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교통법 제5조의 2(모범운전자연합회) 모범운전자들의 상호협력을 증진하고 교통안전 봉사활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모범운전자연합회를 설립할 수 있다.
도로교통법 제46조의3(난폭운전 금지) 자동차등의 운전자는 다음 각 호 중 둘 이상의 행위를 연달아 하거나, 하나의 행위를 지속 또는 반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위협 또는 위해를 가하거나 교통상의 위험을 발생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학이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에 따라 익히면 기쁘지 않으냐? 저 멀리서도 찾아와 주는 벗이 있거늘 즐겁지 않으냐?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느냐?"
군자는 배우기 좋아하기에 잘못을 고치는데 거리낌이 없고, 남을 가르칠 때 쌀쌀하지 않습니다. 같은 뜻을 가진 친구를 사귀기 좋아하기에 사람과 조화하고 다툼을 꺼립니다. 뭇사람의 모범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있어 떳떳하고 걱정없는 사람입니다.
뭇사람은 군자 되기가 높고 가파른 산 오르기 같이 무척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동네 뒷동산에 마실 나가기처럼 쉽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단 한번 뒷동산에 올라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동산 오르기를 평생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네"하고 대답할 수 있나요? 마찬가지로 군자 되기 또한 한두 번 군자다운 행동을 하기는 쉽지만, 언제나 군자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논어> '학이' 1장에는 도덕의 모든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배우고, 더불어 살고, 군자가 되면 도덕입니다. 도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딱 학이 1장의 내용처럼 하면 됩니다. 첫걸음부터 천천히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군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옹야 11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공자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다운 유자가 돼야지 소인 같은 유자가 되지 말아야 해.”
유자란 어느샌가 유교를 배우는 유학자의 총칭으로 굳혀졌지만 공자 이전에는 각종 제사 의례나 예법에 박식한 전문가 집단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자란 공자 문하에서 배운 예법의 전문가, 도덕의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자라고 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예란 법과는 구분되는 사회적 약속, 관습, 문화의 결정체로 예를 들어 인사 같은 겁니다.인간사회를 사는 사람 중에 버르장머리가 없어 인사를 안 하는 사람은 있어도 인사라는 행위 자체를 못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우리 사회에 살며 인사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이 곧 유자입니다.
유자는 모범운전자, 난폭운전자도 아닌 말 그대로 운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라는 찻길 위에 덕이라는 차로 운전하는 모두는 도덕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어떻게 운전하느냐에 따라 군자가 될지, 소인이 될지 결정됩니다. 무릇 운전대를 잡는 사람은 스스로를 운전자니 차주니 하며 일컫기 마련입니다. 소인 같은 유자는 '운전 같지도 않은 운전'을 하면서 운전자랍시고 으스대는 사람입니다. "소인 같다"하면 인사를 하긴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반갑지 않고, 겉으로는 웃으며 정답게 이야기하나 속으로는 으스스한 생각이 도사리는 사람입니다. "군자답다"하면 상대를 만나면 저절로 반가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상대마저 인사를 하고 싶도록 밝게 인사하는 사람입니다.
*학이 8,
子曰 •••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잘못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고쳐라."
*위령공 20
子曰 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나에게서 다 얻고 소인은 남에게서 다 얻으려 하지.”
자동차를 빌려 타보면 백이면 백 내비게이션(이하 내비)이 달려있습니다. 친구 차, 부모님 차, 택시까지 초행길이 아닌 곳을 갈 때에도 내비를 켜놓고 무작정 따라가곤 합니다. 편함을 좇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전자기기에 의존해 주행하는 모습은 썩 운전을 잘해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내비 이용자는 내비가 엉뚱한 길을 알려줘서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거나 길을 잃으면 십중팔구 기계 탓을 하며 화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에 늦거나 길을 잃은 게 어떻게 기계 탓인가요? 운전자가 미리 길을 알아두고 외워두었다면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저는 택시를 자주 탑니다. 그런데 가끔 노련한 택시기사님들은 네비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길로 가서 내비에는 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나오는 거리를 수십 분 만에 도착해 저를 깜짝 놀라게 하곤 합니다. 만약 베테랑 기사님들이 실수했을 때 내비와 자기 자신 중에 누굴 탓할까요? 분명 자신입니다. 군자가 훌륭한 까닭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아 때마다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자장 8
子夏曰 小人之過也는 必文
자하가 말했다. “소인은 잘못을 꼭 꾸밉니다.”
