. 대한민국 길거리에 유흥업소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날이 올 것을. 성추행적인 발언을 하는 남자들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회복하는 날이 올 것을. 대한민국 여성들이 본인의 겉모습에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아이처럼  웃으며 때로는 재밌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인스타그램 맘껏 올리는 날이 오기를. 삐뚤어진 비즈니스 접대문화가 사라지고, 가정이 회복되기를. 대한민국이 남녀평등과 상호 인권을 존중하는 수많은 척도에서 세계에 모범을 보일 수 있기를.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게 본인의 외면보다 내면을 더 돌보며 자라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세계는 전대미문의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염병에 두려움에 떨며, 한국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성공적인 대응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생충과 BTS로 대표되는 한류에도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N번방 사태는 이번 주 더 이코노미스트지 기사, 뉴욕타임스 기사로 소개되기도 한 한국의 감출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과연 우리는 세계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요? 지금이 기회입니다. 우리는 IMF도, 경제위기도 극복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세계를 놀라게도 했습니다. 이제는 싸움을 멈추고 이 잘못된 문화에 종식을 선언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할 때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호소합니다. 촛불을 태극기를 들고 불의에 항거하는 대한민국 남성의 가슴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세계 최초로 민중의 힘으로 일궈낸 저력의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우고 객관적인 눈으로 현상황을 다시 보기를. 어떻게 이지경까지 되었는지 깜짝 놀라기를. 이번 조주 빈으로 대표되는 N번방 사태는 전태일의 분신자살, 4.19 의거를 불러일으킨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한 것, 촛불에 의한 하야를 일으킨 최순실 사건과 다르지 않습니다. 병들만큼 병든 잘못된 문화가 조주빈이란 괴물을, N번방이란 수치스러운 범죄를 낳았습니다. 지금 이 잘못된 문화를 우리 세대에서 끊어내지 않으면 제2, 제3의 N번방은 계속되고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는 한국사회는 더욱더 뼛속까지 병들어 죽어갈 것입니다. 


저는 초대합니다. 저는 도움을 요청합니다. 용기를 내어 주시기를.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꺼번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때론 엄청난 일들의 시작은 작은 결단에서, 작은 선언에서 비롯되었음을 봅니다. 여성을 착취하고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아동 청소년 음란물을 비롯, 불법 음성 음란물과 여성을 돈을 주고 소비하는 성문화의 실체를 이제는 드러내고 인지하고 이야기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어둠이 빛에 나오면 사라지듯이, 숨기고 애써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치부도 드러내 놓고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할 때 건강한 문화로 탈바꿈할 것을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남성분 모두를 ‘#미처몰랐습니다’ 운동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글이 작은 울림이라도 되었다면 이 글을 공유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미처몰랐습니다 함께 미처 몰랐던,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그 어떤 이야기든 좋습니다. (아래 사례를 몇 개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를 여러분 주위의 친구분, 지인 남성분께 셰어 해주세요. 사랑과 진정 어린 마음을 담아, 한 명이라도 태그하고 ‘#미처몰랐습니다’ 운동에 참여를 독려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희망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마칩니다. 


부록 1 - #미처몰랐습니다 사례 


#미처몰랐습니다

무심코 습관처럼 보는 음란물이 나의 폭력성을 키우고 나와 배우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를 갈라놓고, 심지어는 성산업 전반을 키우는데 일조했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도록  마약중독과 똑같은 방식으로 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미처몰랐습니다

옛날에 여성 친구에게서 아침에 택시를 타면 안경 쓴 여자가 첫 손님이라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성차별적 문화가 만연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미처몰랐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산업이 이다지도 크고 전 세계 적으로 봤을 때에도 심각한 수준이란 걸 몰랐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많은 경우 우리보다 훨씬 더 건전한 성을 접해왔다는 것도 미처 몰랐습니다.  

#미처몰랐습니다

조카의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어느 새부터 계속 겉모습에 신경 쓰고 사진 찍기를 거부하고 늘 보정된 모습만 온라인에 올리며 마음 졸이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 때문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록 2 - 한국사회의 성문화에 대한 지표   

한국사회의 성문화에 대한 지표

    세계경제포럼(WEF)이 2020년 발표한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153개 조사국 중 108위. (World Economic Forum,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 

미국 암시장 전문 조사기관 하보스코프 닷컴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2015년 기준 120억 달러로 세계 6위 (Black Market Economy across the Globe, Havoscope, 2015), 한국 형사정책연구원은 하보스코프 닷컴의 추산치의 3배에 달하는 30조 원 이상 규모일 것이라고 추정 

여성가족부 2016 성매매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남성 1050명 중 50.7%(532명)가 "평생 동안 한 번 이상 성구매 경험"을 '있다'라고 대답 (단 이 통계는 설문조사의 신뢰성이 확실하지 않은 국가 비승인 통계)

글로벌 섹슈얼 헬스케어 기업 텐가 (TENGA) 조사 결과 한국성생활 만족도 세계 최하위권: 40.7점, 조사대상 18개국 중 17위 (2018)

동기관 2019년 조사 결과 성관계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한국은 65.8%, 조사대상 세계 9개국 중 2위를 차지 (2019)

포르노(인터넷 음성 음란물)의 비용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 (아래에 나온 모든 연구결과가 이 자료에 소개)

포르노를 볼수록 성빈도가 떨어지고 성생활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연구결과

포르노가 마약과 똑같이 뇌를 변화시키고 중독시킨다는 연구결과 

포르노가 개인을 더 외롭게 만들고 실생활에서의 관계를 해친다는 연구결과 

포르노가 아내나 상대 파트너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 

포르노가 아동 성인 신매매를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지 성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구별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 

포르노 소비가 폭력성향을 부추긴다는 연구결과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사회적 지위는 레벨이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