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린 산천어 Oct 09. 2023

폭력 없는 세상은 오는가?

유교와 평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는 와중에도 세계각지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군부의 쿠데타로, 독재 타도를 위한 항거가, 타국 영토에 대한 야심이. 전쟁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얼굴로 인간의 곁에 다가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단 하루라도 없었던 적이 있을까요? 평화를 집단과 집단 사이의 무력 충돌이 없는 상태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사이의 대립이 없다는 조건으로 따져본다면 평화는 너무나 먼 이야기일 겁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우리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은 나라임에도 전쟁에 대한 안전 불감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남한과 북한 사이의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은 ‘전쟁의 끝’인 종전이 아니라 ‘전쟁의 쉼’인 휴전의 의미를 갖습니다. 게다가 분단 이후로도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해오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휴전이 일정한 평화 상태를 가져다주긴 한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국방의 의무를 근거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GDP(국내총생산)의 3%를 국방비에 쏟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세력들,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 대만 등은 모두 군사적 긴장을 가지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고 있습니다. 화해보다는 대결구도가 심화되기만 할 뿐입니다.


 폭력은 인류의 필요악입니다. 직접적인 물리적 강제력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국가의 공권력 역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승인과 국민의 동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권력을 집행하는 대상의 입장에서 보면 원하지 않는 일의 강요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폭력을 막기 위해서 폭력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경찰력, 군사력이 없다면, 인구의 99%를 선한 사람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1%의 악한 사람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란 얻을 수 없는 것일까요? 유교가 바라는 이상사회는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다스려지는 덕치주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물론 유교문화권의 역사에서도 어김없이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오히려 왜곡된 유교 사상은 침략의 명분이 되기 일쑤였으며, 민중을 탄압하는 교묘한 논리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정부 폭력과 무차별적인 전쟁에 일차적인 제한을 걸어준다는 부분에서 유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유교에서 바라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해 다룹니다.



1989년 6월 5일 천안문 항쟁 '탱크맨'

무력(武力), 문민통제와 덕치주의의 그림자


 들짐승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올가미와 채찍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금수는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이 금수와 다른 이유입니다. 유교는 인간에게 올가미와 채찍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글과 말로써 충분히 가르치고 이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쟁, 군사를 이용한 강압적인 통치방식인 무(武)보다는 인간이 품고 있는 선한 본성을 이용한 문(文)이야말로 인간에게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을 실력행사(역, 力)로 다스린다면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의 난세와 혼란기의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잠시라도 우위에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기껏 이뤄놓은 질서가 쉽게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마음 씀(덕, 德)으로 사회를 다스려서 구성원의 마음을 얻고, 공동체에 진심으로 이바지하게 만드는 것이 유교가 바라는 정치의 이상향입니다. 


『사기』 권47. 공자세가

… 孔子摂相事, 曰, "臣聞有文事者必有武備" …

… 공자는 재상 대행으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신이 듣기에 문(文)과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무(武)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대한민국은 군인이 아닌 시민에 의해 군대를 통제하는 문민통제를 지향합니다.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이 이끈 문민정부도 32년간 군인출신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다시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행정부를 꾸렸다는 의미입니다. ‘문민’이 붙었다고 해서 국방을 쇠퇴시켰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은 국방력 약화보다는 군내 병폐 개선으로 이어졌으며, 문민정부는 대북 방위전력을 증강하는 국방력 강화 정책에 집중했습니다. 덕치, 문치를 말하는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극적인 지향점에 무력이 없더라도, 수단으로써의 무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사기』에는 공자가 무력이 문덕을 뒷받침하고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유가 경전에서 보이는 무력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함께 미루어보면, 공자는 무력에 대해 문덕의 아래에서 제한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다 여겼다고 보입니다.


논어』 술이 20

子不語怪力亂神

선생님께서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으셨다.

논어』 양화 23 

子路 “君子尙勇乎?” 子曰 “君子義以爲上君子有勇而無義爲亂 …"

자로가 여쭈었다. "군자도 용(勇)을 높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를 제일 높게 치지. 군자에게 용이 있더라도 의롭지 않다면 난을 일으키네. …"

