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여성
공자는 남자입니다. 죽은 지 2500년이 넘은 할아버지입니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모두 남자였습니다. 가르침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공자께서 어째서 여자 제자가 없었냐고요? 공자가 받아주고 말고를 떠나서 배움을 청하는 여자가 있었을지조차 미지수입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입니다. 『명심보감』 등에서 등선자(登仙者), 자허원군(紫虛元君)이라는 인물이 공자의 제자 중 유일한 여자였다고 전해지지만, 후대의 민중 설화나 도교 전설에 의한 창작으로 보입니다. 여성의 입지를 요구하는 일반 민초의 바람이 당시 가장 큰 권위였던 유교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기득권이었던 사대부 성인 남성의 입지 강화를 위해 유교의 권위가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공자가 죽고 꼭 300년이 지난 후 태어난 한나라의 유학자 동중서가 유교가 아닌 음양가의 음양오행의 개념을 도입한 후, 유교의 성별관은 점차 왜곡되어 가며 “남자는 하늘(陽, 양), 여자는 땅(陰, 음)”이라는 식의 논리로 변해버렸습니다. 마치 이것이 유교의 본질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생각하건대, 애초에 공자의 가르침에는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공자가 민권이나 자유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기에 노예 해방 운동이나 민주주의 운동을 하지 않았듯이 오히려 하층민과 백성에 대해 앞장서서 박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 자신이 고대 중국에서 살다 죽은 귀족 성인 남성으로서 어떤 성인지 감수성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자는 집에서 애나 돌보고 집안일이나 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공자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고 싶었던 사상의 중심에는 남성우월주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 평등을 상식으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 유교를 시대에 맞게 적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논어 양화25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공자의 언행이 가장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헌은 『논어』입니다. 그리고 논어에 기록된, 공자가 여성에 대해 직접 언급한 문장은 단 하나입니다. 여자와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소인을 살펴봅시다. 공자 이전에 소인은 흔히 통치자인 군자와 구분되는 일반 백성을 의미합니다. 군자가 귀족이라면 소인은 평민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군자를 태생적인 신분이 아닌 도덕적 존재로 격상시킴에 따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더라도 인격적 결함이 있다면 유학자들은 그를 소인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논어』 미자4
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
제나라 사람이 미녀들과 악사들을 보내니 계환자가 그걸 받고서 3일 동안 조회하지 않아 공자께서 떠나셨다.
문장에 보이는 계환자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의 귀족입니다. 당시 노나라는 로마의 삼두 정치처럼 세 파벌로 나뉘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노나라 15대 국군인 환공의 세 아들이 시조로 있는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를 묶어 삼환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이 가운데 계씨 집안의 후원을 받으며 노나라 정계에 입문하는 한편, 그들과 대립하면서 장수의 재능이 있는 제자 자로를 시켜서 사병을 지닌 정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공자의 정치인생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공자의 도전은 좌절하게 됩니다. 『사기』, 『춘추』 등의 역사 기록에서는 제나라가 공자를 두려워했다고 전해집니다. 협곡회맹이라고 불리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협상 자리에서 공자가 외교적 퍼포먼스를 발휘해 옛날에 제나라에게 빼앗겼던 노나라의 지역을 다시 되찾아오는 외교적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이웃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나라는 나라 안에서 이름 있는 기녀와 악사들을 뽑아 노나라에 파견합니다. 제나라의 계략으로 노나라의 정치인들은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국회의사당에서 무제한 콘서트가 열려서 의원들이 하루종일 술 마시며 춤추고 노래한 겁니다. 노나라의 정치적 타락에 실망한 공자는 결국 은퇴를 결심하고 길을 나섭니다.
당시 악기 연주자 중에는 시각 장애인이 많았던 걸로 보이는데, 논어에는 공자가 장애인 악사들에게 친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나라를 떠나는 공자를 악사 한 명이 마중 나가줍니다. 악사 기(己)는 자신마저 울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夫子則非罪)"라고 공자를 위로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문득 "노래 몇 소절 가능할까요(吾歌可夫)?"라고 묻더니 이런 의미심장한 곡을 부릅니다.
"彼婦之口, 可以出走! 彼婦之謁, 可以死敗! 蓋優哉游哉, 維以卒歳..."
"저 여인의 입 때문에, 떠나가는구나! 저 여인의 입 때문에,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구나! 얌전히 물러나 떠돌며, 그렇게 죽어야 하누니..."
