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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재 Aug 23. 2024

백화마을 그리고 백범의 마을


"그곳에서 환영과 강연을 마친 후 보성을 떠나 광주까지 가는 사이에 환영은 이루 언급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역로마다 수많은 동포들이 대기・환영하니, 어떤 날은 3,4차를 경유한 적도 있었다" 

[출처] 백범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416p


1946년 9월 24일 보성을 떠나 열렬한 환영 속에 광주에 도착한 백범. 첫 공식 일정으로 대성초등학교에서 열린 ‘김구 선생 환영 기념 강연회’에 참석한다. 연단에 선 백범은 광주 시민에게 중국에서 펼쳤던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린다. 당시 행사에서는 서민호 광주부윤(시장)의 환영사도 있었다. 서시장은 해방 후 광주에 급증한 귀국동포 전재민(戰災民: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언급한다. 그들 대다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징병·징용·위안부로 끌려갔다 귀환한 사람으로 극심한 생활고에 광주 학동 천변 갱생촌에 움막(토막집)을 짓고 거주했다.


전재민에게 각별했던 백범은 이 말에 감흥에 그간 여러 곳에서 정치후원금으로 받은 선물・해산물・육산물・금품 모두를 그들에게 사용해 달라고 희사한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희사 품목은 각지에서 받은 선물 약 40상자(광목・주단・지방 선물)로 광주부윤(시장)에게 맡겨 전재 동포에게 적당히 분배하도록 일임했다. 이는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탈옥해 광주 학동마을에 잠시 머문 인연도 작용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 광주에 도착하여 보니, 도처에서 동포들이 주는 각종 기념 선물・해산물・육산물・금품 등을 종합한 것이 차에 가득 찼다. 광주에 전재민이 많다는 말을 듣고 부윤(시장)을 초청하여, 다소간 전재민을 돕는 데 보태어 쓰라고 주고 광주 환영회를 마쳤다"

[출처] 백범일지/돌베개/도진순 주해/2002개정판/416p


고흥 출신 독립운동가인 서민호 광주부윤(시장)은 백범으로부터 일임 받은 희사품을 그 뜻을 살려 더욱 값지게 사용한다. 광주 유지들을 불러 마음에 드는 선물 하나씩 가져가게 하는 대신 자발적인 현금을 기부받은 것. 여기에 유지들의 웃돈까지 더해졌다. 이렇게 마련한 기금으로 전재민을 위한 마을을 조성한다. 공사는 1946년 시작해 1947년까지 1년여 동안 이어졌다. 마침내 학동 8거리 갱생촌 850평 대지에 4~4.5평 크기의 작은 건물 100여 가구가 들어선다. 약 400여 명이 입주했다.



소박하지만 안락한 보금자리로 꾸며진 이 마을의 이름은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로 ‘백화(百和)마을’로 이름 붙여진다. 지극한 동포애를 뜻하는 백범의 진심이 담겼다. 이렇게 조성된 백화마을의 가옥 형태는 조촐했다. 가구마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전부였다. 화장실은 공동 사용이었고 손수레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골목은 비좁았다. 한 지붕 아래 여섯 가구가 나란히 이어진 마구간 모양이라 해서 ‘말집’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옆집에서 소곤대는 귀엣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예로부터 학동은 무등산 줄기가 학처럼 내려와 앉은 구릉지라 해서 학마을로 불렸다. 유서 깊은 학동 880번지 일대에 조성한 백화마을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 유일 8거리가 있던 장소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1930년대 일제는 광주천 상류 직강화 정비 사업을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광주 천변 움막집에 살던 빈민들을 이곳 학동 갱생촌에 집단 정착시킨다. 정비 사업을 통해 발생할 부랑인이 범죄자로 변할 것을 우려한 허울좋은 이상촌 건설이었다.


학동 8거리 갱생촌은 중앙 광장(공동우물)을 중심으로 여덟 갈래로 뻗어 나가는 방사형 골목길 형태의 마을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여덟 갈림길은 다시 사방으로 뻗어나가 마흔 갈래  골목길을 이뤘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기하학적 형태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주민들의 강제 노역 동원과 감시를 손쉽게 하기 위해 팬옵티콘 형태로 만든 것이다. 팬옵티콘은 1791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을 말한다. 적은 수로도 다수를 감시할 수 있는 마을 감옥이 만들어진 셈이다. 또 학동 8거리는 일제가 욱일기 모양을 표현해 일본 제국주의 위상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욱일기는 일장기 붉은 태양 주위에 아침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형상화한 일본의 군기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있던 도시 빈민들은 열악한 주변 환경과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이웃끼리 서로 의지하며 따뜻한 정이 넘치는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 후 입주한 전재민에게로 이어져 백화마을 일대는 기쁨과 슬픔을 보듬고 나누던 서민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언제나 꽃을 피웠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70~8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와 치열했던 민주화 시대를 거쳐 점차 우리나라는 선진국 반열에 진입한다. 학동 8거리 일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백화지구 재개발사업과 학2구역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백화마을에는 1992년 165가구를 수용하는 백화아파트가, 학동 8거리에는 2011년 797가구를 수용하는 휴먼시아 2단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다. 일제가 만든 8거리는 이제 사진속으로만 남게 됐다.