논어』 헌문 20 

 “君子道者三我無能焉仁者不憂知者不惑勇者不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 세 가지 도가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 잘하는 게 없구나. 인자는 걱정하지 않고, 지자는 의혹이 없으며,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논어』의 구절은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괴력난신을 괴, 력, 난, 신의 네 가지로 구분해서 공자가 각각 괴이(怪異), 용력(勇力), 패난(悖亂), 귀신(鬼神)을 싫어했다고 유추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괴력, 난신으로 끊어 각각 '옳지 못한 수단으로 쓰이는(怪) 용력''옳지 못한 목적으로 섬기는(亂) 귀신(神)'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공자는 씩씩하고 굳은 용기를 말하는 용(勇)을 군자의 특징으로 꼽았으며, 정치에 이용하는 무력을 일부 긍정했습니다. 기록 곳곳에 공자가 제사 의례를 잘 알고 있었으며, 마치 죽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진심을 다했다는 내용도 앞 해석을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다. 다만 공자는 물리적 힘이 가지고 있는 파괴성과 야만성을 경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는 무력에는 언제나 제동장치가 있어야 하며 그 역할을 문덕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을 무가 뒷받침하는 것처럼, 무을 뒷받침하는 것 역시 문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

전쟁(戰爭), 이익을 위한 죄인의 다툼


 한국전쟁은 북한 조선인민군의 초대사령관 김일성의 권력에 대한 야욕이 원인이 되어 발발했습니다.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이 통치하는 북한 정부는 주민들에게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선제공격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인민군의 군사행위는 자기 방어를 위한 정당행위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한국전쟁 비밀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적화 통일을 위한 남침을 승인해 줄 것을 48차례에 걸쳐 요청했습니다. 권력에 미친 개인의 독단성이 일으킨 전쟁은 한반도 인구의 10%을 넘는 사상자를 내며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새겼습니다. 한국전쟁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전쟁의 원인은 이익을 독점하고 싶은 지배층, 기득권의 욕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맹자』 <진심> 下편

孟子曰 "有人曰 '我善爲陳我善爲戰.' 大罪也."

맹자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군대를 잘 통솔하고 전쟁을 잘한다.'라고 말한다면 큰 죄인이다."

『맹자』 <이루> 上편

"… 爭地以戰 殺人盈野 爭城以戰 殺人盈城 此所謂率土地而食人肉 罪不容於死 故 善戰者 …"

"…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면 하면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성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면 시체가 성안에 가득했다. 이게 땅이 사람 고기를 먹도록 모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죄는 죽어서도 갚을 수 없다. …"


 맹자는 김일성과 같이 욕심에 가득 찬 전쟁광들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스스로를 '무패백승의 명장'으로 선전한 김일성처럼, 당시에도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전선에서는 쏙 빠져놓고는 힘없는 다른 사람들을 앞세웠습니다. 전국시대는 사람들의 피와 살로 땅을 뒤덮은 참혹한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졌습니다. 맹자는 이것을 보고 "사람 고기를 먹도록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합니다. 맹자는 훨씬 후대에 태어난 김일성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그는 큰 죄인(大罪)이며, 그 죄는 죽어서도 갚을 수 없다고(罪不容於死) 역사적으로 단죄한 것입니다. 맹자의 법봉은 김일성뿐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또 일으킬 모든 전쟁광을 겨누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 아프리카의 군벌, 테러 단체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란 이익을 위한 죄인들의 다툼입니다.


『논어』팔일 7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다툼(爭)이 없지만, 활쏘기에서는 꼭 그러하지! 읍하고 양보하며 올라가고, 내려와서는 마시지. 이런 다툼이야말로 군자답다.”

『논어』팔일 16

子曰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활쏘기의 기준은 가죽 과녁을 뚫는가를 보면 안 된다. 사람마다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지. 예로부터 그리 했다.”


 전쟁은 전(戰)과 쟁(爭)이 합쳐진 말입니다. 맹자가 국가 사이의 집단적 교전과 침략 활동인 전을 비판했다면, 공자는 조금 더 본질적으로 따지며 이익을 두고 무력을 이용해 경쟁하는 행위 자체인 쟁을 비판합니다. 활쏘기의 비유는 인간이 무력을 사용하는 방향에 대한 유교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활은 발사한 화살의 물리력이 생물의 뼈와 살을 찢고 혈관과 장기를 파괴함으로써 생명활동을 정지하도록 만드는 무기입니다. 활쏘기, 무력이 방향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면 화살은 서로를 살생하는 투사체의 역할에 그칠 것입니다. 활쏘기의 목표가 개인이 아닌 공공에게 있다면 어떨까요? 무력은 사리사욕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쓰여야 합니다. 무력은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보다, 우리의 것을 얻는 행위로써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공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양궁, 사격, 창던지기, 펜싱 등 전쟁의 기술들이 현대 올림픽 종목으로 변했듯이 무력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평화 속의 경쟁으로 남아야 합니다.



