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친구 같은 엄마는 아닐지라도..
난 친구 같은 엄마가 될 거야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스무 살 어느 무렵부터 난 꼭 친구 같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는 가장 가깝고 의지가 되는 동시에 또 가장 많이 싸우며 상처를 주고받는 애증의 관계라고 했던가. 하지만 난 사춘기를 지나며 철이 들 때까지도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늘 티격태격 싸우며 서로를 '이해 못할 사람'이라고 규정 지어버린 엄마를 그다지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우린 정말 안 맞아
나와 엄마는 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온 것이 외려 신기할 정도로 좋아하는 색깔부터 취미, 가치관, 친구들의 성향까지 너무나 다르다. 그 와중에 안 닮아도 좋았을 직설적으로 툭툭 내뱉는 말투만큼은 어찌나 꼭 닮았던지 언쟁이 시작되면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쏘아붙여서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엄마가 된 지금 보니 엄마는 미숙했을 뿐, 나만 닫았던 것 같다) 반면 막내딸인 내 동생은 무뚝뚝한 엄마의 성격을 꼭 닮았으면서도 본디 성품이 순하고 유해서 엄마랑 부딪히는 일이 드물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던 나와는 달리 동생이 샤워 후 안방에 앉아 얼굴에 이것저것 로션을 찍어 바르며 엄마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괜히 빈정이 상했다. 그래서 모처럼 나도 대화다운 대화 좀 해볼라 치면 우린 어김없이 중간에 삐딱선 타고 언쟁으로 끝났으니 엄마와의 평화를 지키는 나의 최선의 방법은 침묵이었다. 그러니 제멋대로에 갈수록 엇나가고 집 안에 불화를 일으키는 내가 엄마에겐 참으로 골치 아픈 손가락이었을 것이다.
20대의 나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엄마도 아빠도 술 한잔 하지 못하는 집에서 난 누굴 닮았는지 허구한 날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퇴근 후 동료들과 한잔하고 들어가는 일이 잦았고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의 주사를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엄마는 술 마시는 사람은 모두 알코올 중독 환자 취급하며 경멸했다. 내가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 드러누운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때로는 춤도 추는 유흥을 좋아하는 것뿐인데 무조건 나쁘다고 몰아붙이는 엄마가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다. 체질상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는 탓에 저녁 먹다가 반주로 한두 잔 마시고 들어온 날에도 어김없이 엄마는 나를 만취 취급하는게 아닌가. 그게 못내 억울했던 나는 반감에 마실 바에는 아예 2차, 3차까지 신나게 놀다가 정말 만취로 들어가 엄마 속을 뒤집어 놓았다. 통금 시간을 훌쩍 넘겨 최대한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집에 들어가도 동상처럼 꼿꼿이 마루에 앉아 있던 엄마의 첫마디는 늘 '또 마셨구나'라는 비아냥 섞인 핀잔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쌍방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지만 내 기억의 엄마는 오늘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여 힘들거나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대부분이 그날 놀다 들어간 날이었더라도 진짜 어쩌다 가끔이라도 술김에 속내를 털어놓고 펑펑 울고 싶은 날이면 그 한결같은 엄마의 냉랭함이 야속했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하고 싶은 일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클래식을 좋아하며 늘 손에는 책이 들려있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엄마는 그런 엄마가 젊은 시절 갖지 못했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흥청망정 놀고 즐기며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20대의 내가 안타깝게도 느껴졌을 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왜 아니겠는가. 지금은 한심한 지난날의 나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그런 엄마의 기대와 요구가 숨 막히게만 느껴졌다. 엄마와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던 유학 생활 중 연례 행사인 엄마의 방문.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 꼴이 엉망이네' 라며 던지는 동시에 대화 종료인 특유의 맞대 싸울 수 없는 화법을 펼치는 엄마와의 만남은 공항에서 마주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유쾌했던 적이 없었다. 그 짧은 기간조차도 어김없이 싸워 좁아터진 집에서 냉랭하게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거나 그럴까 봐 내내 맘 졸였으니 엄마가 도착하는 날부터 가는 날을 기다렸었다.
