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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정 Oct 30. 2021

나의 ‘슈퍼우먼’에 대하여

[마음치유 프로젝트 힐링 칼럼 9]


  때 이른 10월 한파가 찾아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낮 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가는 늦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가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예년보다 일찍 월동준비를 하게 되었다. 돌돌 말아놓은 널찍한 전기 매트를 꺼내어 거실에 하나, 내 방에도 하나 깔아놓았다.

 

무거운 매트를 낑낑대며 옮기고 깨끗하게 닦은 후, 모녀가 함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전기 매트에 불을 올리니 금세 따뜻한 열이 올라왔다. 따스하게 데워진 바닥 위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엄마를 보니 꽤나 흡족해 보였다. 그러한 엄마 옆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흥미진진한 소설책을 읽고 있노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지며 잠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의 행복에 만끽하던 찰나, 코 끝으로 아늑한 냄새가 풍겨왔다. 어딘가에서 맡았던 익숙한 그 냄새.     


  “엄마, 시골집 냄새나! 우리 할머니 댁 냄새인데?!”

  “이거 외할머니가 쓰시던 건데 집으로 가져온 거잖아.”


맞다. 분명, 그때의 냄새였다. 아직 내가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니. 그렇게 3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시골 마을회관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살 무렵, 동네 주민이 가득 모인 곳에서 할머니는 시상대에 올라 상을 받으셨다. 나를 비롯하여 손자 손녀들이 꽃다발을 들고 할머니께 전달해 드렸고, 할머니 키보다 훨씬 높게 솟아오른 꽃다발 속에 파묻힌 채로 할머니는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이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효부상과 효행상을 자주 받으시는 할머니가 우리에겐 언제나 큰 자랑이었다.     


  할머니는 시부모님을 오랫동안 모셨다.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한데 외갓집에 가면 외증조할아버지, 외증조할머니가 계셨고 내가 열 살 무렵에 돌아가셨으니 할머니로서는 40년 이상 시부모님을 모신 셈이다. 외할아버지는 20대 시절, 냇가에서 크게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셔서 몸이 조금 불편하셨다. 나이 든 시부모를 봉양하고 장애를 가진 남편을 돌보면서 외할머니는 팔 남매를 키우셨다.


그런데 그 사연 또한 기가 막히다.

열일곱에 시집을 온 할머니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7년 만에 어렵게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바로 딸인 우리 엄마를 낳았다. 남아 선호 사상이 뿌리 깊던 그 당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자식이 딸이었으니 그때는 정말 소박맞을 위기에 처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할머니의 효심을 갸륵하게 여기신 건지 그 뒤로 아들 다섯을 줄줄이 보내주셨다. 거기에 일찍 부모를 여의게 된 두 명의 조카들까지 거두어들이게 되면서 여덟 명의 자식을 둔 엄마가 되었다.      


  없는 살림에 많은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농사일까지 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오랜 세월의 흔적과 고됨은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움직일 때 지팡이나 유모차에 의지하지 않으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우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갓집에 도착할 때 즈음 들리는 차바퀴 소리에 어김없이 힘든 몸을 이끌고 마중을 나오셨다. 우리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항상 고추장 불고기 양념을 재워놓고 기다렸다가 맛있는 고기 밥상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온갖 나물들을 무쳐주셨다.

갈 때는 참기름이며 각종 야채며 과일들을 바리바리 싸 주셨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어 우리 손에 쥐어주고 나서야 본인의 일을 마치시는 듯했다.     


이러한 할머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느끼는 게 많은 우리였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무게가 얼마나 막중했는지를 알게 된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가 화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살면서 답답하고 힘에 부치고 고단하던 때가 얼마나 많으셨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싶은 심정일 때가 허다했을 텐데 자식들한테 짜증 한번 내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법을 알고 계셨다. 여덟 명의 자식들에게 언제나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었고 손주들에게도 물론 그러했다. 바라는 바 없이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크게 표현 하시진 않았지만 언제나 우리의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고 묵묵히 받아주신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그렇게 잘 해내셨을까? 가르쳐 주는 이 하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삶을 너그럽게 잘 꾸려갈 수 있으셨을까?’


할머니를 통해 지혜로운 이의 성숙함, 기품, 절제의 미덕을 보았다. 진실로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삶을 사셨다. 나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진정한 슈퍼우먼이었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도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최고의 멋진 여성이라고 말이다.      


  지금은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지만 할머니가 주신 사랑은 여전히 내 안에서 뜨겁게 흐르고 있다. 겨울이면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이불을 깔아놓고 고구마를 가득 삶아 내어 오신 할머니. 호호 불며 껍질을 까서 내 손에 꼭 쥐어주시던 할머니가 유독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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