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자가용
자동차관리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자동차"란 원동기에 의하여 육상에서 이동할 목적으로 제작한 용구 또는 이에 견인되어 육상을 이동할 목적으로 제작한 용구(이하 "피견인자동차"라 한다)를 말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은 제외한다.
사람은 덕(德)을 타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덕을 '타고' 태어납니다. 마치 도로에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처럼, 인생은 덕을 갖고 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더럽고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악과 깨끗하고 밝은 면인 선은 여리고 작습니다. 작은 불씨라도 장작을 때고 부채질해 주면 큰 불이 되는 것처럼, 배움은 미약한 선을 키워 쇠를 녹이고 아궁이를 지펴 사람을 이롭게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악이 저절로 커져 산과 들을 태워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선한 마음의 뿌리인 덕을 닦고 밝힌다면 자동차를 잘 운전함과 같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나은 쪽으로 대하고 못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사회적 본성이 있다면 역시 덕 또한 본성입니다. 맹자(孟子)는 사람에게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양능(良能)과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양지(良知)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덕을 지니고 있으며 선하게 태어난다는 말은 현대인에게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대유학자인 순자(荀子)조차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 말했습니다. 다만 맹자와 순자를 포함한 모든 유학자는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싹수', 덕을 말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다, 악하다 하는 것은 무척이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물론입니다. 누구나 살아온 환경에 따라 선하게 될 수도, 악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로 선하게 되고자 노력하고 약속해 왔습니다. 이기적이고 쪼잔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이타적이고 너그러운 구석을 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람이 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덕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동차에 타고 있음을 깨닫고 도로에서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을 실행할 능력이 분명 있습니다. 내 덕을 저버리지(自暴, 자포) 말고 내 덕을 버리지(自棄, 자기) 말아야 합니다.
덕은 아주 낮고 가까우며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높고 멀며 어렵다 알고 꺼립니다. 선은 남을 목숨 바쳐 구하거나, 전재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약간의 배려와 인내만으로도 이미 선합니다. 이러한 작은 선이 모였을 때 덕을 온전히 발휘하는 사람인 군자가 될 수 있고, 나아가 큰 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덕을 크게 밝힐 수 있습니다.
위령공 3
子曰 由 知德者鮮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덕을 아는 사람이 적구나!”
덕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덕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덕이라는 마음이 너무 당연하고 가깝기에 사람이 굳이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가진 것에 무신경하고 무감각할 때가 있습니다. 덕은 찻길로 들어가기 위한 자동차의 역할을 하지만, 또 비유하자면 공기나 태양, 땅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기를 마시고 숨 쉬며, 태양이 주는 양분으로 먹고, 땅을 밟고 섭니다. 당장 공기가 없어지면 숨 막혀 죽고, 태양이 없어지면 말라죽으며, 땅이 없으면 꺼져 죽는 게 사람인데도요. 사람에게 원래부터 주어졌다 여기니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복에 겨운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덕이 없다면 어버이와 아들딸 사이에서 서로 해치고, 갓난아기가 강에 버려지며, 늙은이는 산에 버려질 텐데 사람은 덕에게 쩨쩨하게 굽니다. 세상 모두가 덕을 안다면 가족은 화목해지고, 천애고아가 없어지며, 독거노인은 보살펴져 세상에 홀로인 사람이 없어집니다. 장담하건대 덕이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인간은 결코 홀로 내몰리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회복되며,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덕을 알면 모두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한 17
子曰 吾未見好德을 如好色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女色을 좋아하듯이 德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위령공 12
子曰 已矣乎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됐다! 나는 아직도 여자 밝히듯이 덕을 밝히는 사람을 못 봤다.”
호색,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욕구에 대한 비유입니다. 성욕, 식욕, 수면욕을 흔히 인간의 3대 욕구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욕구는 분명 필요합니다. 성욕이 없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은 멸종할 겁니다. 식욕이 없다면 굶어 죽습니다. 수면욕이 없다면 과로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욕이 과하면 음란해지고, 식욕이 과하면 되려 건강을 해치며, 수면욕이 과하면 나태해집니다. 이성과 관계를 맺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한 자리에 누워 자는 것은 뭇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바여서 이로운 반면 해롭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덕과 반대된다 하지만 역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면 덕은 어떨까요? 덕은 아무리 지나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로움에 이로움을 더한다고 해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3대 욕구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영장류를 생존하게 한다면 덕은 우리가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서 삶을 살게 합니다. 덕이 없다면 사람은 무리를 짓고 사는 다른 동물만 못한 존재가 됩니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를 해치는 사람을 금수나 짐승이라 일컬으며 손가락질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덕을 알면 우리의 사람됨은 빛납니다.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욕구를 찾는 마음을 이기는 순간부터 사람은 나날이 이롭게 됩니다.
중용 1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내리면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면 도라고 하고, 도를 닦으면 교라고 한다.
술이 2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낳은 덕이 내게 있거늘 환퇴 그자가 나를 어쩌겠느냐?”