우리는 이메일로 대화한다. 물론 이조차도 쌍방향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기보다는 안타까운 나의 삶을 바라보는 엄마의 최후통첩 또는 거의 사정에 가까운 호소였다. 출근하고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엄마의 메일을 받으면 어떻게든 나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진심이 전해져 마음이 짠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전히 엄마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줄 수 없는 나에게 끊임없이 반복하는 표현만 달라진 엄마의 변함없는 소망(?)을 외면하고 싶어서 차라리 답을 하지 않거나 그저 그 어색한 냉전을 끝내기 위해 덜렁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답하곤 했다.
인생은 반전
그랬던 딸이 32년을 지나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었다. 정말 놀라운 건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니 그렇게 답이 나오지 않던 우리 모녀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아도 친정은 친정이라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친정에 드나들고 여전히 5분 내 용건만 간단히이지만 주 3회 이상 전화 통화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할 말도 생기고 장도 같이 보게 되고 때 되면 용돈도 챙겨주고 함께 운동도 하게 되었다. 출산 직후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서툴러 말끝마다 짜증이었던 나에게 손주는 보고 싶어도 그 엄마는 보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밤새 아이를 돌봐주는 엄마. 그러니 정말 내 생각을 해 주는 건 같이 사는 서방도 아니고 정이 넘치는 시댁도 아니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웠던 엄마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대우받는 딸이 될 줄 불과 몇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 인생은 참으로 살아봐야 알 일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처럼 내가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이 아이도 언젠가는 사춘기를 지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세상의 어둡고 밝은 면들을 두루 경험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로 엄마의 시선을 피해 가려하고 사랑에 상처 받아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깐에 어른이 되었다고 대들고 반항하는 날도 있을 것이고 술에 떡이 되어 변기통 부여잡고 밤을 새는 날도 올 지 모른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그제야 자식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그 흔한 말에 내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엄마의 사랑과 소망이 딸에게는 욕심과 구속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알게 된 내가 이제와 비로소 철이 드는 건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보라는 말보다 그 말을 했던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딸의 얼굴을 보고 있는 엄마는 고맙고 행복한 동시에 벌써부터 얄밉고 괘씸한 만감이 교차한다
엄마가 그리운 순간은 함께 기뻐하고 싶을 때
얼마 전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삶과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 날, 결국 우리가 슬퍼하는 건 가신 분에 대한 애틋함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친구에 대한 안쓰러움이 아니었던가? 그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했던 밤은 오히려 나와 엄마와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출산을 앞두고 손주를 못 보고 가는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친구를 보며 정말 엄마가 그리운 순간은, 힘이 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룰수 있는 일은 안해도 되는 일
나중에 해야지 미루는 일들은 대부분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다. 그러니 후회할 일이라면 영영 못하게 되기 전에 지금 해야 한다. 어쩌면 엄마와 나의 시간은 그렇게 언젠가 홀로 남아 후회할지 모를 나를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10 여전 전에 아이를 낳고 달라진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썼던 글을 오늘 다시 꺼내보았다.
물론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을 한 후에도 엄마와 나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린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긴 대화를 하지 않으며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쓸 때 외에는 해본 적이 없다. 이후로도 내가 엄마를 찾은 순간은 좋은 일보다 힘든 일일 때가 더 많았고 그럴 때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준 나의 엄마는 이제 칠순이 넘었다.
얼마 전 남편과 대판 싸우고 뛰어나가야 갈 곳도 없는 이 곳에서 집안 분위기 흉흉하니 마음이 불안했는지 유독 그날따라 내 다리를 꼭 붙들고 잠든 막둥이를 안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생일, 명절 제외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전화할까 말까 한 딸이 현지 시각으로 새벽녘에 전화를 했으니 얼마나 놀랬을까. 여보세요 소리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끅끅 숨죽여 우는 마흔이 넘은 딸한테 늘 그랬듯 무뚝뚝한 칠순의 엄마는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어쩌겠니, 도와줄 수도 없고 속상하네...라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그런 존재다.
인간은 성장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가는데 딸은 늘 그 엄마에 못 미치는 엄마인 채로 또 다른 딸을 키워내고 있으니 참 삶은 아이러니다.
엄마는 날 이해 못해!
사춘기는 시작도 안 한 11살짜리 딸내미가 팩 돌아서며 하는 말에 그 시절을 지나온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도 그랬어, 그래도 엄만 지금도 그런 엄마가 필요해.
그러니 잘난 척하지 말고 엄마한테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