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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린 산천어 Oct 10. 2023

국민이 백성이면 대통령은 나라님일까?

유교와 정치

영화 '더 킹'


 정치는 개인이 집단에 영향력을 끼치는 결정을 내리는 사회적 활동입니다. 나라의 주인인 군주나 신하를 자처하는 지식인 관료, 귀족 계층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전근대와 달리, 현대 대한민국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합니다. 정치가 특정 소수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됨과 함께,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행정 업무로서의 좁은 범주를 뛰어넘게 됩니다. 인간사회에 엮인 모든 행위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권력의 주인이 정해져 있었지만, 사람들의 지지가 곧 정치적 방침인 정책의 추진력으로 작용하는 현재는 권력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경쟁이 더욱 복잡하고 다각적으로 변했습니다. 정치는 이익과 권력을 가운데에 둔 주체들의 경쟁이라는 의미로 읽히기도 합니다. '정치질'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政治)와 지금 말하는 서구적인 개념의 정치(Politics)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애초에 정(政)과 치(治)의 두 글자가 붙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후대의 일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는 남을 위해 스스로를 갈고닦는 행위 자체도 정치로 인정하지만, 타인과 실질적으로 접촉하지는 않기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치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한편,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두 사회공동체에 있습니다. 지배, 복종, 협력, 저항 등의 활동 역시 유교에서도 정치라고 말할  있기 때문에 정치(政治)와 정치(Politics)를 연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유교적 의미의 정치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를 바라보는 유교에 대해 다룹니다.


 현대 정치에서 유교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는 나라입니다. 헌법 제20조 제2항에 따라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유교는 신과 같은 절대자를 추종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8개 대표 종단에는 유교를 계승한 성균관이 자리하고 있긴 합니다. 유교가 헌법에서 말하는 종교(Religion)의 범주에 부합하는가? 하는 물음은 뒤로하더라도, 봉건제와 신분제 아래에서의 정치를 말하던 유교가 과연 민주주의와 평등 위에 설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의 양상은 바뀔지라도 정치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논어』, 『맹자』의 글귀가 인문 교양으로서 우리 마음에 여전한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교가 우리 사회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줄 수 있다면, 현실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힘과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 '변호인'

국민이 천자다


 유교는 시대적 맥락을 읽지 않고 오로지 글 내용 자체로만 보았을 때 중앙집권적 정치를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공자, 맹자의 원시유교, 선진유교일수록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민중인 백성의 삶을 보살펴야 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주인인 왕에게 더 많은 권력을 몰아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왕의 권력을 나눠 받은 귀족이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는 힘을 갖게 된다면 기득권의 대결이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주인으로서 제 할 일을 시키자!" 정치를 능동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그렇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군자에게 책임 소재를 부여하고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유교입니다.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라인 주나라의 주인은 천자인 왕입니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의 주인은 군주인 제후입니다. 주족은 상나라와 벌인 목야대전에서 승리하고 천자의 지위를 빼앗아 와 주나라를 세웠으며, 주 성왕에게 봉지를 받은 주공 단이 아들인 백금을 제후로 앉혀 노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대한민국은 천자와 군주가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의 주인으로서 책임을 지지 못한 무능한 황제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강탈한 천황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백성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세운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천자라고 할만한 단독자 없이 천명은 칠천만 민중에게 있습니다.


『논어』 계씨2

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로부터 나온다. … ”


 국민이 천자입니다. 공자가 이 시대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나 이 시국을 논한다면 "나라(天下)가 제대로 되었다면(有道), 정치(禮), 문화(樂), 군사(征), 사법(伐)이 국민(天子)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이게 나라냐?"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국민이 제대로 천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았는지 살펴봅시다. 정치는 기득권을 차지한 반민족행위자, 위선자, 독재자가 쥐락펴락했습니다. 불온서적을 검열하고 건전가요를 보급하며 문화를 미풍양속이라는 잣대로 잘라냈습니다. 군사는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밀고 몽둥이찜질을 내는 데에 쓰였습니다. 사법은 죄인을 벌하지 못하고 애먼 사람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지나간 역사일 뿐일까요?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마는, 저는 공자에게 대한민국의 예악과 정발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있다고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논어』 태백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공자께서 “백성은 도에 따르도록 할 수는 있지만 도를 알게 할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논어』 안연 19

"… 子欲善, 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 그대가 선(善)을 하려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은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습니다.”