*환퇴(桓魋)는 춘추시대 송나라에서 무관직인 사마(司馬)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공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性)은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지녔기에 선천적(先天的)입니다. 덕은 사람의 성입니다. 선을 알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덕을 따른다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하물며 겁주려는 상대가 덕을 거꾸로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덕을 따르는 사람은 군자이며 공자이고, 덕을 막고 거꾸로 하는 사람은 소인이며 환퇴입니다. 자동차가 찻길에서 녹색등에 가고 적색등에 멈추는 일은 말썽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덕을 거꾸로 하면 부자연스럽습니다. 만약 녹색등에 멈추려 해도 밀릴 수밖에 없고, 적색등에 가려해도 막힙니다. 난폭운전자는 모범운전자를 막을 수 없고 소인은 군자를 막을 수 없습니다. 모두 덕을 가지고 있지만, 군자만이 덕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연 10
子張이 問崇德辨惑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 欲其生 惡之 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자장이 어떻게 덕을 높이고 혹을 거르는지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심으로 미덥고자 하기를 주로 해서 의로 옮겨가야 덕을 높일 수 있지. 사랑해서 살리고 싶다가도 미워지면 죽이고 싶어지면 혹이야.•••"
안연 21,
樊遲從遊於舞雩之下 曰 敢問崇德修慝辨惑 子曰 善哉 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修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
번지가 공자를 따라 무우 아래에 놀면서 말했다. “어떻게 덕을 높이고 나쁜 마음을 닦아내며 혹을 거를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질문이로구나! 먼저 실천하고 나중에 얻으면 덕을 높일 수 있지. 남의 악보다 나의 악을 다르려야 나쁜 마음을 닦아낼 수 있다. 잠깐 욱한다고 가족에게까지 화를 내버리면 혹이 아니겠냐?"
혹(惑)은 미혹(迷惑), 의혹(疑惑)입니다. 군자와 소인, 선과 악처럼 덕과 혹은 성질이 반대입니다. 덕이 '있는 그대로'라면 혹은 '이랬다 저랬다'입니다. 삶이 각박해진 오늘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람은 힘든 일이 있을 때 걸핏하면 죽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자살이라는 말의 무게를 가볍게 합니다. 죽이고 싶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보다 삶을 좇고,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며, 죽이기보다는 살리고 싶은 게 사람이지만 사람은 왔다 갔다, 오락가락하며 변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덕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 혹입니다. 변덕 심한 도깨비가 욕심많은 혹부리 영감에게 달아준 혹처럼, 사람에게는 덕이 있지만 덕을 닦고 크게 만들지 못하면 혹이 생깁니다. 선한 본성을 따라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욕구를 덜 따지면 덕이 높아집니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변덕스러운 감정을 참지 못하면 혹이 생깁니다.
자로 22
子曰 南人 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쪽 속담에 '사람이 한결같지 못하면 무당도 의원도 어쩔 수 없다.'라는 좋은 말이 있지. 덕이 한결같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항(恒)은 항상(恒常), 항용(恒用)입니다. 혹이 '이랬다 저랬다'라면 항은 '늘, 언제나'입니다. 무당은 상대의 소원이 꼭 이뤄지길 늘 기도하는 사람이고, 의원은 상대의 병이 꼭 낫게 하기 위해 언제나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결과를 좋게 고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옛날에는 무당과 의원이 가장 보잘것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자는 "항이 없다면 무당과 의원도 될 수 없다." 혹은 "무당과 의원조차도 항이 없는 사람은 못 고친다."라는 의미에서 예시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일의 특징을 봐도 깊이 이어져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항의 도움을 받습니다. 학자는 꾸준히 연구하고, 농사꾼은 꾸준히 밭을 갈며, 장인은 꾸준히 물건을 만들고, 장사꾼은 꾸준히 물건을 사고팝니다. '꾸준히', 이 세 글자를 한 글자로 줄이면 항입니다. 덕은 늘, 언제나, 꾸준히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면 누가 학자, 농사꾼, 장인, 장사꾼을 믿을 수 있겠어요? 사거리에서 방향표시등을 변덕스럽게 바꿔대면 어느 길로도 갈 수 없습니다. 핸들을 시계방향으로 돌렸는데 좌회전이 된다면 누가 그 자동차를 믿고 탈까요? 어제 사람을 해치고도 오늘부터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 생깁니다.
이인 25,
子曰 德不孤 必有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지."
위정 1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拱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으로 하는 정치는 말하자면 북극성이야.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뭇 별이 가까이에서 함께 돈단다."
자고로 사람은 선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덕을 알든 덕을 모르든, 착하든 착하지 않든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보다는 이롭게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법 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덕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좋아함과 덕을 좋아함은 'ㅏ'다르고 'ㅓ'다르면서도 한 획차이, 한 끗 차이입니다. 덕은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덕이 있는 사람은 남이 덕을 깨치게 할 수 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 머물다 보면 언젠가는 덕을 깨치게 될 겁니다.
군자는 홀로 내몰리지 않습니다. 덕이 있으면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덕이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떼'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 '인간사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 별이 회전하는 모양처럼 덕은 인간사회의 중심이 되고 원리가 되어 세상 모두의 근거가 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북극성, 이웃은 뭇 별입니다. 북극성과 뭇별은 서로 어울립니다.