역사적 맥락을 살펴봤을 때, 위의 거로가(去魯歌, 노나라를 떠나는 노래)에서 지칭하는 여자와 논어 양화편 25장에서 말하는 여자는 같은 대상으로 보입니다. 공자 학단은 정치유랑집단이었습니다. 그런 공자의 제자들이 엮은 논어입니다. 논어에 등장하는 여자는 단순 고유명사로서의 의미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노나라 국정을 파멸로 이끈 '저 여인(彼婦)'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인은 누구일까요? 춤추는 기녀들 옆에서 연주를 한 악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사람은 공자를 기용하고 정치 활동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배신하고 욕망에 몸을 맡긴 계손씨의 수장 계환자입니다. "선생님께서 계집들을 불러들였다고 나를 나무라시는구나(夫子罪我以群婢故也夫)!"라면서 탄식을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인의 모습이니 말입니다.
다시 한번 공자의 말을 곱씹어본다면, 공자가 말한 '여자(女子)'는 여성 가운데의 소인입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소인이라면 '여자든 남자든(女子與小人)' '다루기 어려움(難養)'을 말한 것입니다. 제나라에서 파견한 여인들은 자신의 미색을 이웃나라를 망치는 데에 사용하는 소인이며, 삼환 같은 소인배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힘을 국정농단하는데 허비하는 소인입니다. 공자가 그들을 가까이하며 도우면, 계환자는 애교를 부리는 기녀처럼 '선생님(夫子)'이라면서 치켜세워주지만, 멀리하면 자신을 왜 버리느냐며 눈을 흘리는 기녀처럼 "나를 나무라시느냐"며 '원망(怨)'합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와도 스캔들이 있었으나, 개인적인 생각에 해당 구절은 공자가 제나라와 계환자 사이에서 생긴 사건을 배경으로 한 말이라 추측해 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유교를 비판하며 “공자가 말한 여자 속에는 그의 어머니도 있을까?”라고 말했지만, 저는 당연히 "안징재는 소인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식욕이나 수면욕과 마찬가지이지요.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비만이라는 병을 얻게 되고, 수면욕 역시 기면증 등의 수면장애에 걸리면 심하게 고생합니다. 유교는 인간의 3대 욕구에 대한 과잉을 모두 경계합니다. 공자는 낮에 잠을 자던 제자 재아의 나태함을 나무라기도 하고, 한 소쿠리의 밥과 표주박 한 바가지의 물로 삶을 이어나가면서도 즐거움을 잊지 않는 제자 안회를 칭찬합니다. 성욕에 대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식사와 수면은 하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지만 성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자를 포함한 유학자는 모두 남자이기에 유교가 경계하는 성욕은 여색(女色)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여자가 아니라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욕에 대한 경계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고 여자 역시 남자와 함께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지금은 여색과 똑같이 남색(男色)도 조심해야 합니다. 성욕은 병이 아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병이 되며 건강한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논어』 계씨 7
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경계할 것이 셋 있다. 젊어서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
성욕에 의해 휘둘리며 인생의 주된 의미가 번식이 되어버린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맹자』 <양혜왕하>에는 양혜왕이 자신에게 여색을 좋아하는 병이 있다고 고백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일방적인 훈수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괜찮다고 위로하며 말을 이어나갑니다. "왕께서 만일 여색을 좋아하시면 백성과 함께하소서(王如好色 與百姓同之)!" 맹자의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개인적 욕구를 가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치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시고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에도 신경을 쓰십시오."가 되겠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성욕은 10대 후반에도 20대 중후반까지가 최고조를 찍는다고 합니다. 이런 과학적 사실은 현대에 와서 그 근거를 찾은 것뿐이지 과거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호르몬 변화로 성욕이 왕성해지는 시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논어』 자한 17 / 위영공 12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덕 좋아하기를 여자 좋아하는 것 같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논어』 학이 7
子夏曰 “賢賢易色, …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했다. “현자를 모시기를 여색을 하듯 하고 … 그런 사람이면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리라.”
유교는 생리적 욕구인 성욕처럼 도덕을 좋아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을 먹지 않으면 배꼽시계가 울리듯이, 하루종일 잠을 자지 않으면 졸음이 쏟아지듯이 도덕이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도덕과 색(色)의 공통점이 있기에 이상적인 도덕의 행위를 색에 비유합니다. 매력적인 이성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면 반응하듯이 의로움과 불의에 대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마 눈을 돌릴 수 없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곤두서는 사람이 바로 군자입니다.