 국민은 군자인 천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인인 백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자는 백성을 따르도록(由) 할 수는 있어도, 도를 알게(知)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공자가 민중의 우민화 정책을 지지했다고 말하지만, 앎(知)을 인의 같은 덕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은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모범자인 군자의 솔선수범이야 말로 민중의 진심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더 이상 공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소수의 엘리트 군자에게 정치의 주도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수동적으로 휘둘리는 풀이 아니라 각자가 우뚝 솟은 나무가 되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민중의 정치(중우정치, 衆愚政治)가 아니라 수많은 철인이 주도하는 집단지성의 발휘가 되어야 합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재상적 대통령제로


 대통령은 어째서 대통령(代統領)이 아닌 대통령(大統領)인 걸까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천자인 국민을 대신해서 국내 정치를 총괄하는 대리자이자 국외 교류를 대표하는 공무원일 뿐입니다. 세계 최초의 대통령인 미국의 조지 워싱턴은 스스로를 폐하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했지만, 선출 군주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 대통령제와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다릅니다. 행정부에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대한민국을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도 합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에게 각하라는 존칭이 붙었습니다. 애석하게도, 마치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되뇌는 조선왕조 신하의 자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논어』 태백 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고선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


 대통령을 포함한 공무원은 일반 민중과 평등한 국민이면서도, 다른 국민을 위해 공공성을 추구하는 일에 종사하고자 자임하는 사람입니다. 나라의 주인을 도와 정치를 집행하는 역할이기에 관직자는 오히려 군주보다는 신하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대통령은 모든 공무원의 상관으로서 재상에 해당합니다. 대통령의 치적을 평가하며 성군(聖君), 명군(), 암군(君), 혼군(昏君), 폭군(暴君)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주곤 하는 모습을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듭니다. 대통령을 임금에 빗대는 전근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은 고대에 태어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교적 시선에서조차 비판받아야 할 일입니다. 대통령의 자리(位)를 두고 임금의 정치(政)를 꾀하는 위헌적인 사상입니다.


『논어』 팔일 1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께서 계씨를 평가하시며 “팔일무(八佾舞)를 마당에서 추게 하니, 이런 일마저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랴?”라고 말씀하셨다.


 팔일무는 천자만이 궁궐에서 벌일 수 있는 무용 공연입니다. 천자는 8줄, 제후는 6줄, 대부는 4줄, 선비는 2줄로 공연의 규모가 정해져 있었지만 계씨는 제후의 신하인 대부임에도 두 단계 위 규모로 사회적 규범을 어겼습니다. 춤추는 것 가지고 속 좁게 계씨를 비판한 공자가 쪼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작은 혼란은 도미노 효과를 불러일으켜 큰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음에 우리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중심제의 권력을 경계하는 것은 오로지 국민의 몫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닌 재상적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은 대통령을 필두로 하는 정권의 의지가 아니라, 국민의 의지가 주축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내부자들'

삼권분립, 삼공이냐 삼환이냐


 국가의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의 세 갈래로 나누어 견제하도록 하는 조직 원리를 삼권분립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입법의 국회, 행정의 정부, 사법의 법원으로 권력의 균형을 맞추도록 하고 있습니다. 삼권분립은 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에서 착안한 생각이지만 세명의 권력자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을 따로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최고통수권자의 자리를 돌려가면서 맡거나, 그 권력을 셋에게 나눈 것에 불과했습니다. 금세 가장 강한 실력자가 나오게 되어 로마는 전제정치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권분립은 주나라의 관직인 삼공에 비유하기 썩 쉽습니다. 삼공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주의 밑에서 군주가 선출한 세명의 신하인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등이 맡은 관직입니다.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대표해서 삼권을 행사하는 국회, 정부, 법원에게 더욱 부합합니다.


『서경』 <주관> 편

立太師、太傅、太保,茲惟三公. 論道經邦,燮理陰陽

태사, 태부, 태보를 세우니. 이들을 삼공이라 부른다. 도를 논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


 현재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은 그 취지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권력이 독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 서로를 견제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마치 노나라에서 권력을 두고 다투었던 유력가문인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의 삼환을 보는 듯합니다. 국회는 국민을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하고, 법원은 국민을 위해 법률을 적용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을 위해 법 아래에서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대한민국의 사법 개혁안, 특정 정치인의 구속안, 국가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나라의 주인을 보좌하는 일에 주력하는 삼공과 서로를 물고 뜯는 삼환 가운데,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이 어느 쪽에 가까워야 하며, 실제로 어느 쪽에 가까울지는 국민이 판단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논어』 계씨 3

孔子曰: “祿之去公室, 五世矣 政逮於大夫, 四世矣 故夫三桓之子孫, 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녹이 공실을 떠난 지 5세대가 되었고 정치가 대부에 미친 지 4세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삼환(三桓)의 자손이 적은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 정계에 있을 때에는 군주에게 가야 할 세금이 모두 삼환에게 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2살 배기 갓난쟁이인 선공이 노나라의 21대 군주로 즉위하자 세 가문은 그 권력을 빼앗습니다. 이후 성공, 양공, 소공까지 4번, 공자가 섬긴 정공까지 군주가 5번이나 바뀌도록 삼환의 횡포는 지속됩니다. 노나라의 모든 사람은 삼환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만 공자는 달랐습니다. "저놈들의 자손이 적은 이유가 다 있다." 이 말의 뒤편에는 이런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는 아예 저놈들의 씨가 마를 것이다." 그들의 몰락을 당당하게 예견한 것입니다. 정치의 본질을 망각한 채 권력다툼만을 일삼는 기득권의 말로란, 그의 생각에 뻔한 일이었습니다.


