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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린 산천어 Sep 27. 2023

장애인은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유교와 장애인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을 낮잡아 부르기 위해 입에 쉽게 올리는 병신(病身)이라는 말은 ‘병이 든 몸’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비속어로 분류됩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지체장애인 등 지금도 우리와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정확히는 ‘우리’의 범주에 속해있는 그들을 향한 시선과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장소에 있고 싶지 않다는 배타성, 장애인의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막으려는 억압성,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격적인 비난의 폭력성은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줍니다. 장애인은 소수자이지만, 약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강자도 아니지요, 우리는 금수가 아니기에 절대적인 물리력으로 강약을 판가름하고 우열을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와 어깨를 맞대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로서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공유해야 합니다.


 유교는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고, 귀가 들리지 않아도 들려줄 수 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해도 전할 수 있고, 걸을 수 없어도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며, 스승이 있습니다. 비장애인 역시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장애인은 도움의 부류가 다를 뿐, 사람에게 부류가 있는 것인 아닙니다. 유교에서 "내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했다면, 나를 미루어보아 남이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몸을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몸인 것처럼 하고,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나의 불편함처럼 여긴다면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공존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특수학교 설립, 장애인 이동권, 중증장애인시설 폐지 등 장애인과 관련된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유교가 이바지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지 깊게 고민해 봅니다.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

인간 구의 형 맹피, 스승 공중니의 제자 민자건


 공자의 이름은 언덕이라는 뜻의 구(丘)입니다. 공자가 태어난 산둥성 곡부의 동남쪽으로 30km를 가면 니구산(尼丘山)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언덕과 공자의 뒤통수가 닮아 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공자의 자인 중니(仲尼)의 니(尼)도 여기에서 따왔습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산 꼭대기에서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면서 빌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 인물의 이름과 별명 신체적 특징이나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자는 어머니가 다른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이 맹피(孟皮)입니다. 맹은 맏이라는 뜻이고 피는 절름발이라는 뜻이 있는데, 학자들은 공자가 아버지인 숙량흘의 대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를 형이 지체장애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는 장애를 가진 것을 불길하게 여겨서 대를 이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공자는 지체장애인 가족을 두었기 때문인지 장애에 대해 그 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열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자가 아낀 제자 가운데 민자건이라는 사람 역시 이름과 자에서 장애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민자건의 이름은 신체적 결손을 뜻하는 손(損)이며 자건의 건(騫)은 대놓고 절름발이라는 뜻입니다. 피에 발 족(足)을 합친 글자 '절름발이 파(跛)'와 함께 '건파(蹇跛)'라고 하면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을 통틀어 말하는 단어입니다. 


『논어』 선진 13

子曰 “夫人不言言必有中.”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사람(민자건)은 말이 없을 뿐이지, 말을 하면 꼭 핵심을 찌르는구나!"

『논어』 선진 4

子曰 “孝哉閔子騫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민자건의 효는 훌륭하구나! 부모형제의 (그를 칭찬하는) 말에 사람들이 토를 달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장애인을 바라볼 때 대부분 장애라는 속성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비장애인보다 모자란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일상생활에서 미치는 영향과 혹은 나와의 관계에서 부딪힐 현실적인 어려움이 앞섭니다. 그럼에도 인간 구에게 지체장애인인 맹피는 그저 내가 모셔야 할 형님이었습니다. 공자는 맹피의 아들 공충을 자신의 제자로 거두고, 조카딸의 혼처를 찾아주며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다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자건은 스승 공중니로서 가르치고 이끌어줘야 할 제자였습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성에서 장애란 말 그대로 장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논어』 선진 2

 “從我於陳蔡皆不及門也. 德行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문하에 없구나.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으며 …"


 민자건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공자를 따라 전쟁과 하극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중국 전역을 방랑합니다. 주유열국(周遊列國)이라고 불리는, 공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한 민자건은 공자보다도 8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의 불합리한 시선과 편견을 받으며 살아간 민자건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공자에게 민자건은 어떤 제자였을까요?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공자는 오로지 그의 도덕만을 칭찬합니다. 유교에 있어서 장애가 가지는 결손, 제한, 부자유, 불만족 같은 수식어는 필요 없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사람이라는 사실 단 하나만이 중요하지, 장애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영화 '말아톤'

장애인을 위한 예, 권으로 도를 취하라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

"… 傴者不袒,跛者不踴  … 以權制者也"

… 등이 굽은 자는 웃옷을 벗어 메는 의식을 하지 않고, 다리를 저는 자는 뛰어서 기운을 털어내는 의식을 하지 않는다. … 이렇게 권으로써 절제한 것이다."


