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교육
배우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설 수 없습니다.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영장류의 분과, 일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우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육과 학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아마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할 때까지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요즘의 교학(敎學)은 가르치는 사람인 스승과 배우는 사람인 제자가 서로를 이끌고 따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사라는 사람이 제자를 ‘사랑의 매’, ‘교권’이라는 명목으로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생은 스승을 스승이 아닌 단순 직업으로서의 교사, 서비스직 근로자라고 여기며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며 반목합니다.
유교는 호학(好學, 배움을 좋아함)을 추구했던 공자의 정신을 잇습니다. 호학은 학문과 교육에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경사(經師, 글선생)는 인류가 이뤄놓은 문명의 지식을 계승하기 위한 학문의 스승이며, 인사(人師, 참스승)는 사회를 유지하는 인격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의 스승입니다. 공자가 영원한 스승의 본보기(만세사표, 萬歲師表)라고 불린 것은 이러한 글선생과 참스승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공자가 다시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사는 얻기 어려우나 경사는 얻기 쉽다는 말(인사난우경사이우, 人師難遇經師易遇)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몇 글자 검색하기만 해도 입문자를 위한 정보부터 전문가를 위한 정보까지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입시 전문 학원을 시작해 미술, 악기, 게임에 이르기까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배울 곳은 어디에든 있는 시대입니다. 좋은 선생님은 죽거나 숨는 시대입니다. 단순 지식을 전하는 경사가 가득한 시대, 그리고 경사의 무리에 가려 인사는 드문 시대입니다. 우리는 참스승이 멸종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유교라는 가면을 쓰고 교학에 들이미는 온갖 잣대는 오히려 유교의 가르침과는 크게 다릅니다. 교사라는 이름 아래에서 참스승을 자칭하고 군사부일체의 폭력을 휘두르는 말종에 의해 좋은 선생님마저 목소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진짜 참스승은 그저 그런 글선생으로 전락했습니다. 가르치려는 사람이 없으니, 배움을 구하는 사람은 더 이상 제자나 학생이 아니라 ‘교과목이수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뜻을 잃고, 제자는 길을 잃으니 교학은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군사부일체와 함께 도덕과 사제관계 마저 유명무실한 단어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논어』 자한10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안연이 한숨쉬며 말했다. "우러러 뵐수록 높고, 파면 팔수록 굳으시구나!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차근차근 이끌어주신다."
사랑의 매는 체벌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말입니다. 유교에서 스승은 더 나은 덕(德)을 가지고 도(道)를 가르치는 인사입니다. 유교는 모든 행동에서 폭력을 거부합니다. 덕은 인간의 실력에서 비롯되는 무력적, 군사적 폭력의 제동을 거는 개념입니다. 폭력이 일부 인정되는 경우는 오로지 폭력을 막기 위한 자위 및 정당방위뿐입니다. 체벌은 말 그래도 신체적 학대이며 폭력일진대 유교에서 말하는 덕과 정반대의 길입니다. 제자를 다그치고 혼내야 할 때가 분명 있지만, 회초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채찍을 휘둘러 가축을 모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말로 독려하는 일입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다면 임금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스승도 스승답지 않다면 스승이 아닙니다. 군사부일체는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듯, 스승도 제자를 사랑하며, 임금도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맥락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와 사부(師父)를 동일시하라는 의미로 왜곡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 스승, 부모는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지만 임금과 스승, 부모가 완전히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 군왕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지어야 합니다. 걸왕에 대한 탕왕의 쿠데타와 주왕에 대한 무왕의 쿠데타를 정당하다 인정하는 유교입니다. 폭력 교사에 대한 학생의 항의 또한 어긋나지 않습니다.
『순자』 권학편
君子曰、學不可以已. 青取之於藍、而青於藍.
군자가 말하길 배움을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풀에서 취하였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림자를 밟아야 합니다. 나아가 앞질러가야지요. 스승보다 더 낫게 되지(청출어람, 靑出於藍) 않으면 교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옛것에 비해 발전 없이 답습만 한다면 인류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요? 공자의 사상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공자의 가르침은 허무한 공담에 그칩니다. 스승은 제자를 마주 보고 지식을 전수하는 경사인 동시에, 제자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내 앞으로 밀어주는 인사입니다. 나보다 낮은 위치의 제자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올리고, 내 손이 닿는 높은 위치까지 들어 올리는 후원자입니다. 유교의 스승과 제자는 인생의 벗이며 동반자여야 하지 주인과 노예 같은 수직적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자, 주자, 이황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대가들이 제자들과 수평적이고 친근한 관계를 맺은 것처럼 말입니다.
『논어』 공야장38
子曰 有敎無類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침은 있되 부류는 없다.