 공자의 예언, 사실상 저주에 가까운 폭언놀랍게도 적중합니다. 목공이 즉위하고 여러 인재를 받아들인 노나라는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삼환을 중앙정계에서 쫓아냅니다. 삼환의 몰락은 몇몇 훌륭한 인물의 능력에 밀려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삼권분립이 삼권분립으로 있기 위해서, 저는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역시 국민이 투표를 통해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무총리, 국무위원, 대법관의 임명에 있어서도 국회가 아닌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의 주권의식과 정치에 대한 관심이 개선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영화 '남한산성'

유교가 허락하지 않은 당파싸움, 붕당정치의 계보


 대한민국은 정당 설립을 자유로 하고,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힘든 상황입니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참신한 의견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단지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를 앞세운 거대양당이 대립과 갈등의 정치로 이 나라의 이념적 양극화를 더욱 불거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기괴한 정체성 정치는 마치 국민의 부류를 절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내편 네 편을 가릅니다. 한남과 한녀, 주공아파트와 시그니엘, 수구꼴통과 종북좌파, 틀딱과 MZ, 빨갱이와 친일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개쌍도와 전라디언, 부자와 서민 등 이제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지는 이분법입니다. 대한민국에도 저마다의 완충지대가 없지 않을 텐데, 언론은 저널리즘의 기본 정신을 잊고 자극적인 뉴스만을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파편화된 논쟁뿐입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어 보이는 무의미한 말싸움에 지치고 분노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의 원인을 조선시대 사대부의 붕당정치에서 찾습니다. 조선개국 공신세력이 주축이 되었던 훈구파가 소멸함에 따라 집권하게 된 사림파는 분열을 거듭해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등의 세력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이 파벌을 이루고, 정치적 숙청인 사화를 유도하며 서로 싸운 모습이 현대에 다시 재현된 것입니다. 나아가 현대정치가 붕당정치의 폐단을 답습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실은 유교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도 적지 않게 나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정치생태계에서 편당을 이루고 이권을 위해 갈등한 사례는 어느 곳에서건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유교는 이러한 정치형태에 대한 염증이 낳은 가르침입니다.


『논어』 위령공 21

子曰: “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공자께서 “군자는 자긍심이 있되 다투지 않고, 모이되 무리를 짓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논어』 위정 14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공자께서 “군자는 두루 아우르되 치우치지 않고 소인은 치우치면서도 두루 아우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군자는 자긍심을 가지고 신념을 관철하는 존재이지만 비생산적인 다툼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한편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가지고 퇴행적인 정체성 정치 집단을 만드는 정치인도 아닙니다. 붕당정치에서, '군자당(君子黨)', '소인당(小人黨)'의 이름에 당(黨)이 들어간 시점에서 유교의 가르침과 어긋난 셈입니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아무리 군자당이라고 지칭하더라도 이미 소인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원내정당인 국민의 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이 당명에서 국민, 민주, 정의를 말하고 있음에도 국민에게 크게 와닿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국민, 민주, 정의는 힘과 이익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가치이거늘, 그들은 선거득표수와 국회의석수에 목을 매며 정치공학적인 판단과 당리당략을 우선하지 않습니까?


『논어』 자로 16

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섭공이 정치를 물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정치는 사람을 모으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모으기 위해 갈등을 조장한다면, 저는 그것이 정치가 아니라 단순한 기득권 추구이며 협잡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공약과 인신공격성 꼬리물기로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국민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닙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중도층 비율은 사상 최고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정치 혐오로 변질된 순간부터, 정치권은 그들이 써먹던 협잡으로 인해 끌어내려질 공포를 느껴야 하겠습니다. 정치는 공자의 말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오도록 하는 일입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면 멀리 있는 사람은 저절로 찾아올 것입니다. 갈라치기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비겁한 수보다 표심을 모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영화 '킹메이커'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 정치(治)하는 국민


 이제 우리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허공에서 서로 부딪칠 뿐인 말들을 길바닥에 패대기쳐야 합니다. 땅 위에서 바로설 수 있는 실용정치, 민생정치의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합니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들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치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비열한 배신, 피를 부르는 잔혹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여야협치를 넘어 모든 국민이 정치적 소통에 원활하게 참여할 수 있는 말의 길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개인의 의견을 적당히 뭉뚱그려서 여론으로 만드는 한계에서 벗어나 공론장을 통해 과장과 편향에 맞서야 합니다.


『논어』 안연 11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제경공이 공자께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가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논어』 학이 11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멀리서 찾아오는 벗이 있으니, 즐겁지 아니한가!


 일반인 국민이 전문직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정치인다움'이 있습니다. 국민은 정치인에게 인간으로서의 탐욕을 버리고 청렴하길, 쉼 없이 성실하길 바랍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몸을 바쳐서 해결해 내는 유능함과 헌신을 바랍니다. 맞습니다. 정치인도 사람인 이상 무리한 요구입니다. 정치는 모두의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 떠밀 수 없습니다. 정치인다움이 있다면 마땅히 '국민다움'도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백성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입니다. 앞서 대통령을 신하에 가깝다고는 했지만, 개인적인 바람으로 국민과 정치인의 관계는 서로에게 이끌리는 정치적 벗이었으면 한결 좋겠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정치는 이제 진저리가 나니, 앞으로의 유교는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정치를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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