영화 '어느 독재자'

방벌(放伐), 불의에 항거하는 폭력성


 2011년,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42년간 리비아에서 독재정치를 자행하던 무아마르 카다피를 끌어내렸습니다. 아랍의 봄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아랍의 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도 4.19 혁명 이후 유신체제를 겪었으며, 서울의 봄 이후 제5공화국을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6월의 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을 거쳐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보면 민주화란 단 한 번의 역동성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고결한 가치입니다. 2018년 아랍권에서는 다시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 下편

齊宣王 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제선왕이 물었다. “탕왕이 걸왕을 방벌(放)하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征)했다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하찮은 사내인 주(혹은 걸)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맹자』 <만장> 上편

 太甲 顚覆湯之典刑 伊尹 放之於桐三年

태갑이 탕왕의 법을 뒤집어엎자 이윤이 그를 동(桐) 땅에 3년 동안 내쫓았다(放).


 방(放)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정치와 불의를 무찌르기 위한 무력입니다. 사람을 창으로 베는 모양을 하고 있는 벌(伐)이 합쳐져 방벌이라는 단어를 구성합니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국왕인 걸왕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켜 상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맹자는 걸왕과 같은 독재자를 정당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하찮은 사내(一夫)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서경』에 따르면 걸왕이 국왕으로 있을 동안 백성들은 하나라가 멸망하기만을 노래했으며, 진흙탕과 타오르는 숯불에 빠진 것(民墜塗炭)처럼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유교는 생존을 위한 민중의 몸부림을 폭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폄하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상대라고 하더라도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은 쿠데타가 아니라 방벌입니다. 마찬가지로 맹자는 탕왕의 손자인 태갑을 재상 이윤이 내쫓은 일에 대해서도 옹호하는데, 유교에서 말하는 무력의 정당성은 신분의 높낮이가 아니라 도덕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위 워 솔저스'

정벌(征伐), 군대가 가지고 있는 명분


 19세기말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 쟁탈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피지배국의 독립으로 끝이 났지만, 식민주의로 인해 제3세계의 국가들은 몸살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영웅처럼 등장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독재자로 타락하거나, 강대국들의 이권에 의해 기이한 형태로 그어졌던 국경선들로 인해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아프리카의 시민들은 다시금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은 단순한 온정주의가 아닌, 과거사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인 것입니다.


 유엔(UN, 국제연합)은 1948년부터 인도적 지원, 난민구호, 선거감시, 평화협정 이행 감시 등의 평화유지활동(PKO)과 아프리카의 무력분쟁을 억제하기 위한 군대인 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왔습니다. 평화유지군은 의로운 명분과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엔을 구성하는 강대국들의 개입이 오히려 파견국의 정치와 안보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2010년에는 평화유지군이 아이티 안정화 활동(MINUSTAH) 중에 옮긴 콜레라 전염병이나, 군 기강 해이로 인해 성범죄가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맹자』 <진심> 下편

孟子曰 “『春秋』無義戰. 彼善於此, 則有之矣. 征者上伐下也, 敵國不相征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춘추』에 의로운 전쟁은 없으니 저것보다는 이게 낫지 싶은 것이 있을 뿐이네. 정(征)이란 (도덕적인) 위가 아래를 벌(伐)하는 것이니 같은 대등한 나라끼리 정(征)할 수는 없다.”

『맹자』 <진심> 下편

"… 征之爲言正也,各欲正己也,焉用戰?”

"… 정(征)은 바로잡는다(正)는 뜻이다. 각기 자기를 바로 잡아주기를 바라니, 어찌 전쟁을 쓰겠는가? “

…  ‘徯我后后來其無罰.’ 

… 『서경』에 이르기를 "우리의 임금을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더 이상 형벌이 없겠구나!" 


 정(政)은 다른 나라에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나라를 정상화시키는 군사적 활동입니다. 걸왕을 방벌한 탕왕의 사례와 달리 주왕을 정벌한 무왕은 이미 중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군주였습니다. 때문에 방벌이 아닌 정벌에 해당합니다. 정벌은 평화유지군보다는 한국전쟁 당시의 유엔군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유엔군은 남한을 동맹으로 삼고 중무장한 병력을 파병하여 북한과 중공군을 응징했습니다. 반면 평화유지군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경무장 병력입니다. 정벌의 목적 역시 평화유지보다는 평화창조에 가깝습니다. 평화유지군은 파견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중립성을 유지하는 저강도 차원의 관리 차원에서 활동하지만, 정벌은 부도덕한 대상의 완전한 축출을 위한 고강도의 무력적 행위입니다.


