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개인회생은 타이밍이다.
2015년 봄 나는 엄마와 함께 법원 인근의 법무사 사무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파산했으며 이제부터 우리 집에 엄마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아내에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지고 있는 빚이 상당한 금액이며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엄마가 가지고 있는 빚의 총액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다. 두려웠던 것이다. 빚이 얼마냐고- 이자로 한 달에 얼마를 내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순간 나는 나도 엄마와 함께 그 빚에 사로 잡혀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빚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거기에 없는 것인 양 모르는 척하고 살았다. 그러니 그냥저냥 살만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파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은행원으로서 파산에 대해 알아야 할 유일한 지식은 파산에 들어간 사람에게 채권추심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뿐이다. 파산하면 그냥 그것으로 쫑이니까- 그때 채권 추심을 하는 것은 불법이니까. 그러다 우연히 여신 관련 법률 수업을 듣게 되었고 그 과정 중에 일부가 파산과 회생절차에 할애되어 있었다. 은행의 관점에 파산 제도를 설명하는 반쪽짜리 수업이었지만 파산과 개인회생의 대략적인 구조는 알 수 있었다. 그전에도 나는 네이버에서 파산이나 개인회생에 대해 검색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네이버는 파산이란 시스템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대부분의 포스팅이 빚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등 처먹으려는 못돼 먹은 상술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는 파산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파산이란 단어가 가진 그 낯설고 파괴적인 이미지로 인해 그 이상 파산에 대해 알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파산에 관한 지식은 심폐소생술만큼이나 우리 삶에 중요하고 요긴할 수 있다고. 심폐소생술과 파산에 관한 지식 모두가 대체로 평소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앞에서 누군가 죽어갈 때 그를 살릴 수도 있다. 심지어 심폐소생술과는 다르게 파산에 대한 지식은 죽어가는 자신을 스스로 살릴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빚이 많았다. 명확히 보이지 않고 막연했지만 나는 거대한 빚이 내 곁에 존재하며 언제인가 그것이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런데 파산에 대해 알게 된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 몰래 연차를 내고 엄마 집으로 갔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엄마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빚의 액수와 채권자들 그리고 그 이자율을 물어보았다. 생각보다 더 큰 금액이었다. 나는 그것을 엑셀에 입력했다. 그리고 엄마 식당의 포스기에 가서 과거 3년 치 매출액을 뽑아보았다. 매출액에 엄마 가게의 수익률을 적용하여 향후 5년 치 현금흐름을 산출했고 그것을 앞으로 지불해야 할 이자액과 비교하여 보았다.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자율이 너무 높았다. 대다수의 수익이 원금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이자로 다 지급되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부족해서 빚이 점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내게 꼬박꼬박 학비며 용돈을 보내주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파산을 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파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이야기했다. 우리 집에 같이 살자고-엄마도 일을 해야겠지만 다 같이 돈을 벌고 아껴 쓰고 또 내가 책을 쓰고 어쩌면 그것이 대박이 나고 안되면 또 다른 것을 하고 그러면서 살자고 이야기했다. 당시엔 그게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당시도 정확한 파산의 프로세스와 그 요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네이버는 물론 구글에 검색해보아도 뭐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미치도록 쪽팔렸지만 내가 예전에 지점에서 같이 일했던 법무사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파산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그는 근저당과 소유권 이전에 관해서는 빠삭했지만 파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좀 더 현실적이고 유용한 조언을 내게 주었다. 법원 근처에 가면 파산 관련 법무사 사무실이 많이 있으며 거기에 가면 상담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법원 근처의 법무사 사무실로 갔다.
여기서 나는 이 글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조언을 공유하려고 한다. 만약에 빚 때문에 힘들다면(혹은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집 근처 법원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법원 주변에는 개인회생/파산이라고 써붙인 법무사 사무실이 무더기로 있을 것이다. 그중 아무 곳이나 하나에 들어가면 된다. 나는 연차를 냈지만 대부분은 반차만 내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처음 엄마와 함께 그중 하나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배 나온 아저씨 두 명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마치 90년대 마을회관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아저씨 한 명이 텔레비전을 켜며 장기판에서 눈을 떼었다. 다른 아저씨 한 명은 장기판에서 좀 체 눈을 떼지 못하고 일어나서는 안으로 들어오라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마치 병원에서 감기약을 처방하는 의사처럼 이야기했다. 그 따분하고 심드렁한 목소리가 위안이 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과잉 부채가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며 감기처럼 인류 보편적인 상황이란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사실이었다. 아마도 과거 수백 명의 개인회생/파산을 도왔을 그에게 우리는 전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우리는 파산이 가능하다는 처방전을 받았고 파산절차를 진행해주는 대가로 30만 원(혹은 60만 원이었던가?) 정도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와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다시 오겠다고 이야기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책상에는 상담료가 15분당 1만 원이라고 출력해 붙인 종이가 있었다. 상담은 20분 내외 진행되었지만 그는 상담료를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주차 티켓도 공짜로 주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장기판으로 돌아갔다. 그날 법무사 두세 곳 정도 더 돌아다녀 보았다. 대부분 대동소이한 상담을 받았고 상담료를 낸 곳은 하나도 없었다. 두세 번 설명을 들으니 대부분의 내용이 손에 잡힐 듯 이해되었다. 심지어는 파산이란 절차가 어떤 의미에서는 핸드폰을 사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핸드폰 요금제의 경우 아무리 많은 가게를 들러도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파산은 매우 단순한 체계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채무자가 갚을 수 없는 빚이 있고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자산과 빚을 모두 퉁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퉁치고 부족한 돈은 채권자들이 손해보고 그것으로 채무관계는 종료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이자지급 의무도 원금상환 의무도 채무독촉 전화도 영원히 사라진다. 상담을 마친 엄마와 나는 법무사 사무실에서 나와 근처 커피집으로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봄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는 우선 채권자들과 통화를 해보겠다고 이야기했다.
