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ice_무라노 섬, 럭셔리 저녁
오늘은 관광객
베니스는 운하가 만들어낸 이국적인 풍광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술 애호가들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우선 지난번에 방문한 베니스 르네상스의 보고인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있고 해마다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도 널리 알려져있다. 뿐만 아니라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분관 개념인 베니스 구겐하임은 20세기 모던 아트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의 파트너는 예술 애호가도 아닐뿐더러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된 엄마의 튜터링(개인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설명에 자신 있지만 머든 적당히 해야지, 이제는 어떤 일타 강사가 와도 안 사요~할 시점)에 조금씩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정된 오늘은 관광객 데이~~~
그간의 흐름에 어긋나기도 하고 일반적인 관광과 다를 바 없는 날이어서 여행기를 정리하며 뺄까 했는데 실은 그날의 쉼과 여유가 외려 앞으로의 여정을 나아가게 해 줄 부스터가 되어 주었다.
삶의 과정에서도 쉼은 extra가 아니라 일부여야 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든 가던 길을 잠시 멈추는 시간은 나도 모르게 지쳤을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쉼의 시작은 라면.
해가 중천에 뜨든 말든 잘만큼 자고, 나가지 말고 라면 먹쟈!(여행 내내 딸과 나는 각자 하나의 캐리어가 다였기에 부피 차지하는 저 컵라면을 피렌체에서 갖고 왔을 리가 없는데 어디서 샀는지 진짜 기억이 안 남)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적의 불림을 위해 리모컨을 얹어 놓고 수다 삼매경을 떨다가 김치가 없어도 아쉽지 않았던 한 컵을 뚝딱하고 지도를 펼쳤다.
그래서 오늘의 쉼은 무라노 섬!
베니스 여행 상품에 꼭 따라붙는 문구에 무라노, 부라노가 있었다. 모르고 들었을 때는 같은 섬인데 발음의 차이인가 했는데 알아보니 각기 다른 섬이지만 베니스에서 가깝고 무라노(대략 15분)를 거쳐 부라노(대략 45분)로 가는 바포레토 노선이 있어서 두 섬을 묶어 많이들 찾는 모양이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 두 섬은 무라노는 유리 공예로, 부라노는 레이스와 형형색색의 집들이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광의 인스타 성지로 각광받는 곳이라 했다. 딸램에게는 인스타 성지가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우리 둘 다 본섬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가까운 무라노로 결정했다.
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유리 공예 참관으로 안내가 된다. 유리 공예를 만드는 과정은 워낙 미디어에 노출이 많이 되어 진귀한 광경은 아니지만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찬 공간에서 점토 주무르듯이 유리를 이리 늘리고 저리 늘려서 순식간에 포효하는 말 한 마리를 만들어 내는 퍼포먼스가 꽤 흥미롭다. 특히 그동안 수많은 명작들 앞에서도 ‘응, 좋아’ 고개만 까딱했던 딸램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우와... 신기해하는 걸 보니 역시 가끔은 눈높이 관광도 필요하다. 베네치아 본섬의 미니어처 같은 작은 운하 위로 수많은 다리가 연결된 무라노 섬은 작고 아기자기한 전형적인 관광을 위한 관광지이다. 인사동 전통거리처럼 여기도 유리, 저기도 유리, 온통 유리가 가득하다. 기념으로 하나쯤 사고 싶었지만 몇몇 작품용 공예품 외에는 다이소에도 팔 법해 보이는 상품들도 많아서 그만 발길을 돌렸다.
이 작은 섬에도 광장이 있다. 산타 마리아 에 산 도나토 성당(Basilica dei Santi Maria e Donato)과 종탑을 끼고 있는 평화로운 광장이다. 무라노는 본섬에서도 가깝고 작은 섬이라서 왕복 시간 포함해도 2-3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만하다. 그러니 나온 김에 또 다른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부라노까지 묶어 반나절짜리 일정을 잡는 게 납득이 간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slow day이므로 작은 카페에 들어가 또다시 너무 작고 덜 시원한 레모레이드와 얼음 두 개 동동 띄워주는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평화로운 광장의 느낌을 스케치로 남겼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럭셔리 만찬^^
베니스에 왔으니 씨푸드를 먹어줘야지 벼르고 벼르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는 산마르코 광장 앞바다 해변 산책로로 갔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이 마주 보이는 레스토랑에 아직 이른 시간이라 예약도 안 했는데 가장 명당으로 보이는 바닷가와 맞닿은 끝자리(마치 선상에 떠 있는 느낌)를 배정해 줬다.
츄르릅 한입에 홀라당 넘어가버린 오이스터와 appitizer platter(참지, 연어, 새우)를 먹으며 스프릿츠와 애플 쥬스의 cheers! 풍경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맛에 취하니 오~쏠레미오~~아무 말이나 막나와도 그냥 신났다.
메인 요리로 멀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옆 테이블의 생선 요리가 맛있어 보여 우리도 저거 주쇼 했다. 그러자 갑자기 분주하게 테이블이 세팅되고 불쇼가 펼쳐지는데... 모지? 게다가 불쇼가 끝나자 하나하나 생선을 발라주는 서비스까지! 옆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게 담겨진 생선을 먹고 있었을 뿐인데....쎄한 느낌과 함께 소금불에 곱게 익혀진 이름을 알 수 없는 생선이 아름답게 순살만 발리워져 각자의 접시에 담겼다.
음~~으흠~~~오후~~ 죠타~~~~ 마시따~~~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색이 마치 움직이는 인상파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지금까지 쓴 밥값 전체를 퉁칠 만큼 바가지를 쓰고 돌아가는 길,
여행기나 맛집 탐방 같은 글에는 종종 '이런게 행복이지'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땅이었던 곳에서 오늘 우리가 행복을 누린 것처럼, 살아내느라 지치고 힘들었던 나의 일상의 장소 또한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어쩌다 겪는 일탈에서 찾지 말고 일상의 평범하고 작은 순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어쩌다 찾아올 행복을 좇다 끝나는 삶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매일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꿈같은 만찬은 안녕하고 내일부터는 샌드위치와 피자 먹는 일상에서 행복을 누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