『논어』 술이7
子曰 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육포 한 다발 정도만 가져와도,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네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옛 왕들도 지성인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왕사(王師, 왕의 스승)라는 이름을 주어 우대했습니다. 춘추시대의 많은 통치자가 공자를 초빙했으며,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도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경사는 돈으로 구할 수 있지만 인사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습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사꾼은 재화를 이용해 상품을 구매하는 손님에게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장사꾼이 아니며 제자는 손님이 아닙니다. ‘왕의 DNA’조차 교학 앞에 평등합니다. 가르침에는 부류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야말로 간절해야 할 따름이지, 이래라저래라 스승에게 명령할 바에 배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논어』 술이8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답답해할 정도로 애태우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으며, 말을 절 정도로 애쓰지 않으면 입을 틔워주지 않으며, 하나의 이치를 알면서 세 가지 예시에도 적용시키려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알려주지 않는다네.
『맹자』 진심편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군자에게 즐거움은 세 가지다. 천하의 왕노릇은 여기에 있지 않다. … 세상의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유교는 배움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줍니다. 다만 군자는 간절하지 않은 사람까지 제자로 받아들여 애쓰지 않습니다. 사람 하나를 가르치는 데에는 교육자의 시간, 마음 등의 노력이 두루 쓰입니다. 가르침이 간절한 사람이 따로 있거늘 애꿎은 사람에게 교학의 노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교는 분명 세상의 인재를 제자로 얻어 가르치고 키워내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만, 모든 사람이 인재는 아닙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이유는 인재인 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의 교육에서는 유교의 이상적인 사제관계를 만들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교사는 돈을 받고 일하며 학생은 학교에 돈을 내고 학습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장사꾼과 손님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교육은 스승에 대한 예와 존중을 아는 제자에게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 교사가 학생의 상전이 아니듯 학생도 교사의 상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맹자』 이루상편
古者 易子而敎之 父子之間 不責善 責善則離 離則不祥 莫大焉
옛날에는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습니다. 부자간에는 선을 따지면 안 되지요. 선을 따지면 갈라서게 되고, 갈라서면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논어』 헌문8
子曰,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한다면 시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음을 다 하는데 가르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제관계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입니다. 맨투맨, 일대일의 양자관계입니다. 두 사람의 상호합의와 존중 아래에서 피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학부모의 간섭이 개입하게 되면 가르침과 배움이 오고 가는 과정에 장애물이 생깁니다. 삼자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학은 한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변화시키는 일이기에 어느 정도의 마찰은 없을 수 없습니다. 내 자식을 스승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결정을 번복하고 방해해서는 오히려 제 자식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공자의 경우 수제자인 안연은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와 성씨가 같은 것으로 보아 외가 친척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안로 역시 공자의 제자였습니다. 증석, 증삼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공자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유교에서 부모는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안 좋은 길로 가려는 발걸음을 막아 세우고 삿된 생각을 꾸짖는 말과 행동이 부모자식 관계가 멀어지고 어긋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부모자식 간의 어긋남입니다. 흔히 가부장제 사회하면 연상되는 ‘엄한 아빠, 너그러운 엄마’ 모델의 원형은 유교의 ‘엄한 스승, 너그러운 부모’입니다. 유교적 세계관 안에서 스승이 존경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자칫 미움받기도 하고 싫증 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수행해야 합니다. 부모를 대신하여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는 스승이 있기에 세상은 번영합니다. 교사는 결코 멸시받을만한 직업이 아닙니다.
대한민국만큼 교육에 두드러진 관심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를 둘러봐도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교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라는,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단 하나의 시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배우는 책은 오로지 문제집과 참고서이며, 배우는 곳은 학교가 아닌 학원이 주된 나라입니다. 수능을 위한 교육은 유교에서 말하는 경사의 교육에 그치고 입시만큼이나, 혹은 입시보다도 더 중요한 인사의 교육에는 너무나도 소홀한 현실입니다. 청소년 사망 원인의 50.1%가 자살1)이며, 재직 중 사망한 교원의 자살률이 11.0%2)에 달하는 통계는 담담하고 냉정하게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허공에서 부서질 뿐인 관심만 가지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무한경쟁사회의 폐해는 꽃다운 청춘의 죽음으로 지금껏 경고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하루이틀 만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꾸준히 우리는 그들을 잃어왔지만, 애써 무시했을 뿐입니다. 사람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인재로 키워낼 목적이 아니라, 국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도구이자 톱니바퀴로 생산해 낸 최후입니다. 이 참혹한 세상을 한탄하고만 있기에는 당장 이 시간에도 이 시대의 스승과 제자는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룬 교사, 학생, 학부모에 대한 내용 이외에도 이 나라의 교육은 수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만을 힘주어 글로 옮깁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사랑하고, 학부모가 그 둘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유교가 사제관계와 교육의 정상화를 이룩하는 길을 앞장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1) ‘2016∼2021년 재직 중 사망한 교사 현황 자료’, 교육부
2) ‘2022 청소년 통계‘, 여성가족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