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도시 플로렌스로

Rome to Florence

by sandew

꽃의 도시 플로렌스(이탈리아어로는 피렌체)

앞으로는 꽃의 느낌을 강조하고 싶을 땐 플로렌스로, 도시를 지칭할 땐 피렌체로 쓰겠다.
왜 통일하지 않냐고? 그건 작가 맘대로.

절묘하게도 이 도시가 르네상스가 꽃피운 도시가 되었으니 사람이나 도시나 역시 이름을 잘 지어야 해?!


여행이라는 건 리조트 안에만 머무는 휴양을 제외하고는 어찌 됐건 집을 떠나 정해져 있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써야 하니 시차 적응은 여행의 가장 쉬운 파트이다. 내일 일정은 내일 생각하자며 쓰러져 잠들어 6시에 눈이 반짝, 이토록 개운한 아침이라니!

아침_하늘과 메뉴.png 청량한 아침과 실망 없던 아침

숙소 앞 카페에 나가 돼지고기 햄 샌드위치와 아이스가 없는 아이스블랙 더블과 오렌지주스가 오늘의 아침. 별 기대가 없어져서 더불어 실망도 없어졌다. 꽤나 유용한 상관관계다.


아침부터 기분이 방방 뜨는 건 오늘 피렌체로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로마는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르네상스의 본체(?)인 피렌체로 간다는 건 이번 여행의 본궤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직행한 터라 테르미니 역에는 처음 왔는데 구도심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복잡한 곳이다 보니 소매치기도 더 신경 쓰이고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에 역 또한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다 보니 아침에 방방 뜨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기차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가 비는데 앉아서 쉴만한 곳은 없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마땅찮은 가운데 덜렁덜렁 가방을 옆으로 메고 터덜터덜 걷는 딸내미가 자꾸만 거슬린다. 가방 잘 보고 있지? 옆으로 매지 말고 앞으로 매라니까, 두어 번(실제로는 더 될 것임) 확인하자 결국 짜증을 확 낸다. 급화가 올라왔지만 한번 넘어갔다. 서점이 시원할까 들어갔다가 역시나 똑같아서 돌아 나오는 길, 어디 좀 앉으면 안 되냐고 괜히 돌아다니고 있자나, 그러게 일찍 왔으니 그렇지 한마디를 붙인다. 결국 겨우 눌러놓은 화가 터졌다. 그러면 니가 한번 찾아보라며 화를 벌컥 내고는 그때부터 침묵, 또 침묵.

투덜 투닥, 고새 풀림

딸과의 여행은 좋을 땐 알콩달콩 너무 재밌지만 늘 이렇게 위태위태한 순간을 맞는다. 무사히 탐승 후 긴장이 풀어졌는지 잠시 침묵 끝에 또 스르르 풀어진다. 모녀는 그런 거다.


가는 동안 공부도 하고 일정도 점검(?)할 예정이었지만 어느새 또 자다 깨다…12시가 좀 못되어 도착했다.


역시나… 덥고 눅눅하다.

교통편을 모르니(자느라 또 못 알아봄) 방법이 없다. 숙소가 멀지 않아 도시도 구경할 겸 걷기로 했다. 다행히 로마의 촘촘한 돌바닥보다는 넓은 타일형 바닥이라서 짐가방을 끄는 게 힘들지 않았다. 구글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아르노 강을 건너고 있다. 나는 전형적인 배낭여행 세대이다. 물론 20대의 본인은 배낭여행을 가본 적도, 가보고 싶어 했던 적도 없지만 여행가 부모님의 영향으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적잖이 다녔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구글 지도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구글 지도가 없던 시절엔 종이 지도가 있었다. 어려서 우리 집에는 항상 지구본과 세계 지도가 붙어 있었기에 지도는 나에게 친숙한 매개다. 집에서 애들만 키우다 보니 세상 둘도 없을 방향치가 됐지만 젊어서의 나는 방향 감각도 괜찮은 편이라서 한 손에는 지도를,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꽤나 다녔더랬다. 지금의 여행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생산성도 떨어졌지만 핸드폰 화면보다 물리적 지도와 시각적 감각의 결합이었던 그 시절의 여행이 더 낭만적이었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IMG_5514.jpeg 모두가 손바닥 따라 이동하는 이 시대의 여행

체크인을 하고 나오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혈당이 급 떨어졌을 때처럼 갑자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둘 다 너무 배고팠지만 눈을 마주친 순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진짜… 안 내킨다.

파스타도, 샌드위치도, 피자도, 그냥 컵라면 하나 먹었음 딱 좋겠는 걸 보니 미쿡에서 자란 나의 딸도 천상 한국사람이다. 콜라랑 레모네이드(안 시원함) 시키고 깔보나라 시켰는데 고작 며칠 사이에 첫날의 감동이 사라졌다. 그저 느끼할 뿐.

깔보와 피혁.png 꾸떡 깔보와 반지르한 피혁들

느끼함의 도움으로 반짝 기운을 차리고 좋은 시대의 산물인 구글 지도를 검색해 한국 마트를 찾았다. 피혁 제품(피렌체는 예로부터 가족 공예가 유명해서 어딜 가나 가죽 제품을 판다)이 좌판에 깔린 남대문 같은 시장을 지나 다소 외지고 음침한 지역에 위치한 마트는 한국 사람이 주인도 아니고 이것저것 뒤섞인 인터내셔널 구멍가게였기에 라면 네 개 후딱 챙겨 나왔다.

숙소에 와서 라면 타임~!

역시 한국 사람, 라면을 먹고 나니 기운이 솟는다.

어느새 저녁 바람이 선선해졌다. 오후에 잠깐 내린 비로 비 온 후 특유의 청량함이 느껴지는데...

베키오 다리의 아이보리색 건물들이 지는 해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놀랍다.

장엄하다.

경이롭다.

이탈리아에 온 후로 갖은 수식어를 다 붙여도 부족할 듯한 많은 순간이 있었지만,

이 장면만큼은 그저.... 참 아름다웠다.

금빛 베키오.png Ponte Santa Trinita에서 바라본 Ponte Vecchio

꽃의 도시 플로렌스

작고 연약하지만 놀라운 생명력을 품고 있는 작은 꽃 한 송이와 같은 이 도시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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