헌 문 6
南宮适 問於孔子曰 羿 善射 奡 盪舟 俱不得其死 然 禹稷 躬稼而有天下 夫子不答 南宮适 出 子曰 君子哉 若人 尙德哉 若人
남궁괄이 공자에게 여쭸다. “예는 활을 잘 쐈고 오는 땅에서 배를 끌고 다닐 정도로 힘이 셌지만 모두 얻지 못하고 죽었죠. 그러나 우나 직은 농사만 지었어도 세상을 얻었습니다.” 공자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남궁괄이 밖으로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로구나, 이 사람아! 덕을 높이는구나, 이 사람아!”
태백 20
孔子曰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세상의 삼분의 이를 가지고도 은나라를 섬겼으니, 주나라의 덕은 더할 나위 없지."
인간만큼 동족을 자비 없이 해치고, 그 피를 밑거름 삼아 문명을 발전시킨 동물은 없습니다. 애초에 문명이라는 말은 인간만을 위한 단어입니다.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또다시 문명을 낳았습니다. 책에서 끊임없이 비유하는 자동차 역시 그렇습니다. 마차는 전쟁용 수레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람의 편의를 위해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에서 전차, 장갑차, 군용 트럭 등이 비롯되었고,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첨단기술이 다시 상용되는 자동차에 도입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폭력을 지향하는 걸까요? 저는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는 만큼 평화 또한 끊임없이 염원하고 갈망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인간은 무수한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하나하나의 전쟁마다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가 늘 뒤따랐습니다. 공자는 영공(靈公, 위(衛) 나라의 제31대 군주)이 군대를 부리는 일에 대해 묻자 다음날 위나라를 떠났고, 맹자는 전쟁을 좋아하는 혜왕(惠王, 위(魏) 나라 초대 왕)에게 왕의 모진 정치로 백성이 죽는 것과 왕이 백성을 직접 죽이는 것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라고 말했습니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더 강한 국력으로도 은나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예와 오(羿奡,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고 하는 옛사람)는 무력이 있었지만 천하를 얻은 사람은 결국 우와 직(禹稷, 옛 중국의 왕)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안연 19
(군자 장 참조)
맹자 이루상 10
孔子曰 德之流行 速於置郵而傳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이 편지를 전하는 것보다 덕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게 더 빠르지."
난폭운전자도 운전할 줄은 압니다. 모범운전자의 운전에 비하면 한참 미흡하지만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인 또한 덕이 있습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어서 바람이 풀을 눕히듯 움직이며 가르칩니다. 덕은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덕을 모른다고, 무도하다가 사람을 모조리 쳐 죽여놓고서 도를 이룬다니요? 군자는 칼을 뽑아 들지 않습니다. 서슬 퍼런 낫을 들고 풀과 나무를 서걱서걱 베어버리지 않아도, 산들바람이 불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기쁜 듯 춤춥니다. 군자의 덕은 인터넷 메일이나, 휴대폰 메시지, 등기우편보다도 빠르게 사람과 사람 마음에 전달됩니다.
헌문35
子曰 驥 不稱其力 稱其德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준마(驥)라는 말은 그 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칭찬하는 것이다.”
옹야21
子曰 智者 樂水 仁者 樂山 知者 動 仁者 靜 知者 樂 仁者 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멈추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준(夋)은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글자입니다. 준에는 많은 바리에이션이 있습니다. 사람을 뜻하는 인(亻) 부수를 붙이면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글자인 준(俊)이 됩니다. 물(氵)이 붙으면 깊은 물(浚), 산(山)이 붙으면 높은 산(峻)입니다. 말(馬)이 붙으면 공자가 말한 빠르게 잘 달리는 말인 준마(驥)입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에는 마땅히 꾸준하다는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덕이 가지고 있는 항입니다. 준마가 훌륭한 것은 말이라는 동물이 전쟁터에서 탱크처럼 적군을 무참히 밟아버릴만큼 힘이 강력해서가 아닙니다. 무력으로 보이는 폭력성이 아니라, 도덕으로 말하는 항상성이야말로 사람이 본받아야할 점입니다. 전쟁의 탈 것인 말이 아니라, 사람의 오랜 벗인 말.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함께 가주고, 농사도 도와주고, 짐도 들어주는 말의 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도 깊은 물인 황하(黃河)를 좋아할 겁니다. 어진 사람도 산 가운데에서도 높은 산인 태산(泰山)을 좋아하겠지요. 우리 나라로 치면 한강과 금강산입니다. 한강은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사람들의 젖줄기 역할을 했으며, 금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한강의 물줄기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면 지금의 서울이 없었을 것이며, 금강산이 갑자기 무너져버렸다면 많은 문학작품이 사라졌을겁니다. 한강을 닮은 사람은 뭇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금강산을 닮은 사람은 뭇사람의 본보기가 되어 복돋아줍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이웃과 더불어 즐겁고, 어진 사람은 이웃의 기억 속에서 오래토록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