스스로의 실수를 마주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해 길을 잃었어도 내비 탓을 하고 싶고, 녹색등에서 멍하니 있다가 뒷 차에게 클랙슨 세례를 받아도 도리어 화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소인의 버릇을 지키고 잘못을 고치지 않아 제자리걸음하면 못난 운전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모두 둘러대기를 줄이고, 모자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드리프트 하고, 남들보다 더 빨리 도로를 주파할 수 있다고 운전을 잘하는 게 아닙니다.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사고를 내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운전을 할 수 있어야 훌륭한 운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줄이기 위해서는 변명하는 버릇부터 고쳐야 합니다.
*자장 21
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자공이 말했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 같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뭇사람이 다 쳐다보다가도, 잘못이 고쳐지고 우러러봅니다.”
운전면허시험에서 10번을 떨어진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연습해 익혀서 근 10년 동안 무사고를 이어나갔다면 과연 이 사람이 엉터리라고 놀림받아야 할까요? 당연히 훌륭하다며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군자는 모범운전자이지만 실수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요. 누구나 실수합니다. 실수하는 순간은 말 그대로 ‘잠깐’입니다. 군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면 뭇사람은 일식과 월식을 구경하듯 가리키며 손가락질하겠지만, 잠깐이 지나면 해와 달이 원래대로 돌아오듯 군자는 잘못을 바로바로 고쳐버려서 사람들은 "역시나!" 하는 목소리로 칭찬합니다.
다만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잘못을 하더라도 어차피 고칠 테니 상관없다는 안일한 마음가짐을 말한 적은 없습니다. 실수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실수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위정 14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슷해지지 않는데 소인은 비슷해지기만 하고 두루 사귀지는 않지.”
*자로 23
子曰 君子는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어울리되 같아지지 않고 여럿이 함께 해도 끼리끼리 몰려다니지는 않지.”
군자는 밤하늘에 떠있는 북극성 같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모든 별이 회전하고 있지만, 북극성은 진북(眞北, 지리상의기준에따른, 지구의북쪽끝. 또는그 방향)에서 움직이지 않고 뭇 별의 가운데를 지킵니다. 많은 별 가운데 북극성보다 흐린 별도 있고 밝은 별도 있지만, 북극성은 그들보다 밝거나 흐리게 되려 하지 않습니다. 도로 위에서도 누군가는 다른 차선으로 빠지고, 추월하여 제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모두가 같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가졌을 때, 군자는 바른 차선, 바른 속력, 바른 방향으로 운전하기에 모든 차의 모범이 됩니다.
도덕은 사람이 타고 태어나는 사회적 본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갓난아이조차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크게 만들면 도덕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두루 사귑니다. 조화합니다. 반면 소인은 두루 사귀기보다는 끼리끼리 놀며, 서로서로 같게 됩니다. 같게 된다 하면 나쁘게 닮는 겁니다. 부모와 자녀의 얼굴이 닮고, 스승과 제자의 학문이 닮으며, 남편과 아내의 성격이 닮게 됨은 조화롭고 화목하게 됨이니 군자의 닮음입니다. 같게 됨은 남이 이기적으로 하니 나도 질세라 따라 하고, 친구가 버르장머리 없이 구니 나도 덩달아 싸가지 없이 구는 겁니다.
사람 드문 늦은 밤, 적색등에 맨 앞차가 신호를 어기자마자 뒤차가 따라 어기는 게 같게 되는 겁니다. 군자는 끼리끼리 어울리지 않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과 어울리기에 도덕을 지킵니다. 누군가는 위 상황에서 앞차가 신호를 지킬 때 답답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중간에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이 온다면 쌩쌩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때문에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됩니다. '적색등에서는 차가 멈춘다'는 도덕이 덧없어 집니다. 나의 작은 탈선이 도덕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려 누구나 쉬이 신호등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군자는 가까이 보지 않고 멀리 보기 때문에, 좋은 부분은 닮되 나쁜 점이 같게 되지 않습니다.
