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임동에 위치했던 전방(옛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1990년대 이후 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밀려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으로 내려앉기 전까지 광주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였다. 지금도 방직공장이 자리했던 인근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여공들이 저렴한 월세로 자취하던 달동네 발산마을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현재는 젊은 예술가들이 마을살이로 모여드는 ‘발산창조문화마을’로 재탄생했다. 또 마을 앞쪽으로는 광주천 사이로 발산마을과 방직공장을 연결해 출퇴근로 역할을 담당했던 임시교량 '뽕뽕다리(공사장 안전발판을 엮어서 만든 다리)'가 기억을 부르는 듯 손짓하고 있다. 이는 1975년 홍수로 유실된 이후 48년 만인 2023년에 추억의 관광지로 복원한 것이다.
전방(옛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의 시초는 일본 미쓰이(三井) 자본 계열인 가네보방적(鐘淵紡績, 종연방적)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방적회사 가네보는 값싼 노동력 확보와 면화 조달이 용이한 조선 진출을 위해 1929년 광주 학동에 제사공장(명주실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후 1935년 임동 100번지 일대에 대형 전남공장을 준공하면서 광주를 대표하는 방적업체로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가네보방적(鐘淵紡績, 종연방적) 전남공장은 설립 초기 방적기 3만 5천추, 직기 1440대, 종업원 3천 명을 자랑했다. 이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가네보방적(鐘淵紡績, 종연방적)은 일제강점기 시절 내수 생산뿐 아니라 군수품 생산기지 역할도 담당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전투병을 위한 군복용 원단 생산이 주를 이뤘다. 방직공장 내부 현장 생산은 주로 여공들이 담당했다. 회사는 기숙사 제도를 십분 활용, 바깥세상과 근로자의 연결을 차단해 노동력 착취와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매일 12~14시간씩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월급은 7~9원으로 당시 20kg 쌀 2포대를 살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다. 조선인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또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근로자들이 질병과 사고로 죽어나가는 일도 잦았다. 이는 공장을 탈출하는 근로자까지 발생하게 했다. 지원자가 크게 줄어들자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로 꾀여 10살 전후 어린 소녀까지 강제 동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전시 동원 체제의 참혹한 현실은 육중한 공장 지붕 아래, 슬픔 가득한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인 공장관리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공장 운영은 어려워졌다. 위기 극복을 위해 공장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주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사명을 전남방직주식회사로 바꾸며 정상 가동에 힘썼다. 하지만 미 군정은 노동자들의 자치 운영 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방직공장을 적산으로 간주, 다시 회사를 정부 소유 ‘전남방직공사’로 전환한 것이다. 이어 관리 책임자로 미 군정 통역관 출신 김형남을 임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폭격으로 방직공장 대부분이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51년에는 정부의 적산 재산 불하 방침에 따라 김형남과 김용주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 전남방직공사를 인수했다. 이후 민영화 과정을 거쳐 1953년 가네보방적(鐘淵紡績, 종연방적)을 승계한 '전남방직주식회사'가 공식 설립등기 및 인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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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컨소시엄을 통한 공동 운영 체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경영노선 차이로 회사는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나뉘었다. 전남방직은 김용주가 일신방직은 김형남이 독자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방직공장이 분리된 이후 양 회사는 호기를 맞았다. 1970~80년대 정부의 지원 아래 방직산업의 대표적인 수출 일꾼으로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기를 이끌었다. 전성기 때는 무려 6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가 일했다. 이후 값싼 노동력으로 무장한 신흥국들의 거센 도전과 국가 주력산업 변경으로 섬유산업은 쇠퇴기를 맞았다. 2천 년대 들어서는 공장 설비 노후화와 각종 주민 민원으로 임동 공장 운영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광주 평동산단으로 이전했다. 두 방직공장이 이전한 터에는 복합 쇼핑몰 '더현대 광주'와 약 4,300세대 규모 주상복합단지, 특급호텔, 역사 공원으로 구성된 '챔피언스시티'가 조성될 예정이다. 일제의 수탈과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방직공장 옛 터가 과거의 아픔과 성장의 추억을 딛고 새로운 도약의 내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백범의 길을 따라 1948년 10월 1일로 돌아가 보자.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 삼균학사 개소식에 참석한 백범. 곧이어 경제분야 행보의 일환으로 전남방직공장 발전소를 시찰한다. 전남방직은 당대 호남 최대 제조공장이자 대한민국 경제 재건을 위한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백범의 방문은 해방 이후 열악한 생산 현장에서 공장 정상화에 기여하며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근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또 정치적인 자주 정부 수립 못지않게 장차 경제 성장을 통한 국가 산업의 자립 기반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행보였다. 백범의 공장 방문은 현재 기록 사진으로도 남아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장이 순조롭게 돌아가던 어느 해였다고 한다. 광주에 내려온 백범이 전남방직을 방문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정치한다고 해서만 애국이 아니다. 애국은 너희들이 한다"라고 극진히 근로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 시기가 1948년 방문 때였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의 지극한 사회적 약자 사랑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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