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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재 Aug 05. 2024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추앙하다


‘화광동진(和光同塵)’


광주광역시 양림동 오방 최흥종 기념관에 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휘호를 만날 수 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은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이다. 풀이하면 자신의 빛나는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적인 것을 따르거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본색을 숨기고 인간계(人間界)에 나타남을 이른다. 이는《노자(老子)》의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에서 나온 말이다.



최흥종 기념관이 백범의 휘호를 전시한 연유는 무엇일까? 1945년 해방을 맞아 그리던 조국으로 환국한 백범. 젊은 시절 황해도 치하포 사건(1896년) 후 도망자 신분임에도 자신에게 은신처를 내어준 여러 고을을 비롯해 삼남지방의 주요 거점지역을 찾는다. 이는 자신을 보살펴 준 이들을 향한 보은의 순회 답방 일정이자 해방 이후 정치적 세력화를 위한 한국독립당의 정비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백범은 그중 두 차례 광주를 방문한다. 1946년 방문 시 백범은 대성초등학교와 중앙교회에서 강연을 갖는다. 이때 최흥종 목사도 참석한다.



1948년 다시 광주를 찾은 백범은 무등산 증심사 길에 올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오방정에서 칩거하고 있는 최흥종을 만난다. 백범은 최흥종에게 정치에 참여해 나라를 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지만 끝내 사양한다. 최흥종이 병자와 빈민을 위한 구제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백범은 화선지에 직접 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그에게 전하고 광주를 떠난다. 



김구는 상경한 뒤에도 편지와 함께 ≪노자(老子)≫의 도덕경 33장에 나오는 구절을 손수 써 내려보낸다. 휘호 말미에는 崔興琮 老先生 存念(최흥종 노선생 존념)이라고 적어 존경의 뜻도 함께 표한다. 


知人者智(지인자지)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自知者明 (자지자명)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지만 

自勝者强(자승자강)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스스로 넉넉함을 아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고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힘써 행하는 사람은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不失其所者久(부실기소자구)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은 그 지위를 오래 지속하고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사는 것이다.


아마도 휘호는 최흥종이 성경뿐 아니라 노자에도 심취한 사실을 알고 이를 배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49년 김구가 암살되었을 때 최흥종은 100일 동안 무등산을 내려오지 않고 묵언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서로를 정치적 동지이자 흠모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백범이 최흥종을 만나기 위해 무등산 증심사 길에 오른 시기는 그의 나이 72세였다. 본인보다 4살이나 어린 최흥종을 만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험한 등산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이야 등산로가 잘 구축돼 험한 산길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산길이 험해 수행원들이 교대로 김구를 업고 올라갔다고 한다. 아마도 1938년 중국 창사의 조선혁명당 본부 남목청에서 회의를 하던 중 조선인 밀정에게 피격을 받은 부상 후유증도 그의 산행을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백범은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함께 뜻을 펼칠 사람이라면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또한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하고자 평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친필 휘호에 담아 전하기도 한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애절함과 인간적 따뜻함이 묻어난다.



백범이 오방에게 전한 ‘화광동진’은 이제 오방의 삶을 대변하는 문구로 자리 잡았다. 오방은 화광동진의 삶을 살았고, 백범이 화광동진으로 그를 알아본 것이다. 어쩌면 화광동진은 이미 백범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호 '백범'은 자신의 비범만 재능을 감추고 평범한 범부(夫)로 살고자 했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백범'은 곧 '화광동진'과 동의어처럼 서로 맞닿아 있다. 화광동진의 삶을 살고 있는 오방을 보고 백범은 이심전심 동질감과 연대의 감정을 가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자존감을 앞세우며 자기 PR을 강조하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다. 화광동진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화광동진의 삶을 살고 있는 숨은 선각자들이 등장해 국난 극복의 선봉장으로 우리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 왔다. 자꾸만 퇴색해 가는 숭고한 우리의 정신문화유산 속에서도 '백범(白凡)'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이어진 김구의 삶과 철학이 더욱 추앙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 1880~1966)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한평생을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 등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개화기 광주의 정신적 지주이자 근대 광주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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