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린 산천어 Oct 04. 2023

문명과 야만, 외국인은 다 오랑캐일까?

유교와 다문화

영화 '미나리'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은 유교의 수입 시기와 엇비슷하게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의 대상일 뿐이었던 한반도의 국가들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정체성 아래에서 국가라는 차이를 가졌던, 내집단 속 외집단인 한민족의 세력들은 통일신라 이후 “흩어지더라도 다시 뭉쳐야 하는”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집단을 향한 폐쇄성과 외집단에 대한 배타성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냐를 가리지 않고 있어 왔습니다. 국가 단위로 벌어졌던 한반도의 집단의식은 민족이 주체가 되어 민족의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말하는 ‘민족단결’은 오로지 한민족의 단결입니다. 제69조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식에 ‘민족문화 창달’을 선서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건국이념 자체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국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대한민국 정부는 다문화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민자들을 한민족 문화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헌법과 행정부의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인지 체류 중인 외국인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음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민 불모지입니다.


 삼국시대부터 헤아려도 수많은 외집단과 갈등을 겪은 한민족의 이민족, 타문화 혐오는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한민족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반도를 침략하고 수탈했던 일본인을 '쪽발이'라고, 6.25 전쟁기 중공군의 참전과 민족 분단, 동북공정의 앙금 탓에 중국인은 '짱깨'라고 부르며 혐오합니다. 백인이 사회 지배층의 주류였던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양놈', '코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없었던 외집단에 대한 혐오도 존재합니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상대적으로 개발도상국, 최빈국이 많은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합니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폐쇄성과 배타성의 원인으로 항상 지목되는 것은 한민족과의 뿌리 깊게 얽혀있는 유교입니다. 유교는 한반도의 자문화 중심주의와 국수주의의 명분과 근거가 되어왔습니다. 중국 한족의 천하관 안에서 만들어진 '화이론'은 주변 유목민 국가를 토벌하고 교화시켜야 하는 오랑캐로 규정합니다. 이들 오랑캐를 몰아내고 왕을 드높이자는 '존왕양이'는 공자가 쓴 『춘추』의 말을 빌려 '춘추대의' 정신으로 탈바꿈합니다. 유교 문화권이 아닌 타문화의 문물은 틀린 것으로 지정하는 '위정척사'와 이민족과의 화해를 거부하는 '척화'의 신념은 비석이 되어 전국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유교는 정반대의 사상인 문화 사대주의의 주범이 되기도 하는 모순을 보입니다. 유교 문화권 안에서 벌어진 모든 사회적 폐단을 유교적 습속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공격하는 꼴입니다. 현대의 국제관계는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습니다. 외국어, 원피스, 햄버거, 아파트는 툭 까놓고 말해 오랑캐의 말, 오랑캐의 옷, 오랑캐의 음식, 오랑캐의 집입니다. 오랑캐의 문물이 이곳저곳에 도사리고 있는 현대와 유교는 공존할 수 없는 걸까요? 정작 공자는 오랑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영화 '몽골'

오랑캐,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약탈자


『논어』 헌문 18

子貢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管仲, 吾其被髮.

자공이 말했다. "관중은 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관중은 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를 도왔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도록 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네.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지. 만일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게야. …"


 관중은 공자보다도 100년 정도 앞 시대의 인물입니다. 관중은 제나라의 군주인 환공을 섬겨 제나라를 당시 최강국이자 규구회맹의 맹주로 만든 대표적인 명재상입니다. 공자는 관중에 대해 그릇이 작고(器小), 사치스러웠으며, 예를 몰랐다며 비판하면서도 능력과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관중과 환공은 이민족인 산융족이 연나라를 침략하자 군사를 보내 구원했으며, 적족이 위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아세우자 초구라는 땅에 새 도시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무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규합했다는 점에서 어질다는 말도 붙여줍니다. 공자가 관중에 대해 칭찬하'피발좌임(被髮衽)'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후대에는 미개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굳어집니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쓰지 않으면 오랑캐, 젓가락과 수저를 쓰지 않거나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면 오랑캐, 움막을 치고 살면 오랑캐라는 둥. 피발좌임은 후대 유학자들이 다른 민족의 문화를 혐오할 수 있는 말로 악용됩니다.


