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극장에 울려 퍼진 평등과 평화의 정신(최종)

by 선재




광주극장은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깊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48년 10월 1일 백범 김구가 참석한 가운데 전남 삼균학회(三均學會) 주관 학사(學舍) 개소식을 이곳에서 개최한 것. 이는 행사에 참석할 수많은 인파를 고려해 협소한 학사(學舍) 공간 대신 광주극장 대관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날은 광주극장이 개관한 지 정확히 1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행사를 주도한 삼균학회가 배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념은 삼균주의(三均主義)다. 삼균주의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조소앙 선생이 제창하고 김구가 지지하며 체계화된 사상이다. 삼균(三均)은 개인 간, 민족 간, 국가 간 균등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의 실현을 통해 삼균을 이뤄 세계 일가(世界一家)의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주의 색채를 근간으로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익 사상을 모두 포용했다. 또 독립운동 기본 방책이자 임시정부가 그리는 국가 건설 청사진을 제시했다. 1930년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삼균주의를 정강으로 채택했다. 이어 194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에 삼균주의를 반영했다. 삼균주의는 단순히 독립 투쟁 이념을 넘어, 해방 후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주요 사상 중 하나였다.



개소식 전날인 1948년 9월 30일, 백범은 호남행 열차를 탔다. 이윽고 송정역에 도착,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광주로 들어섰다. 다음날 오전 10시 백범은 광주극장을 찾아 축하 연설을 한다. 그의 참석은 정치적 기반인 한국독립당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또 남북협상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좌절된 절망을 극복하고 교육의 균등을 통해 우리 젊은이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는 바로 수십일 전인 1948년 8월과 9월에 제헌 선거를 거쳐 남북한이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개소식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투사 백범이 연설을 통해 훈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金九, 全南三均學舍 개소식에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연설



전남삼균학사 개소식은 지난 10월 1일 오전 10시 광주극장에서 민족의 지도자 白凡 金九 선생 및 金學奎 장군을 맞이하여 장내 외에 운집한 군중 참석하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식은 식순에 따라 국기 경례, 순국열사에 대한 묵상, 애국가 봉창에 이어 申基彦 씨의 개식사에 이어 장내 외를 물샐틈없이 모여든 군중의 박수갈채리에 등단한 노투사 김구 선생은 마이크 앞에 서서 요지 다음과 같은 훈화를 하여 수만 군중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은 三均主義로서 오직 남북통일국가를 건설하자는 젊은이들의 도장에 참례한 것이다. 다 같이 단군의 피를 받은 우리의 배달민족은 지금 분열된 남북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남북통일을 갈망하고 있다. 조국을 바로 찾자는 힘찬 젊은 동지들이여! 우리는 총칼보다 더 무서운 무장을 해야 한다. 총칼보다 더 무서운 무장이란 즉 정신무장이다. 총칼을 무서워하지 말라. 총칼보다 더한 정신무장이 있다. 정신무장을 가진 민족은 향상하는 빛난 민족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은 민족은 향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조선에 돌아와서 중국에서 걱정하기보다 우리 민족이 어떠한 다른 동양인보다도 동방예의지국의 사람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을 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절개 생활에 대하여)

(中略)

현재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UN 총회가 실로 세계 인류에게 복을 줄 것인가, 해를 줄 것인가? 결과는 극히 우리로서도 주목될 바 있다.

(中略)

38선은 외국 군대가 군사상의 필요상에 의하여 조선을 해방시켜 준다는 미명으로 마음대로 만든 선이지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떠한 신사들은 간혹 군대 10만 명만 양성하면 북조선을 정복시키고 남북을 통일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한 사람이 우리 민족의 반역 도배가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의 총칼로 우리의 아버지, 아들, 손자들을 죽인단 말인가?”

(中略)

열분한 혁명가의 훈시의 한 마디 한순간에 수만 군중은 울었다 웃었다, 만세의 고함을 치다, 군중의 박수갈채 속에서 훈시를 마친 선생의 얼굴, 흥분된 붉은빛이 아직 개이지 않았다. 이어 김학규 장군의 삼균주의 연혁 설명, 내빈 축사가 있은 다음 舍生 대표의 답사가 있자 극장이 무너질 듯 힘차게 부르짖는 남북통일정부수립만세 삼창으로 폐회하였다. - 해남신문 1948년 10월 2일 -



