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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정 Nov 14. 2021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다면

[마음치유 프로젝트 힐링 칼럼 10]


  단계적 일상 회복이 시작되고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그동안 집안에서 머무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듯 날씨마저도 맑고 청명한 날씨를 선물해주었다. 작년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지 못해 단풍 여행을 떠나거나 제대로 된 단풍구경을 즐기기엔 현실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어려웠다.


그래서 지난가을은 많은 이들에게 알록달록한 예쁜 가을을 추억하기보다는 무색 또는 회색빛으로 점철된 날 쯤으로 기억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올해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오색빛깔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유난히도 예뻐 보였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포근한 날씨에 높고 푸른 하늘까지, 완연한 가을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아 오늘을 놓칠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노랗고 붉게 수놓은 단풍을 그냥 보낼 수 없겠다 싶어 바로 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 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손에 쥐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른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오로지 가을만을 가슴에 담아보고자 단지 신발 끈을 질끈 고쳐 매고 집 밖을 나섰다. 양손이 자유로우니 홀가분한 기분이 한층 더해졌다고나 할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도 좋았고, 기분 좋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알록달록한 나뭇잎이 춤을 추듯 나부끼는 모습도 너무 고왔다. 울긋불긋 화려하게 펼쳐진 가을의 정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예쁜 계절을 눈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 이게 행복이지.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 들으며 두 발을 자유롭게 내딛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이지.’      


  얼마만이던가. 이렇게 자연을 온몸으로 흠뻑 느껴보는 것이…. 오랜만에 산의 품 안에서 신선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 나무와 꽃에 취해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있단 것에 더욱 신이 났다. 흘리는 땀방울마저 자연과의 깊은 교감 후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 생각하니 몹시 산뜻하게 느껴졌다.      


  두어 시간의 만족스러운 산행을 마치고 천천히 내려오던 중 문득 10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 서툰 청춘의 불안이라고 해야 하나, 미래의 진로에 대한 막연함 때문이랄까 수시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젖어 가슴이 답답할 때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산을 찾았다.


자연을 느끼고 풍경을 즐겨서 라기보다는 마음이 힘들고 번잡할 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산에 올랐다. 몸을 힘들게 해서 그 잡념을 이기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말없이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받아주니 말이다.     


  그날도 정신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게 던진 한 마디가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젊은 사람이 산에 와서 왜 발만 쳐다보고 갑니까! 나무도 보고 꽃도 볼 줄 알아야지!.”      


  아차 싶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만 쳐다보고 오로지 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좋은 것을 곁에 두고도 좋은 줄 모르고, 이쁜 것이 눈앞에 있어도 볼 줄 모른다는 것을.      


  건너편에서 내려오며 나를 지켜보던 아저씨의 그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얼른 고개를 꾸벅하고 달아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여기에서 왜, 이 좋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걸까!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팔공산에 와서 발 끝만 좇고 있는 내가 나조차도 너무 어리석게 느껴져 많이 부끄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뭘 그렇게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을까.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왜 그렇게 조바심을 내었을까….


그때는 굉장히 심각한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건 답도 없는 질문에 대해, 실체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스물다섯의 가을을 잃어버렸다는 것.     


  매번 찾아오는 계절이라지만 그때의 공기, 온도, 바람, 빛깔 그 어떤 것도 같을 수가 없는데 눈앞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아쉽게 떠나보내야 했다. 스스로 찾아간 그곳에서 그 순간의 행복을 스스로 걷어찼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한 번씩 ‘지금 여기’를 놓치고 있을 때면 그때 기억이 떠오르며 내게 묻곤 한다.      


  ‘지금 이 일이 10년 뒤에도 너에게 영향을 줄만큼 심각한 일이니?’


  그 질문 하나면 금세 대답이 나온다. 대부분의 일은 전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일 뿐이라고. 그게 뭐라고 괴로워했나 싶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을지도.      


부디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이 예쁜 계절을 놓치고 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대여, 이 가을 잘 즐기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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