엄마의 경우 바로 파산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돈을 빌린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매우 가까운 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빌린 돈도 포함해서 말이다. 대다수의 파산 대상자가 파산을 망설이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들은 최초 1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지만 빚이 늘면 1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가 없어지게 된다. 2 금융권, 사채 이렇게 부채의 질이 악화되며 최종적으로 지인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 것이다. 지인에게 빌린 돈은 여러 가지 부채 중에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 파산을 하게 될 경우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적 측면에서도 완벽한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망설인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생각해보라고 한 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엄마는 혼자서 채권자들에게 전화를 했다.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미안하다고. 파산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그런데 가급적이면 돈을 갚고 싶다고. 그런데 이자율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고. 이자만 뺀다면 갚을 수 있다고. 오래 걸리겠지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보도 셰퍼라는 작가가 쓴 "돈"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보도 셰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채권자들이 당신한테서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판단하게 되면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돈에도 만족한다." 사실이었다. 모든 채권자들이 엄마에게 빌려준 돈의 이자율을 조정하는데 동의했다. 물론 그 과정이 평화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엄마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심정으로 들었을지 나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 이후로 4년이 지났다. 이후 엄마의 식당이 자리를 잡고 꽤 많은 빚을 갚았다. 파산을 하지는 않았지만 파산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한 번의 재기 가능한 기회를 잡은 것이다. 파산이란 제도는 사실 엄마의 채권자들에게도 유용한 기회가 되었다. 파산이란 제도가 없었다면 채권자들은 결코 상환되지도 소멸되지도 못할 채권만 가지고 손가락만 빨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출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 있다. 어떻게 신용등급을 관리하는지, 어떻게 저렴한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좀 더 한도를 뽑아서 많은 금액을 대출받을 수 있는지 때로는 은행원인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파산이나 개인회생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이것이 마치 비행기를 타면서 구명조끼 사용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대출을 받으면서 이 돈을 못 갚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금융기관들 대다수도 돈을 빌려주면서 못 돌려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다 뭔가 일이 터진다. 누가 아프거나, 직장을 잃거나, 주식이 떨어지거나, 도박을 하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이자 내기도 버거워지는 상황이 온다.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대개 이 시점에 감을 낌새를 잡는다.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면 대출 조건을 조금씩 타이트하게 바꾼다. 담보를 요구하고, 기한연장 주기를 1년에서 3개월로 줄이거나, 만기 일시 상환방식의 대출을 분할상환 방식으로 바꾸거나, 대출 이율을 높이거나, 상환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 차주는 자연스럽게 2 금융권으로 이동하게 된다. 2 금융권에서도 상황이 나이지지 않으면 연체가 시작된다. 그렇게 사채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사채를 사용하면 상황은 당연히 더 악화된다. 지인들에게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서 당장 연명하기 바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적당히 처신을 못하고 잔인한 사채업자와 추심업자를 만나면 영화에서 볼법한 일들이 실제로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설사 운 좋게 그전에 파산을 한다고 할지라도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파산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인간관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오랜 시간 가혹한 과정을 지나며 겪었을 당사자와 그 가족의 고통은 어떻게도 보상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파산/개인회생은 타이밍이다. 적당한 시점에 손들고 파산을 하거나 개인회생을 했다면 산뜻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은 더 얻을 수 있다. 어쩌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할지 모른다. 세상에는 파산을 했지만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들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시점에 자신이 결코 변제할 수 없는 빚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리셋 버튼을 누르는 용기와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 그 시점은 제2 금융권 대출(저축은행과 캐피털의 대출 내지는 카드사의 현금서비스)이 연체되기 시작하는 시점 언저리일 것이다. 이 시점까지는 제도권의 대출들이다. 여기서 손을 들면 재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수위를 넘어 지인에게 돈을 빌렸다면 파산을 통한 재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한다. 파산/개인회생은 타이밍이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절한 조치는 한 사람의 삶, 한 가족의 삶을 구할 수도 있다.
다음글에서 계속...
제 주변 동료 중에 한 분이 개인회생 중이라는 것을 최근 알게 되었습니다. 전혀 알지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것이지요.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파산이나 개인회생은 이혼만큼이나 일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혼과 다르게 파산, 개인회생은 좀처럼 밖으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산이나 개인회생을 하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과다 부채로 어려움을 겪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말이죠. 특히나 요즘은 연체도 급증하는 추세이고 자영업자 폐업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대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주변에도 과다 채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파산에 관한 지식이 모든 재테크 책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펀드나 신용카드 같은 주제보다 훨씬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든 언급한 재테크 서적은 보도 셰퍼의 "돈" 정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마저도 조금은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저는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파산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많이 공유해주세요.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 글에서 파산과 개인회생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파산과 개인회생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이와 유사한 다른 제도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이 두 가지 제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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