 그러나 공자가 이민족을 미워한 이유는 단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풍속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피발좌임은 그저 정주민족인 한족을 대상으로 약탈을 자행하는 유목민족의 복식 문화를 서술한 것일 뿐입니다. 공자가 싫어한 것은 오랑캐의 헤어스타일과 드레스코드가 아니라 그들의 약탈 경제입니다. 오랑캐를 물리친 관중에 대한 공자의 긍정적인 평가는 모두 그가 무력이 아닌 평화로 이룬 업적을 가운데에 두고 있습니다. 유교의 덕은 집단 안에서의 가혹한 형벌과 정치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을 향한 무력적인 침략 역시 반대합니다. 풀어헤친 머리와 상투, 왼쪽으로 여민 옷깃과 오른쪽으로 여민 옷깃으로 문명과 야만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다른 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하고, 조롱과 멸시의 말을 무책임하게 던지며, 그들의 문화를 강탈한 뒤 우리의 문화를 강요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관중의 머리를 하고 관중의 옷을 입더라도, 공자는 우리를 오랑캐라고 부를 것입니다.



영화  '방가? 방가!'

공자가 말한 오랑캐의 인간 선언


『논어』 위령공 5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

  자장이 행(行)하여지는 것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에 진심(忠)이 있고 미더우며(信), 행동이 도탑고(篤) 공경스럽다면(敬)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행(行)해질 것이다. 말이 거짓되고 못 미더우며, 행동이 도탑지 못하고 불경하다면 비록 네가 사는 곳이라 하더라도 행(行)하여지겠느냐? …"

『논어』 자로 19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번지가 인에 대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머물 때는 공(恭, 공손함)으로 하고, 일을 잡을 때는 경(敬, 공경스러움)으로 하고, 사람과 함께할 때는 충(忠, 진심)으로 해야 하네. 비록 오랑캐의 땅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되지."


 오랑캐라 불리던 유교 문화권 바깥의 이민족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무언가' 혹은 '짐승과 동격' 취급을 받았습니다. 후대 사람들의 이민족에 대한 폄하와 과격한 언행과 달리, 공자는 오랑캐에 대해 적어도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유교는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오랑캐가 아닌, "사람은 고칠 수 없다"는 염세적인 시선과 사람을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 내지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도구처럼 이용해 먹는 이해타산적 사고관이야말로 유교의 적입니다.


 공자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도덕을 행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문화가 다르더라도 가족과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은 똑같이 소중한 가치입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역시 공자의 가르침에서 있어서는 안 될 무례이자 무도입니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그 사람의 집에 들를 기회가 있다면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일을 도울 때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 함께 대화를 나눌 때는 얕잡아 보지 말고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공충경으로 대표하는 군자의 도덕을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적용가능하다는 공자의 말은, 중국의 사람과 이국의 사람이 인격적으로 동일하다는 오랑캐의 인간 선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 '컬러풀 웨딩즈'

'타락한 문명인' 중화인보다 '고귀한 야만인' 오랑캐가 낫다?


 공자가 바라본 당시 중국은 옛 삼왕의 시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져있었습니다. 춘추시대는 찬란한 중화 문명이 무너져내리는 쇠퇴기였습니다. 주나라 중앙정부의 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힘을 기르기 시작한 각 지방의 제후들은 천하의 패권을 쥐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군사·경제력 증대를 위한 징발로 고통받는 것은 결국 힘없는 백성이었습니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하극상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복속시키는 병탄 전쟁으로 민중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습니다. 공자는 인간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진단과 함께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과 세상을 떠돌기 시작합니다.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로 이어지는 사회적 혼란의 연쇄고리를 끊기 위해서, 직접 각국의 군주를 만나 전쟁을 멈추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논어』 공야장 6

子曰 “道不行乘桴浮于海從我者其.”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야겠다. (由, 자로)라면 나를 꼭 따라올 사람이지.라고 말씀하셨다. …

『논어』 자한 13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선생님께서 오랑캐의 땅에서 살려하셨다. 어떤 이가 말했다. "누추한 곳에서 어찌하려 하십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 텐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위(衛), 송(宋), 정(鄭), 제(齊), 진(陳), 채(蔡). 초(楚) 등의 나라를 돌며 국가 정상들에게 자신의 마스터플랜을 제안한 공자는 철저한 실패를 맛봅니다. 높은 명성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기득권의 견제로 배척받을 뿐 뜻을 펼칠 수는 없었습니다. 공자에게 중국에서의 정치적 좌절은 이방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게 합니다. 정치적 혼란기가 닥치면 고려나 조선으로 망명하는 중국 지식인이 많았던 후대와 달리,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면서까지 오랑캐의 땅으로 가서 살겠다는 발언은 당시로서 파격적이었습니다. 평소 주나라의 예악, 중국의 문명을 예찬하던 공자의 입에서 나왔기에 제자들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랑캐의 땅은 누추하다는, 즉 이민족의 문화(九夷)는 미개하다(陋)는 누군가의 지적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이민족의 문화는 자문화보다 미개하다는 관점에 대한 반론일 수도 있고, 이민족의 미개함을 인정하되 군자로서 그들을 충분히 교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 수도 있습니다. 안빈낙도, 단사표음처럼 악조건을 이겨내는 군자의 미덕을 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공자에게 이민족이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하나만으로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공자는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에 대해 긍정합니다. 그들을 대하는 차별된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우리에게 대하듯 똑같이 진심을 다할 것을 권합니다.