 맹자는 의로운 전쟁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명분상의 우열은 조금씩 존재하겠지만, 전쟁과 정벌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정벌은 국가의 무력이 강하고 약함이 아니라, 도덕적인 위치가 높냐 낮으냐에 따릅니다. 도덕적인 우위를 가진 국가는 무력적으로 약하더라도 부도덕하되 강한 국가를 정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부도덕한 거대집단이 세계의 패권을 쥘 뻔한 경우가 역사에는 종종 있습니다.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나치독일의 '레벤스라움(Lebensraum)'과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은 거의 실현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권력은 해방을 바라는 자들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결국은 좌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벌은 응징자의 강력한 군세가 아니라, 정벌을 지지하고 환호하는 민중의 의지에 의해 완성됩니다.


『논어』 헌문 22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진성자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시고 조회할 때 애공에게 말씀하셨다. “진항이 임금을 시해했습니다. 그를 토벌하여야 합니다.”


 간공이 통치하던 제나라는 재상을 두 명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간공은 감지라는 사람과 함께 진성자를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재상직을 독차지하려는 두 사람 사이의 알력 다툼에 휘말려 간공과 감지는 죽게 됩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진성자는 간공의 동생인 평공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제나라 정권을 손에 놓습니다. 노나라에서 관직을 하고 있던 공자는 군주인 애공에게 정벌을 통해 제나라를 정상화할 것을 청원합니다. 실권이 없었던 애공은 당연히 그 부탁을 거절하고, 공자는 실권을 가지고 있던 세 가문의 대표에게도 거절당합니다. 


 노나라 정치인 공자가 제나라의 혼란에 적극적인 관심과 대응을 촉구한 것이 자신의 권력과 이득을 넓히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무력은 세금 확보를 위한 땅따먹기에 쓰일 것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의 보호와 그들을 착취하는 권력자를 정벌하는 데에 쓰여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무력의 사용처를 엉뚱한 곳에 쏟고 있는 지도자들과, 그들을 방조하는 우리에게 공자의 노력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습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평(平)과 화(和)를 찾아서


 평화란 무엇일까요? 평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서구권의 평화(Peace)를 평(平)과 화(和)의 합성어로 번역한 이후로 붙은 이름의 단어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표면상의 의미는 일치하지만 문화의 차이를 완벽하게 메꿀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되는 로마 제국의 번영과 그 치세를 말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의 강력한 힘을 토대로 한 세계의 평화를 말합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평(平)은 스스로를 닦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공자의 '수기안인(修己安人)'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평은 고르다는 뜻입니다. 맹자는 "군자의 지킴은 자신의 몸을 닦아서 천하를 평하는 것(天下平)"라고, 『대학』에서는 개인의 영향력이 가정, 국가를 거쳐 세상에 미치도록 한다면 평천하(平天下)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력은 보통 쓰이지 않습니다. 문과 덕이 있을 뿐입니다. 


 현시대를 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뜻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도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전쟁을 수행 중입니다. 세상을 고르게 만들기 위해 울퉁불퉁한 사람들을 해결해야 한다면 팍스는 무력으로 복종시키지만, 평은 그들이 저절로 그럴 마음이 들게 합니다. 로마가 분열하고 200년간의 평화가 깨졌듯이 힘에 의한 평화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논어』 자로 23

子曰: “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어울리되 같게 되지 않으며, 소인은 같게 되되 어울리지 못한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해 주변 국가를 군사력으로 위협하고, 영토 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들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광복홍콩 시대혁명"의 구호를 외치며 일어난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시위자들을 체포·연행하며 진압했으며, 동 티르키스탄 독립운동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국가분열죄라는 명목으로 처벌하며 이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중국군은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 훈련을 실시하며 양안관계 갈등을 악화시켰습니다.  


 평화는 적을 쳐서 자기에게 예속시키는 정(平定)이 아닙니다.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一)도 아닙니다. 화(和)는 다름 속에서의 공존이지, 꼭 나와 남을 같게(同) 만들어야 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자기와 동화시키려는 무력적인 시도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려 살 수 있는 화해의 방법을 찾는 것이 유교가 말하는 평화에 가깝습니다. 멀기만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는 언젠가 인류가 이룩해 낼 결과 가운데 하나가 평화라고 믿습니다. 유교가 평화를 지탱하는 사상적 기둥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공자와 맹자가 말한 평과 화의 시대가 오길 바라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