백범은 연설을 통해 시종일관 남북통일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유구한 역사 속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온 문화민족의 자긍심으로 우리 젊은이에게 총칼보다도 더 강한 정신무장을 피력했다. 강인한 정신무장이 함께한다면 우리 민족이 장차 남북통일의 염원을 넘어 향상(向上) 하는 빛난 민족이 될 거라 확신했다. 또 백범은 한국전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무력 통일은 기필코 반대했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지금에도 백범의 평화통일 정신은 민족의 비극을 막는 불변의 통일 대원칙 중 하나로 우리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문득 당시 극장 안 모습을 상상해 본다. 홍조 띤 얼굴로 격정에 찬 백범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이크를 타고 객석을 향한다. 청중들은 이목을 집중한 채 한껏 몰입한다. 연설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극장을 가득 채운 남녀노소의 가슴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요동친다. 이윽고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 속 훈시는 마무리된다. 마지막 순서로 힘찬 '남북통일정부수립만세' 삼창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운다. 극장이 무너질 듯 울려 퍼진 뜨거운 만세 삼창은 극장 문을 넘어 충장로 거리 거리로 메아리친다. 평등과 평화의 정신을 호소하며 대한민국이 나아갈 진정한 길을 알린 날을 광주 하늘은 잊지 않고 기억할 터였다.



광주극장은 한국전쟁 이후 격변하는 현대사 속에서도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꿋꿋이 이어 오고 있다. 먼저 1968년에는 극장 내 도난 사건 탓에 발생한 대화재로 극장 건물이 전소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복합 상영관(multiplex)이 등장하면서 대형 상업 자본에 밀려 관객 수 급감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 1998년에는 광주광역시교육청으로부터 학교보건법 위반으로 극장 폐쇄 명령을 받고 이를 불이행해 2001년 검찰에 고발되는 불상사를 맞았다. 폐쇄 명령 사유는 극장이 학교보건법상 유해시설로 15m 안에 유치원이 소재한다는 것. 하지만 2004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승소해 영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2년부터는 영화진흥위원회 주관 사업 지원을 받아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변모했다. 이후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 독립영화, 제3세계 영화 등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광주극장이 상업적 위기 속에서도 나름대로 정체성을 지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내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2016년에는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바뀌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사전 심사를 통해 선정한 예술영화를 일정 부분 의무적으로 상영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극장은 이 방침을 ‘사전검열’이라 보고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사업 신청을 포기했다. 또다시 광주극장은 재정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광주극장은 정기후원회원 모집을 통한 자발적 후원금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하지만 일부 보조금과 후원금만으로는 극장 재정난을 버텨내기에 힘이 부친 상황이 이어졌다. 이 소식은 관할 지자체인 광주 동구청에도 전해졌다. 구청은 광주극장 지원을 위해 발을 벗고 나섰다. 2023년 7월부터 고향사랑기부제 지정 기부 모금사업으로 '광주극장 100년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청은 지정기부금을 극장 보존과 시설 개선에 투자해 더 많은 관객이 다양한 독립·예술영화를 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00년 극장 꿈을 응원해 주세요'라는 슬로건 아래 시민들로부터 모은 기부 정성이 지자체를 거쳐 극장의 역사와 정신을 지켜 나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현재 광주극장 내부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순사들이 극장 동태를 살피고 영화 속 항일 내용을 검열했던 '임검석(臨檢席)'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임검석은 일제 탄압의 상징적 공간이다. 해방 이후 일제의 잔재로 임검석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저항의 역사이자 일제에 의해 자행된 아픈 상흔을 증거하는 기록으로 보존을 결정했다. 광주극장 안에는 대한 독립을 향한 소리 없는 항거의 목소리가 오늘날까지 눈에 보이는 듯 남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광주극장 무대 위에는 노구를 이끈 백범이 투사로 서 있었다. 그가 연설을 통해 그토록 염원했던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적 남북통일은 오늘날까지도 미완의 꿈으로 이 땅에 남아있다. 하지만 영화 관람을 위해 광주극장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극장 한편에 백범이 방문한 인연과 그의 정신을 담은 역사적 기록물을 전시해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문화국가를 표방했던 백범의 사상과도 맞닿는다. 장차 광주극장을 진정한 지역 문화 예술의 전당이자 깨어있는 지성의 교류 공간으로 올곧게 지켜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90여 년 개관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보물 광주극장. 오래전 극장 안에 울려 퍼진 백범의 평등과 평화의 정신을 기억하듯 다가올 광주극장 100년 꿈이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일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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