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ua_스크로베니 예배당, 로지아(회랑길)
우연한 여행의 시작점 Padua (이탈리아어로는 Padova)
로마-피렌체-베니스까지 르네상스의 3대 도시를 거쳐, 오늘 갈 곳은 이 모든 여정의 시작점이 된 Padua라는 작은 도시이다.
파두아는 베니스에서 서쪽으로 기차로(산타루치아 역에서 파두아 중앙역까지)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15세기 초 해상 대국으로 떠오른 베네치아 공화국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들처럼 자치 도시국가였기에 가까운 거리임에도 역사적 배경과 도시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번에는 자지 말고 창밖 풍경을 보겠어! 다짐할 필요도 없이 금세 도착했다. 베니스에서 가까우니 관광객들로 북적일 거란 예상에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생각보다 한산하고 고요하다. 이 고즈넉한 도시가 르네상스의 시작점이라니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지명 표기: Padova(이탈리아 발음으로는 빠-도-바)는 영어로는 Padua로 쓴다. 이전글과는 달리 Padova라는 현지 지명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에 보편적으로 쓰는 영어 지명인 Padua로 쓰겠습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아레나 채플)
예매가 필수라는 이탈리아의 명소들 중에서도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특히 예약이 까다로운 곳이다. 공식 예매처(https://www.cappelladegliscrovegni.it/index.php/en/)를 통해 예약이 가능한데 여타 이탈리아의 박물관처럼 입장료 자체는 비싼 편이 아니지만 미리 예약을 못해서 관광 상품으로 구매할 경우에는 바가지요금을 각오해야 한다. 예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부 온습도 조절로 인해 소규모 그룹으로 15분 내 관람만 허락된다. 거의 당일치기 수준으로 일정을 짜는 나조차도 이곳만큼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예약했으니 그만큼 기대도 컸다.
중앙역에서 예배당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로 가깝다. 일반적으로 10분이라고 나와 있지만 직진만 할 게 아니라면 이곳저곳 둘러보고 더운 날씨에 쉬엄쉬엄 걷게 되는데 그래도 20분이면 충분하다.
스크로베니 예배당(Cappella degli Scrovegni, 혹은 Arena Chapel)은 아레나 채플이라는 공식 이름보다는 의뢰인 엔리코 스크로베니의 이름을 따서 스크로베니 예배당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중세말 혹은 초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시기에는 농업 중심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동서 간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신흥 지배 계급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금전과 물질을 죄악시하는 중세적 종교관에 비추어볼 때, 그들은 스스로의 신앙적 께름칙함을 해소하고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번 돈을 하나님을 위해 바친다는 의미를 담은 가족 예배당을 지어 온갖 치장으로 신을 찬양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세상적으로는 부를 과시하면서 신앙적 속죄와 봉헌도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훌륭한 해결책이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도 같은 이유로 지어진 가족 예배당이다.
두꺼운 외벽과 좁고 작은 아치형 창문으로 대표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엥?' 싶을 정도로 지극히 소박하다. 그럼에도 결코 낡고 후진 느낌이 아니라 절로 경건함을 갖게 될만큼 고풍스럽다.
너무 서둘렀는지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시간 내 둘러보고 오자니 주변에 뭐가 없어 아까운 시간을 버릴까 봐 혹시나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봤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영어 잘 안 통함)가 대충 손발 이딸리노 잉글리시 끝에 말했다.
이딸리아
에브리띵
포시블
그리고 우린 이전 시간대의 그룹과 함께 입장할 수 있었다.
15분이라는 관람 시간이 야박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채플 안에 들어가면 커다란 공간 하나뿐이라서 시간을 더 준다고 해도 머물만한 곳이 없다. 그럼에도 내부에 들어가는 순간, 소박한 외관과 대비되는 강렬한 푸른색에 압도되고 세상을 놀라게 한 조토의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과 당시 사람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성경 속 장면들을 더듬듯 보다 보면 15분이 너무 짧다. 특히 정면의 최후의 심판(1305)은 200년 후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36-1541)을 떠올리게 하는데 기술적으로는 덜 발전했을지 몰라도 그랬기 때문에 더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느껴져 신앙인이 아닌 사람조차도 '지옥은 진짜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거 같다.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실제와 똑같이 그려진 예배당을 지어 바치는 모습도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본 비오 9세의 기도하는 모습만큼이나 노골적이라서 실소가 나올뻔했지만 역시 그 간절함 앞에 다시 숙연해졌다.
예술이 수단이었던 시대, 혹시나 하나님 몰라주실까 봐 대놓고 드러낸 그들의 욕망은 너무 솔직해서 매력적이다. 우아하고 세련된 오늘날의 교회가 그때보다 결코 더 순수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투박하고 직관적인 중세에 자꾸만 관심이 간다.
파두아는 반나절짜리 코스라서 오전에 후딱 예배당만 보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조금 더 머물고 싶어졌다.
파두아 대학교, 성안토니오 대성당 등 명소들을 둘러보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계속 걸었다.
파두아에는 로지아(loggia)라고 불리는 회랑길이 유독 많다. 길게 드리워진 지붕이 있는 통로에는 상가도 있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도 있어 요즘으로 치면 주상복합 상가의 1층 같은 느낌인데... 단순히 통로일 뿐 아니라 더운 날에는 그늘이 되어주고 궂은 날에는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우리가 크게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던 것도 로지아가 만들어준 그늘 덕이 컸다.
파두아에는 중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중세 이전에도 이후에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명맥을 이어온 도시라서 중세에 머물고 있는 시에나와는 달리 시대별 다양한 양식의 건축과 장식이 공존해 있다. 로지아 또한 반원형 아치뿐 아니라 고딕의 볼트 아치(반원 아치의 가장 높은 곳을 쭉 잡아 올린듯한 뾰족한 형태의 아치), 르네상스 스타일의 기둥 장식 등 입맛대로 골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뻥뻥 뚫린 공간을 걷다 보니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뉴욕의 보행자 길에 설치된 철제 구조물이다. 철봉 기둥에 합판을 깔고 천막을 쳐서 세운 가림막이라 처음에는 먼 공사 구간이 이래 많나 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전 건물 외벽에서 떨어진 장식에 보행자가 사망한 사고 이후, 보행자 보호를 위해 건물 외벽에 필수적으로 설치하도록 시에서 지정한 구조물이다. 임시 구조물 같지 않게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돈해 둔 건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제 막 철수할 예정인 것처럼 얼기설기 노출되어 사정을 알고 봐도 흉물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걷는다는 건 대부분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일 뿐이고 바빠 죽겠구만 가는 길 따위가 머가 중한가 싶은 세상이지만 오랜 시간동안 이곳을 지난 누군가는 앞만 보고 걷고, 누군가는 나처럼 위도 보고 옆도 보고 바람도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을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앞만 보고 사느라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지 못했던 엄마는 걷는 거 자체로 힐링이 되었던 오늘, 이번 여행이 딸의 세상에서 슬로모션을 켠 것처럼 천천히, 오래 마음에 남는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평가라는 의견이 다수지만 여전히 중세는 종교에 짓눌린 '예술의 암흑시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대의 흔적을 품고 르네상스의 영광을 준비하던 중세는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던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고대에서 근대로, 전통적이면서 모던한, 진부하면서도 세련된 이 도시에서 더없이 트렌디한 디저트를 먹고 있으니 이곳이 알고 보니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이탈리아판 화개장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