『논어』 팔일 5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랑캐에게 임금이 있거늘, 제하(중국)가 (임금을) 잃은 것과 같지 않구나"


 오랫동안 이 구절은 "오랑캐에게 임금이 있다고 해도,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중화인은 우월하며 오랑캐는 열등하다는 문화적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지금껏 읽어온 역사적 맥락, 공자의 사상과 결을 달리합니다. 북송오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유학자 정이는 이를 의식하고 "오랑캐에게 조차 임금과 어른이 있거늘, 참람하고 어지러워 위아래가 없는 제하와 도리어 같지 않다.(夷狄且有君長, 不如諸夏之僭亂反無上下之分也)"라는 해석을 내놓습니다만 주류가 되지 못합니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도 정이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성리학의 나라이자 주희를 주자라는 존칭으로 불렀던 조선에서도 '오랑캐만도 못한 제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논어』 <옹야> 편에서 공자가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라는 말을 했던 것과 관련지어 보았을 때, 공자가 지향하는 도는 단순히 지역은 중원에, 민족은 제하에 사는 사람에 제한되는 개념이 아닐 것입니다. 고대에서 임금의 있고 없음은 현대로 따지자면 행정, 군사, 사법, 복지, 문화 등의 분야에서 국가가 질서를 가지고 작동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말로는 문명인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행동은 야만인처럼 군다면, 옷은 야만인처럼 입고 다니더라도 생활에서는 사회적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두 가지의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이 공자의 본뜻에 부합할까요? 저는 주희와 함께 정이를 따르겠습니다.



영화 '엘리멘탈'

이민자를 배척하지 말아야 할 이유


 공자는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를 살다 간 사람이기에, 21세기 인문학이 지향하는 다문화 사회에 속속들이 동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자가 아무리 동시대인들에 비해 이민족에게 열려있었다고 하더라도, "유교는 문화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가르침이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절대주의만큼이나 상대주의 역시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어느 정도는 절대주의의 영역에 있어야 할 윤리와 도덕까지 상대적으로, 다원성을 인정해 주기 시작한다면 반인륜적 범죄나 사회적 부조리마저 인정받아야 할 가치로 둔갑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철학, 종교, 사회, 도덕 등이 각각 내세우는 가치 가운데 우열이 있고 없음은 쉽게 답을 내기 힘듭니다. 대신 유교는 이민자가 스스로의 문화적 가치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조언해 줍니다.


『논어』 술이 28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絜己以進, 與其絜也, 不保其往也."

호향 사람들은 더불어 말하기 어려운데, 어린아이 하나가 선생님을 뵈러 왔기에 만나주셨다. 문인들이 의혹을 가졌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아가려 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고, 물러서려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는 것이지. 어찌 그리 심하게 대하느냐? 사람이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나오거든 그 깨끗함과 함께하면 그만이야. 지나간 일을 눈감아준다는 게 아니다."


 '호향'이라는 말 대신 넣을 수 있는 단어가 과연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 봅시다. 전라도, 경상도 사이의 지역감정부터 중국, 일본, 미국을 향한 국가 혐오, 흑인, 동남아인을 향한 인종 차별 등 양손가락을 다 써도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難與言)"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모여 우리 사회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더불어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같은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알아본 공자의 말을 종합해 봤을 때, 유교적인 입장에서는 이민자의 인종이 무엇이며, 출신 국가가 어디이고,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아가려 한다면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의 부제는 '유교와 다문화' 말고도 '유교와 타자'라는 이름 역시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대 조선의 유학자들이 말하는 오랑캐 가운데에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청나라 등도 포함되었기에, 오랑캐란 단순히 유교적 세계관 바깥의 존재가 아니라 민족·인종·지역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글은 유교적 입장에서는 동화주의에 순응한 이민자에 한해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듯 하지만, 같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의 차이가 차별가능한 이유로 치환될 수는 없습니다. 어찌 그렇겠습니까(唯何甚)? 물러난다면 함께하지 않을 뿐입니다(不與其退). 집단을 넘어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서로를 배려하고 홀대해서는 안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