지금 백화마을 일대에 옛 모습은 사라졌다. 아파트 이름에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뿐 원주민 대부분은 재개발된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했다. 그들은 수직으로 세워진 아파트 건물에 막혀 뿔뿔이 흩어졌다.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았던 정감 넘치는 달동네 마을 이야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전재민의 안타까운 사연도 백범 선생과의 아름다운 인연도 이렇게 소리 없이 잊혀 지는 듯했다.



2010년대 부터 백범 선생이 백화마을을 통해 이루려 했던 소중한 뜻을 되살려 이를 미래세대에 전달하려는 노력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도는 민관 할 것 없었다. 2012년 광주광역시와 동구청이 학동 1013번지 일대에 역사 공원을 조성한다. 학동 역사 공원은 백범 선생과 광주 백화마을을 기념하고 기록하는 테마공원이다. 김구 선생의 동상과 일대기, 휘호 기록판, 백화마을의 유래를 상징화한 말집 쉼터 등으로 구성됐다.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열망했던 김구 선생의 염원이 담겼다.



2015년에는 학동 역사 공원 바로 옆자리에 광주백범기념관이 들어선다. 백범 선생의 헌신적인 생애와 정치후원금으로 조성된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사연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 시설이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오랫동안 백범 선생의 광주사랑 정신을 선양하는데 앞장선 (사)백범문화재단이 국비, 지방비, 자부담 등을 합쳐 총 12억 4천2백만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자부담에는 기념관 건립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에 거액을 내놓은 석봉 최상준 남화토건 회장의 숭고한 뜻도 더해졌다. 기념관은 2014년 11월 24일 기공해 2015년 10월 26일 개관했다. 개관 일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6주년 기념일로 가슴 벅찬 날이었다.



현재 광주백범기념관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50-1-48)이다. 크게 전시실과 교육실로 나뉜다. 전시실에는 동선을 따라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김구와 가족,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일지, 해방과 환국, 김구 선생 생전 영상, 광주・전남 출신 독립운동가백범 김구와 전라도 인연, 서거와 추모 순으로 소장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교육실에서는 백범의 겨레와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교육 행사와 체험 활동이 연중 펼쳐지고 있다.



백범기념관은 전국에 단 두 곳뿐이다. 서울 효창동과 광주 학동에 각각 둥지를 틀고 있다.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이 소재한 효창공원 부근에는 백범김구묘역, 삼의사묘역(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임정요인묘역(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이 함께 위치하고 있다. 백범과 뜻을 같이 했던 독립투사들의 항일 정신과 숭고한 민족정신이 늘 푸른 나무처럼 백범 곁을 지키고 있다.


반면 광주에 위치한 백범기념관 오른편에는 지금은 사라진 백화마을 터에 조성한 백화아파트가 기념관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해방 후 귀환한 전재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한 백범. 그 소중한 인연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 다정한 모양새가 정감이 넘친다. 백범은 지방 순회를 다닐 때마다 정치후원금으로 받은 대부분을 현지 전재민을 위해 기탁하곤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 광주 사람들은 전국에서 유일한 백범의 마을을 만들었고 지방에서 유일한 기념관까지 지어 백범의 정신을 기렸다. 백범의 후원으로 백화마을은 탄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은혜만큼 값진 보답으로 광주는 백범의 정신을 오롯이 지켜나가고 있다.



학동 역사 공원 앞에 가면 학동 두루마을 안내 표지판이 서있다. 광주 동구 학동 주민자치회가 백화마을의 역사를 살려 함께 모여 행복을 키우는 두루마을로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학은 두루미과의 대형 조류로 학동의 상징이다. 학을 연상시키는 두루마을은 남광주 시장에서 옛 백화마을까지를 이른다. 천변을 따라 교통, 의료, 상업, 교육 등의 다양한 생활시설이 두루두루 잘 갖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자치회는 주민들이 직접 둘러볼 수 있는 이음길로 두루마을 한 바퀴 총 4개 코스를 개발했다. 그중 제3길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길'로 광주백범기념관부터 학동 당산나무까지 이어진다. 


학동 당산나무는 학동 8거리에 있던 수령이 90년 된 느티나무다. 더위를 피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논하던 쉼터이자 소통의 공간이었다. 식민 지배와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학동 8거리 재개발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당산나무는 사다리차에 부딪쳐 가지가 부러진 채 방치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학동 주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당산나무협의회’가 꾸려져 커다란 상처는 이내 아물었고 다시 마을의 수호신으로 귀환하는 각종 미담을 만들었다. 두루마을 이음길과 학동 당산나무 귀환 프로젝트는 백범이 백화마을을 통해 뿌린 씨앗이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로 그 결실을 맺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화(百和)마을은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범이 직접 지었다고 전해진다. 백화(百和)에서 백(百)은 표면적으로 100가구를 뜻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숫자 100은 완성과 전체, 진실과 가득 참을 상징해 왔다. 또 한자는 다르지만 백의민족(白衣民族)에서 백(白)자를 음차해 우리 민족을, 김구의 호 이자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백범(白凡)에서 백(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종합해 보면 광주 학동에 마련한 백화마을은 우리 민족 모두가 힘든 시련을 함께 이겨 나가며 오순도순 모여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백범의 뜻으로 확장할 수 있다. 백화마을은 백범의 마을이자 우리의 이상향이었다. 


어느덧 해방이 된 지 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정한 대한 독립의 완성은 백범이 남긴 유훈과도 같은 백화마을의 정신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다. 옛 마을과 옛 이웃들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고통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기쁨을 함께하고 마음을 나누던 이야기는 아직도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 백범과 함께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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