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말한다. 지구 최강의 언어는 스페인어이라고
자랑할 것 그닥 없는 비루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뭔가 특출 난 게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1) 밥 빨리 먹는다 (2) 타이핑을 빨리 한다 라고 답했다. 20대 그리고 30대 때는 실제로 그런 말을 뻔뻔하게 하고 다녔다. 지금까지 밥을 함께 한 사람 중에 나보다 빨리 밥을 먹는 사람은 두엇 밖에 보지 못 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먹방 유튜버들과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 요즘은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것도 못 된다. 키보드 타이핑도 나름 빠르다고 생각했으나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것도 의미 없다. (나의 뚱뚱한 엄지손가락이여...)
만일 같은 질문을 지금 받는다면 (3) 남미를 세 번 가봤다,라고 답하겠다. 지구 정반대 편 남미, 한국인으로서 일생에 딱 한번 여행하기도 쉽지 않은 곳인데 세 번이나 다녀왔다니 나름 운이 좋았다. 만일 운이 좋은 것도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다면 세 번의 남미 여행을 나의 가장 강력한 그리고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고 싶다. '그건 운이니까 자랑거리로 취급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아아... 절망이다 절망.. 내 자랑거리 돌려줘요. 엉엉. 다시 (1),(2)로 돌아갈 순 없어. 엉엉
자, 남미 이야기를 써야겠다 싶었는데 어째 이상한 데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남미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그보다 먼저 스페인어, 기억나는 단어 몇 개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이 언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어가 얼마나 많은 국가에서 쓰이는지부터 얘기하려고 지도를 구글링 해봤는데, 생각보다 색칠이 많지 않다. 살짝 민망. 그렇지만 스페인어를 모국으로 사용하는 국가는 모두 21개국으로, 스페인 및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이다. 국가 수로는 영어에 밀리지만, 사용인구수로는 중국어에 이어 2위로 영어보다 앞선다. 5억 명이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반면, 영어 모국어 사용자는 3.8억명이다. 인구수로만 압살 하는 중국어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와 스페인어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고교과정에서 스페인어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공교육의 작지만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대부분의 남학교는 독일어를, 여학교는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택했다. 요즘 교육과정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중국어도 제법 한다고 들었다. 만일 스와힐리어 같은 걸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면 호감이 갈 것 같다. 응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나의 경우는 남학교 주제에 프랑스어를 했지만. 봉쥬흐 므슈. 빠흐동.
프랑스어도 이탈리아어도 규칙을 정확히 따르는 발음법을 가진 언어지만 스페인은 특히 더 쉽다. 어느 정도냐 하면 15분만 공부하면 스페인어는 무조건 읽을 수 있다, 고 장담한다. 프랑스어의 경우 'ㄹ'과 'ㅎ' 발음 중간의 'r' 이라든가 우리에게는 없는 모음인 [ø] [œ] 같은 어려운 발음이 있지만 스페인어는 그조차도 없다. 대원칙은 바로 이것, 알파벳을 발음기호대로 읽으면 된다. 심지어 단어도 영어와 상당히 비슷한 터라 - 이 역시 라틴어를 근간으로 하는 유럽어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 우리가 아는 영어 단어를 철자 그대로 읽으면 스페인어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교육(education)'은 스페인어로는 '에두까시온', '가능하다(posible)'는 '뽀시블레'다. 그럼 '불가능하다'는 스페인어로 뭘까? 물론 '임뽀시블레'다. 껄껄껄.
발음기호대로 읽는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발음 규칙을 몇 가지 써보자.
- 모음 'a e i o u' 는 말 그대로 '아 에 이 오 우'로 발음이 난다. (프랑스어 'u'는 '위'로 발음된다)
- 자음은 발음기호 대로다.(b d k m n f p r s t v) f와 v를 p와 b와 똑같이 발음해도 무방하다.
- 'c'는 영어와 동일하게 a o u 앞에서는 'ㄲ', e i 앞에서는 'ㅆ'로 발음
- ㅋ ㅍ ㅌ 격음은 ㄲ ㅃ ㄸ 경음으로 발음한다
여기까지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발음법. 다음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에 외워야 할 규칙이다.
- 'h'는 묵음. 스페인어에서 h가 나오면 사뿐히 무시하면 된다.
- 'j'는 'ㅎ' 발음.
- 'g'는 a o u 앞에서는 'ㄱ', e i 앞에서는 'ㅎ'으로 발음
자, 이 규칙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 당신은 이제 스페인어 문장을 99% 수준으로 발음할 수 있다. '매우 고맙다'의 뜻의 'mucho gracias'를 읽어보시라. 무초 그라시아스. 딩동댕. 'I'm hungry. Give me food'를 스페인어로 하면 'tengo hambre. Dame comida'인데 이건 더 쉽다. '뗑고 암브레. 다메 꼬미다'
자, 이제 당신은 스페인이나 중남미 여행을 가서 굶어 죽을 일이 없게 되었다. 껄껄껄.
앞서 말했듯이 스페인어를 비롯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 등이 라틴어 기원의 로망스어들이다. 프랑스어는 발음이 어렵기도 하고 발음 규칙도 복잡하다. 포르투갈도 마찬가지. 포르투갈어는 스페인어와 92%가량 유사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 얘기하면 뜻은 대충 다 통한다고) 프랑스어 양념이 들어간 스페인어 느낌이다. 아마도 비음 때문이겠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도 각자 서로 말하면 대충 통한다는데, 두 언어가 라틴어의 원형과 가장 가깝다고 한다.
