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온 가장 어두운 밤

by 산들바람

스무 살부터 10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오며 생각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서른부터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행복한 삶이 펼쳐지겠지.’

아니,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았던 20대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30대는 반드시 행복한 삶이 펼쳐져야 한다고 내 삶에게 언포를 놨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맞벌이하며 돈도 벌고 계획대로 아이도 둘째까지 낳고 당당히 복직하는

이런 평범한 결혼생활을 꿈꿨다.

그때 내 주변 지인들은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했기에 당연히 나도 그렇게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야속하게 내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이직한 회사 업무가 아쉬움은 있었지만 월급날이 나를 위로해 주었기에 버틸 만했다. 위태로웠던 집안 형편도 가족 모두가 합심하여 극복해 안정감을 찾았고, 나는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 ‘어떻게 한 푼이라도 더 모을까’라는 생각으로 돈을 모으며 안정감을 찾아갔다. 삶이 안정을 찾으니 자연스레 결혼을 꿈꾸게 되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라고 생각해서 늘 마음속에 품고 행동했던 거 같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친오빠를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지인의 오빠가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진작 들어 알고 있었고, 마침 지인의 결혼식에서 그를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첫인상이 무척 선하고 호감 가는 얼굴이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지인 친오빠라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만나보기로 했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작정이라도 한 듯, 두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남편의 직장은 안산, 내 직장은 서울이었는데 1시간 거리를 감수하며 남편은 매일 서울까지 왔고, 정말 불같이 뜨거운 연애를 했던 거 같다. 심장이 아플 만큼 너무 설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행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불청객처럼 나에게 축농증(부비동염)이 찾아왔다. 그때까지 어디 아파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가볍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축농증은 알레르기 비염이 되었고 급기야 폐 기능까지 위협했다. 밤마다 멈추지 않는 기침 때문에 일주일 넘게 밤을 지새웠고, 모두가 잠든 정적 속에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나의 고독과 고통을 묵묵히 위로해 주었다.

밤새 잠 못 이루는 나를 걱정하며 엄마 역시 새벽마다 자주 깨곤 하셨다. 대학병원을 갔지만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오진으로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믿었던 대학병원에서조차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자 마지막 희망으로 한의원을 찾았다. 침을 맞고 값비싼 한약까지 지어먹어 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새벽 공기를 가르는 지독한 기침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다 우연히 회사 근처의 한 이비인후과 의사를 만났다. 그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그토록 괴롭히던 기침이 멎는 순간,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간절히 원하면 결국 귀인을 만나게 된다’는 말을 다시금 실감했다. 매일 아픈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미안해 남자친구(지금의 남편)한테 2주 정도 연락을 하지 말자고 했고, 약을 먹고 기침이 좋아지는 시점에 나는 다시 남자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나에게 달려와 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며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준비했다.


(나의 글을 처음부터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정신병이 있었고 아직 잔재가 남아있긴 했지만 일상생활(대중교통도 잘 타고 TV 드라마도 보기 힘들었던 나는 뉴스도 볼만큼 회복했다) 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그 잔재라 함은 보통 사람들보다 새로운 일을 시도함에 있어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조금 더 큰 정도였다.

그때 당시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설렘보다는 두려움(불안감)을 극복해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다.

2019년 32살, 결혼식이 너무 두려웠지만 성당(종교가 천주교)에서 무사히 잘 마쳤다. 남편의 철저하고 세심한 계획 덕분에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던 서유럽 신혼여행도 낯설지만 오롯이 즐기며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신혼 때 기억에 남는 큰 도전은 ‘운전면허증 취득’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들이 운전할 일이 많다’는 소리에 아이를 갖기 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운전대를 잡는 일은 마치 죽으러 가는 길처럼 공포였지만, 언제까지 두려움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 번의 낙방 끝에 세 번째 시험에서 ‘합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운전이 현재의 나에게는 설렘과 재미가 되었듯, 두려움은 결국 부딪쳐야 사라지는

환상일 뿐.




다시 나의 결혼생활 이야기로 돌아와 본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리 때도 아닌데 부정출혈이 시작되었고, 자궁내막 용종이라는 진단을 받아 갑작스럽게 (용종 제거) 수술을 하게 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주

긍정적이어서) 이것만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내 삶은 나의 낙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흘러갔다, 여전히 지독한 알레르기 비염이 나를 괴롭혔고 대학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니며 약을 먹어야지 증상이 호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면역력이 무너지며 평생 걸려본 적 없던 방광염을 시작으로, 하나의 병이 나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또 다른 병이 찾아왔다. 어떻게든 회사에 다니며 버텨보려 애를 썼지만, 야속하게도 상황은 자꾸만 나를 일터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건강 회복과 2세 계획을 위해 2020년, 결혼 1년 만에 퇴사를 했다.

입원만 하지 않았을 뿐,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지내는 날들이 많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남편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짐’이 된 것 같은 기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며, 나는 또 지독한 터널 속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했다.



"두려움은 부딪혀야 사라지는 환상이다."

“때로는 그저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길일 때가 있다."

<산들바람>



백지 위를 채워나가는 것,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

힘들 거라는 건 알았지만 내 일상생활이 바뀔 만큼 이렇게 큰 것인지 몰랐다.

매일 이 백지를 채워가는 브런치 작가들이 진심 존경스러웠다.♥

해보기 전에는 감히 그게 가늠이 안된다. 해보니 참 힘든데 완성하면 많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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