 유교는 비장애인이 따르는 예와 장애인이 따르는 예를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지만, 예외를 둠으로써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예를 함께 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는 슬픔과 답답함을 털어내기 위해 웃옷을 벗어서 메고(단, 袒) 점프하는(용, 踴) 예법이 있었습니다. 등이 굽은 사람이나 윗옷을 벗기 힘들고, 다리를 저는 사람은 점프하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었지요. 『예기』에 나오는 여러 예법을 현대인이 알고 따를 필요도 없지만, 단 한 가지만은 꼭 가져가야만 합니다. 바로 권(權)의 개념입니다.


 도는 시대가 변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가치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는 어느 시대에도 소중했습니다. 어느 상황이 닥치더라도 버려서는 안 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권은 이런 본질적인 것에 비하면 가치가 가벼운 예를 버리고 도를 지키는 일입니다. 인사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예의이지만, 시각장애인이 자신을 보지 못해서 인사를 안 했다고 버릇없다며 꾸짖고, 청각장애인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한다고 싸가지 없다며 뒷담을 깐다면 도리어 소중한 가치를 짓밟는 행동입니다.


 자동차를 주차할 때, 화장실을 들어갈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라면 평등하게 먼저 들어간 사람부터 이용하는 게 옳지만, 장애인전용주차구역, 장애인화장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공정함이 먼저여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 신분 높은 사람을 위한 특별대우가 아닙니다. 장애인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37만 9622원1), 2020년 공공 기관에서의 장애인 고용률은 3.52%2)에 그칩니다.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도, 공공시설, 편의시설을 장애인도 함께 누리기 위한 권입니다.


『논어』 위령공 42

及階子曰 階也.” 及席子曰 “席也.” 皆坐子告之曰 某在斯某在斯.”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固相師之道也.”

악사 면을 만나면, 계단에 다다를 때,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계단이오" 좌석에 다다르면, "좌석이오"하고 말씀하셨다. 모두 앉으면 일일이 "누구는 여기 있고, 누구는 저기 있소"하고 말씀해 주셨다. 악사 면이 나가자, 자장이 "악사와 함께 말하는 방법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네. 원래부터 악사를 상대하는 방법이었지"


 공자는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봤을 때 세상 사람들은 공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친절과 배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을 겁니다. 제자인 자장처럼요. 맹피의 경우처럼 귀족 성인 남성이라는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장애인이라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를 이을 수 없었던 고대 사회입니다. 공자가 특이하게 깨어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장애인이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같은 편의를 누리고, 같은 삶의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마땅한 이치에 대해 우리 사회가 조명하기 시작한 것 역시 최근의 일입니다.


1) 고용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2) e-나라지표(고용노동부)


영화 '포레스트 검프'

탈시설화, 다시 우리 삶 곁으로 돌아오길


 장애인은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입니다. 격리시설, 수용시설은 그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정상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놓는다는 생각 위에 세워집니다. 탈시설화(deinstitutionalization)는 장애인을 가두어는 시설(institution)과의 작별입니다. 유교는 "위치를 알려주는" 친절과 "권으로 예를 절제하는" 배려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말합니다. 공자의 친절과 권의 배려는 오직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상의 모임, 우리 곁의 어느 때나 일어나는 삶과 죽음에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곁에서 살아야 합니다. 맹피의 가족인 공자의 돌봄, 악사 면의 이웃인 공자의 돌봄은 말하자면 지역사회에서의 복지인 커뮤니티케어(community care)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추어본다면 탈시설화는 오히려 장애인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인복지서비스 체계는 절대적으로 열악하며, 1990년대에 이미 완료된 정책이었던 서구의 탈시설화와 비교한다면 우리 사회는 약 20년의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탈시설화라는 명목 하나만으로 전국의 장애인시설을 없애버린다면 장애인의 삶과 생존은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겠지요.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탈시설'이 아니라 '탈시설화를 위한 준비'입니다.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우리와 마주치더라도 기죽지 않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일자리를 찾고,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을 탑승하는데 눈치 보지 않아야 합니다. 탈시설화는 시설과의 작별임과 동시에 사회와의 재회입니다. 장애인은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요? 우리 곁에 살아야 합니다. 


3) 이태헌, 김정석, 정하영, (2019), 한국사회의 ‘탈시설화’ 담론과 사회적 실천으로써  ‘커뮤니티케어’ 정책에 대한 고찰. 

4) 이송희, 이병화, 김혜인, (2019), 장애인 탈시설화 정책의 주요 쟁점과 과제 : 서울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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