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꿈만 꾸는...그래도 꿈꾸는 아줌마
많은 일의 시작이 그러하듯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한창 싸이 홈 게시판에 종종 글을 올릴 때 첨부할 내 맘을 한 번에 담아낸 듯한 사진이나 그림을 찾는 건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신나는 일이었다.
사실 개인적인 포스팅이라 보통 검색해서 나오는 이미지를 캡처해서 그대로 쓰곤 했는데 일촌을 넘어서 노출되는 블로그로 옮겨가면서 혹여나 무단 도용 문제가 불거질까 찜찜하던 차, 허접할지언정 직접 그려볼까 싶어 일러스트 학원에 등록했다.
(저작권 문제로 여기 보여줄 순 없지만 당시 내가 고른 그림들은 주로 초딩도 그릴 수 있는 단편적인 장면 위주였다. 물론 그림을 배우고 나니 그건 절대 초딩 실력이 아니었다)
미술, 피아노 학원은 누구나 거치는 시대에 자라 초딩때 아파트 단지 내 가정 화실에서 배운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말 그대로 붓놓고 1자도 모르는 서른 살 왕초짜였지만 우연히 시작한 것치곤 그림은 재미있었다. 현실은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못 그려 두 시간 내내 연필만 깎다가 온 적도 많았지만 일상의 작은 부분을 기억하고 나만의 언어(손길)로 표현한다는 점은 글을 쓰는 일과 꽤 닮아 있어 매력적이었다.
미역국에 말아먹은 꿈
10년이 지났다.
공부를 시작한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고 그동안 아이 셋을 낳았다.
막내가 올해 5살로 킨더에 가게 되었으니 꼬박 10년을 24시간이 모자란 풀타임 육아를 해왔다.
(현재 진행형,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이들이 제대로 프리스쿨을 다니지 못했다)
미술과 글에 대한 작은 열정도 미역국 한 그릇 추가할 때마다 그 그릇에 함께 말아먹은 지 오래다.
그저 그랬던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날, 늘 그랬듯 지치고 지독히도 외롭고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그 밤에 다시 붓과 펜을 들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집 앞밖에 없었으니 집 앞을 그렸고 나무를 그렸고 캠퍼스 타운이 새 학기를 시작하는 활기로 가득 찰 때엔 나도 모르게 어느덧 발밑에 바스락 거리기 시작한 낙엽을 그렸다. 수월한 날엔 잠든 꼬맹이 얼굴을, 힘들었던 날엔 그 날의 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낸 듯한 혼술 한잔을, 공주, 아빠 출근 후엔 오늘 아침에 싼 도시락 반찬을....
야매로 배운 미술 실력이 얼마나 됐을까.
그저 되는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주제도 목표도 없이 그날그날의 생각과 마음을 그렸다.
아이들을 재우고 남은 집안일을 하고 나면 몸은 피곤해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공허함에 기어이 나의 공간에 나와 앉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그 시간은 길어야 30분, 때로는 붓 빨기가 아까울 정도로 짧은 5분일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은 통해 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여전히 하루를 쓰고 그린다. 이제는 부쩍 큰 아이들과 함께 그린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 그리며 그림 속의 우리의 마음을 나눈다
꿈꾸는 아줌마
모두가 꿈을 꾼다.
나도 꿈을 꾼다.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이 책방에 걸리는 그날을.
혼자 끌어안고 있던 마음이 글과 그림으로 전해져 누군가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세지가 되는 그날을.
슬프게도 특출난 재능을 갖지 않은 대부분의 범인들은 누군가의 이루어진 꿈을 부러워하며 쭉 꿈만 꾼다.
하지만 괜찮아요.
내일 세상이 망해도 사과나무 심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 겨우 40대인걸요.
꿈꾸며 오늘을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