스페인어권에 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일요일에 꼭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에 가보라고 권한다. 스페인어 국가는 예외가 없다고 할 만큼 대부분 카톨릭 국가이고 당연히 구역마다 성당이 있다. 묵고 있는 숙소에서 도보로 몇 분 내로 성당에 갈 수 있다. 미사에서는 신부가 (당연히) 스페인어로 미사를 집전하며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성가대의 스페인어는 상당히 멋지게 들린다. 지금은 사라진 라틴어 미사가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중세 시대를 떠올리는 분위기가 물씬 흘러넘쳐서 어딘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들고 불숙 일어설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나) 꽌또 께스따?
(세탁소 직원) 싱껜따 솔레스.
(나) 싱껜따? 시.
(세) 요 예가다 아끼 마냐나 데 마냐나 노체스.
(나) 사바도? 오 도밍고?
(세) 시. 도밍고 노체스. 시에떼.
2017년에는 세 번째 남미 여행을 앞두고 3시간 X 4회짜리 생존 스페인어 강습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덕분인지 페루 쿠스코에서 빨랫감을 세탁소에 맡기며 위와 같은 대화를 어눌하지만 나눌 수가 있었다. 모레 일요일 밤 7시에 세탁물을 찾으러 와라. 요금은 50솔. 그런 정도의 의사가 전달되었다. 12시간 정도의 강습과 필요 단어 열심 암기로 이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까요. 스페인어란 이렇게 위대한 겁니다. 여러분.
알그몰그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 지구 반대편 남미. 예전에 남미가 진짜 한국의 반대편인지 궁금해서, 서울에서 땅을 파서 일직선으로 지구 중심부를 통과하면 남미 어디에 닿게 되나 알아본 적이 있다. 물론 경도와 위도를 이용했다. 정확하지 않지만 내 기억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00km 떨어진 대서양 앞바다가 정확히 서울의 지구 반대편이다.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자, 여기 삽.
그런데 지구 반대편이라는 게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도 어마어마한 곳인 건 맞다. 딱 잘라 말하면 한국에서 남미로 가는 직항이 없을 정도다. 현재 여객기로는 아무리 연료를 꽉꽉 채워도 한국에서 남미로는 바로 갈 수가 없다. 예전에 대한항공이 브라질 상파울루 가는 직항편이 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인천을 출발해 LA에 가서 기름을 채우고 상파울루로 갔으니 엄밀히 말하면 직항이 아니다. 현재 라틴아메리카로 가는 유일한 직항은 아에로멕시코의 인천-멕시코시티 편이다. 그조차도 멕시코시티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는 편서풍으로 인해 연료 소모가 더 많아서 직항으로 오지 못하고 멕시코의 서쪽 끝 도시인 몬테레이에 들러 기름을 다시 태우고 인천을 향했다. 최근에는 항공기 효율이 좋아졌는지 혹은 최신 기종으로 바꾸었는지 멕시코시티에서 인천으로 간신히 한방에 온다는 얘길 들었다.
- 스페인식 햄인 하몬(jamon)은 프랑스어로는 장봉(jambon)이다.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잠봉뵈르 샌드위치'의 '잠봉'이 바로 '햄'이자 '하몽'이다. (국가별로 만드는 방식은 물론 조금씩 다르겠지만) 단어가 비슷하게 생겼거나 발음이 비슷하다 싶으면 이런 식이다. 로망스어들. (엄밀하게는 영어는 로망스어가 아니라 게르만어로 분류되지먄) 아무튼 그건 그렇고. 스페인어와 가장 닮은 이탈리아어로 햄은 뭘까? 어이없게도 '프로슈토(prosciutto)'다. 뭐, 규칙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니까.
- 사소하지만 심화 과정으로서의 스페인어 발음 규칙 몇 가지 더
스페인어에서 s 발음은 좀 세기 때문에 'ㅅ'보다는 'ㅆ'에 가깝다. 'z'는 th에 가깝다. 귀찮으면 s든 z든 '쓰'로 발음해도 무방.
'r'은 'ㄹ' 발음이지만, 'r'이 연달아 붙어있는 'rr'은 혀 끝을 입천정에 붙이고 바람을 강하게 내뿜으며 드르르르 떨면서 '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리고 단어의 제일 앞에 오는 'r'도 'rr'과 동일하게 혀를 떨면서 발음한다.
'll'은 'y'라고 생각하면 된다. calle는 '까예', 'pollo'는 '뽀요'
스페인어에만 있는 철자인 'ñ'은 'ny'라고 생각해주면 된다. 'ñe'은 '녜'로 발음된다.'ña'은 '냐'
- 세비야의 대표적인 관광지. 순서대로 스페인 광장, 메트로폴 파라솔, 세비야 대성당이다. 세비야의 철자는 Sevilla. 그런데 혹시 '세빌리아의 이발사'라는 오페라 제목이 기억나시는지? 이 '세빌리아'가 바로 '세비야'다. 그러면 '세비야'가 어쩌다 '세빌리아'가 되었을까? 이 작품의 작곡가인 로시니는 이탈리아인이며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세비야의 이탈리아식 이름인 시빌리아(Siviglia)가 제목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시빌리아'도 아니고 '세비야'도 아닌 '세빌리아'라니,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음악계에 혹은 교육계에 높은 자리에 계셨던 어르신 누군가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한쪽으로 택하지 못하고 봉합하는 방식으로 이 오페라의 국문 제목을 정한 건 아닐까. '세'비야 + 시'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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