어울리기 좋아한다면 다툼을 싫어합니다. 군자는 도덕에 굳은 뜻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내 뜻을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는 사람끼리는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 마련입니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피하기 쉽지 않습니다. 평평한 땅에 우뚝 솟아 있는 산처럼 오직 군자만이 드높아서 거센 바람이나 우박, 소나기에 더욱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비바람이 쏟아져도 산은 한 발짝 움직이지 않습니다. 군자는 산처럼 잔잔하고 떳떳하게 자신의 길을 갑니다. 내 뜻이 있을 뿐입니다. 남의 뜻에 휩쓸리지도, 뭉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차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앞을 막고 나를 추월해 버리면 분명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차하고 공도레이싱(公道 racing, 공공도로에서의 불법 경주 행위)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 합니다. 막히는 길 위에서 빵빵거린다고 나도 빵빵거려야 하나요? 창문을 내리고 육두문자를 쏟으며 맞서지도 맙시다. 나는 내 운전을 하고 내 갈 길을 간다는 생각이 전염되고 널리 퍼지면 난폭운전자는 저절로 줄 겁니다. 결국 난폭운전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사람마저 부끄러움을 느껴 도덕의 길로 돌아온다면 난폭운전은 찻길 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하늘 아래 도덕의 길을 걷는 사람이 절반 이하일 때 군자의 노력은 무의미해 보이고 덧없이 느껴지겠지만 군자의 벗이 세상의 절반을 채울 때면, 명절날 경부고속도로 귀성길의 파도를 어떻게 해도 거스를 수 없듯이 도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도로 위를 가득 채울 겁니다.
*팔일 7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다투지 않지만 활쏘기 할 때는 다르네. 상대와 인사하고 먼저 하시라 물러서며, 다 끝나면 함께 마시는 게야. 군자다운 겨루기 아니냐?”
군자가 자신의 힘을 갈고닦는 이유는 더불어 살고 어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을 이기고 홀로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을 호령하는 건 소인의 속 좁은 꿈입니다. 군자는 다투지 않습니다. 다만 군자도 남과 힘을 겨룰 때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과 어울려 즐겁게 놀 때입니다. 공자는 활의 비유를 듭니다. 활은 살상력이 있는 무기입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서슬퍼런 화살촉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군자는 활쏘기에서 화살촉에 집중하지 않고 화살깃에 집중합니다. 사람 두 명이 서로에게 활시위를 겨누고 서로를 해한다면 불화이지만. 군자는 같은 표적을 노리고 활놀이하며 조화합니다.
활놀이는 비유하자면 레이싱입니다. 레이싱은 분명 1등이 있고 꼴찌가 있지만,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습니다. 레이싱에서 자신의 능력을 있는 힘껏 발휘함과 달리 남을 앞지르고 자잘한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불법추월은 품격이 다릅니다. 활놀이와 레이싱은 올림픽정신, 스포츠맨십이랑 닮지만, 활싸움과 불법추월은 전쟁과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경쟁해야 할까요?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 물었다. “무도한 사람을 죽여서 도를 이룬다면 어떻겠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선생께서는 정치를 하신다는 분이 어떻게 사람을 죽여서 하려 하시오? 선생께서 선하면 다른 사람도 선해질 테요.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지오.”
군자는 반드시 가장 좋은 도로 가장 좋은 덕을 이룹니다. 과정도 중요하고 결과도 중요합니다. 세상에 도덕을 바로 세우고 뭇사람을 어울리게 만든다면 더 할 나위없지만, 도덕을 위해 부도덕한 짓을 하고 사람끼리 다투게 만든다면 나쁜 선례로 남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먼저 바꿔야 합니다. 내 한 몸 가누지 못하면서 남을 바꾸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버려야합니다.내가 먼저 바르게 되면 남도 바르게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생깁니다. 이 증거로 남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남을 설득해 바꿀 수 있으니 나아가 세상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쁜 사람을 다 죽여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군자라면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바꿔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