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침울한 육성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가라앉듯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는 일제의 항복 선언이었다. 해방의 희소식은 곧바로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로 전해졌다. 거리로 뛰쳐나온 뜨거운 만세 함성 속 가슴 벅찬 조선 독립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5년 9월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소련의 남하에 맞서 한반도 남쪽으로 진주해 미 군정을 설치한다. 뒤이어 한반도 주변 강대국 간 헤게모니 쟁탈전과 정부 수립을 둘러싼 국내 정치세력 간 이념투쟁이라는 거센 소용돌이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해방, 미 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풍랑은 광주 지역 문화 산업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곧 광주극장을 또 다른 변모의 시기로 접어들게 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광주극장은 과거와 다른 영화 상영작 흐름에 큰 변화를 겪는다. 해방공간 시기 미 군정 당국의 영향력 아래 중앙영화배급소를 거쳐 국내에는 대량의 양화 수입과 배급이 이뤄졌다. 미 군정은 양화를 매개로 미국의 문화적 우위성을 한국인들에게 체득시켜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이는 미 점령 정책에 순응토록 의도한 것이었다. 미 군정의 영화정책은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후반 방화 제작이 활발해져 한국 영화 중흥기로 접어들었던 시기까지 그 흐름이 면면히 이어졌다. 잠시나마 광주극장이 민족적인 색채의 방화보다 양화 중심의 상영을 이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반면 해방이라는 자유의 물결 속 대중 집회와 연희의 공간이란 측면에서 광주극장은 이전보다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해방 이후 광주극장은 대단위 인원 수용이 가능한 실내 극장 시설을 맘껏 활용해 새로운 자주 국가 건설을 모색하는 정치적 집회와 각종 사회단체 모임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대표적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과 18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위원회와 광주청년단 결성식이 광주극장에서 각각 열린다. 1946년 1월 10일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지지대회와 1948년 10월 1일 백범 김구가 참석한 전남 삼균학회(三均學會) 학사(學舍) 개소식도 성황리에 거행된다. 광주극장은 민족의 미래에 한줄기 빛을 밝히며 시대적 의제를 가감 없이 논하는 공론의 장으로 자신의 품을 기꺼이 내어 놓았다.
광주극장은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각종 문화공연과 체육행사도 빈번히 개최한다. 대표적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5일, 광주·전남 국악인이 대거 참여한 해방 기념 축하 대공연 <대홍보전>이 펼쳐졌다. 일제 징용과 근로정신보국단 동원 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주관객이었다. 광복 후 최초의 공연단인 광주성악연구회 소속 박동실·조상선 등이 출연했다. 공연 말미에는 <해방가>가 울려 퍼져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1946년 4월에는 극단 ‘백화’의 <최후의 승리>와 광주 YWCA 및 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주관한 <안중근사기>를 필두로 민족적 색채의 연극·악극·국극 공연도 꾸준히 막을 올렸다.
1948년에는 문춘성 권투 시범 경기와 같은 체육행사도 이뤄졌다. 문춘성은 광주 수기동 출신으로 일본 권투계의 우상 호리구찌(堀口)를 KO로 누르고 일본 미들급 챔피언을 거머쥔 당대 스포츠 스타다. 귀국 후 일본인을 누르고 정상에 우뚝 선 자랑스러운 모습을 고향 사람들 앞에서 신고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광주극장은 각종 공연과 체육행사를 통해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투사의 정신을 기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과 강인함을 널리 일깨웠다. 광주극장은 해방 이후 더욱 빛을 발하며 극장 이상의 높은 역할과 위상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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