'삼종지도'란?
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부인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이미 시집을 갔으면 남편을 따르고 지아비가 죽었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
'칠거지악'이란?
七出者 不順父母出者 無子者 淫僻者 嫉妬者 惡疾者 多口舌者 竊盜者
내쫓아야 할 일곱 가지 사람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쫓아내는 자,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 음란함에 빠진 자, 질투를 하는 자, 악질이 있는 자, 시비 걸거나 비방하는 것이 많은 자, 도둑질하는 자이다.
유교는 공자의 말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합니다. 삼종지도와 칠출(七出. 칠거지악)은 공자의 말이 아닙니다. 삼종지도와 칠출이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이라 믿어온 가치라고 하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산삭해도 상관없을 쓸모없는 문장입니다. 삼종지도는 『예기(禮記)』의 <교특생(郊特牲)>편과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칠출은 예기의 종류인 『대대례기(大戴禮記)』 <본명(本命)>편에 나옵니다. 춘추전국시대가 저물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분서갱유를 일으켜 법가 서적과 기술 서적을 제외한 모든 기록이 없애려고 했습니다. 훗날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이때 후대 유학자들이 실존된 유산을 복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긁어모아 만든 것이 바로 예기입니다. 의례 역시 비슷한 사정에서 한나라 때 만들어진 서적입니다. 삼종지도와 칠출은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책이라고 선전한 『공자가어(孔子家語)』 라는 책에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는 예기와 의례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적고 있는데, 이 때문에 삼종지도와 칠출은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오해가 생겼습니다.
이 글의 부제는 유교와 여성입니다. 처음에는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제가 글을 쓰려는 취지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 삼갑니다. 제 눈에 비친 페미니즘은 처음 생각했던 성 평등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제의 유교라는 말 역시 공자 혹은 선진유교로 바꿔야 더욱 합당할 것입니다. 유교는 선진유교부터 현대유교까지의 모든 사상을 총망라하는 단어입니다. 다만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과 정신을 잇는 가르침이기에 공자의 본뜻을 바로 세운다면, 공자의 제자이자 저의 사형인 모든 유학자들도 선뜻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기에 이 글의 부제는 유교와 여성입니다.
"古人有言曰 牝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
"옛사람 말에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법은 없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이제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반계지신, 牝鷄司晨)."라는 말은 고대의 역사서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이 이전 왕조였던 은나라의 주왕과 주왕을 타락시킨 여인 달기를 비판하면서 내건 정치적 슬로건입니다. 무왕의 발언은 현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남녀차별적이고 불합리합니다. 시대적 맥락으로 보면 당연하다 말하며 넘길 수 있으나 께름칙하지요. 무왕 역시 유교에서 존경받는 왕입니다. 그렇다면 공자 역시 무왕의 개인적 의견을 듣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공자는 평화적인 방법인 선양(禪讓, 나라를 양보함)으로 나라를 얻은 순왕의 노래에 대해 칭찬합니다. 반면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은 무왕에 노래에 대해서 은연중에 비판하며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아름답긴 한데, 딱히 좋지는 않구나(盡美矣 未盡善也)" 그 시대, 가정 내의 성인 남성이 부재인 상황에서 스스로 가장이 되어 '새벽을 알리는 암탉'이어야만 했던 안징재를, 공자가 정말 주제도 모르는 암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소인의 신분인 제자들에게 군자가 되라고 말했던 것처럼, '여자임에도 나를 홀로 키워주신 가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에 와서는 모를 일입니다.
제가 유교와 여성의 공존가능성을 말하기도 전에 조선시대에는 임윤지당이나 강정일당 같은 여성성리학자가 활약했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자매로서의 여성이 아닌 유학자로서 우뚝 섰던,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유교를 배워 성취를 이루었던 군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람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던 시절에도 이들은 "사람의 본성(性)은 서로 비슷하다."는 공자의 말로 하여금, 남녀의 성별(性) 역시 신체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라도 군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덕을 배운다는 것은 즉 성인을 목표로 정진하는 것입니다. 성평등의 기치 아래에서 더욱 발전할 유교의 모습을 기대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