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동화책이 문제
땡땡이 이불의 추억
어렸을 때 무지 아끼던 홑이불이 있었다.
내 껀 분홍 땡땡이, 동생 껀 까만 땡땡이었는데 색깔만 다른 같은 이불이었지만 내 껀 동생 꺼보다 모서리 부분이 조금 더 도톰해서 손가락이나 발가락 사이에 끼고 자면 깔깔하면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좋아 잠이 솔솔 오곤 했다. 어찌나 그 이불을 아꼈던지 고교 졸업 후 유학 간다고 준비해둔 이민 가방에 족히 1/3은 차지했을 그 이불을 꾸역꾸역 눌러 담아 가져 갔다. 10년도 넘었으니 색도 바래고 너덜너덜해져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제발 좀 버리라고 핀잔을 줘도 미국 생활 내내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바리바리 싸 갖고 다녔다.
그렇게 아꼈던 물건이 또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다.
좋아하는 옷이 얼룩이 져서 못쓰게 되면 똑같이 새 옷을 샀으면 샀지 수선해서 입어본 적이 없고 아끼던 구두가 망가지면 그동안 수고했다 미련 없이 새 구두를 샀다. 가격과 가치를 떠나 내 물건과 취향에 그만큼의 애정이 없었다고 비약할 것까진 아니지만 반드시 그 물건을 소생시켜 내 곁에 두어야 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난 무엇이든 고치고 다듬어 오래도록 삶의 일부로 간직해 온 것이 없다. 아무리 좋아하고 아꼈어도 하자가 생기거나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판단되면 처음 모습으로 복원은 어렵더라도 웬만큼 보완해서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제야 그것을 발견했다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하루라도 빨리 문제 있는 것을 버리고 그 결점이 없는 새 것을 찾기에 바빴다. 물건뿐이랴. 직장도 뼈를 갈아 넣을 각오로 열과 성을 다했어도 어느 날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고 진정한 나의 길을 찾아 떠났다. 한창 나이의 대책 없는 백수라는 집안에서의 타박, 경제적 곤고함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따위로 머뭇거리기엔 진짜를 찾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너무 결연하고 용감했다. 인간 관계도 예외 없어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친구도 연인도 안타깝지만 여기까지, ‘아닌 인연’이라고 단정 짓고 서로에게 더 이상의 오해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과감히 정리해왔으니 새삼 지금까지 내 주변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많은 관계 장애인들이 그렇듯 나 또한 그 원인을 인내심 부족으로 돌려왔다. 열심히 best fit을 찾아왔지만 반복되는 실패에 낙담할 때면 그래 이건 내 문제일지 몰라 한번 참고 견뎌보자 이를 악물고 극복해보리라.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 그 관계를 지켜 내야만 한다는 확신이 없는데 무조건 참고 뭉개는 게 무슨 인내인가. 인내를 가장한 미련을 떨다가 결국 시커멓게 타버린 속과 황폐해진 감정만 남긴 채, 역시 아닌 거였어라는 생각만 더욱 견고해졌다.
Time to go back
그렇게 미숙하기 짝이 없던 내가 나만큼이나 미숙한 인간을 만나서 가정을 이뤘고 12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몰랐고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진행되었기에 결혼 이후에 이 검증되지 않은 관계의 문제가 드러난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러나 내 선택에 대한 삶의 책임이 점점 무거워지는 게 인생이라, 내 안에서 '삐익~개선 불가, go back 해야 합니다' 라는 빨간불이 수십 번 울리는 동안 난 예전처럼 용감하게 되돌리지 못했다. 결혼했기 때문에 이 관계는 쉽게 끊을 수가 없었고 아이가 생겨서, 그 아이가 둘이 되고 셋이 되니 이제는 정말 너무 멀리 와버려서 이 하자 투성이의 잘못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그렇게 끊어낼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나서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미숙한 관계의 해결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나의 선택에 대한 뼈저린 후회로 가슴을 치는 시간을 지나며 그제서야 나의 관계 미숙증은 조금씩 치유되고 성숙해간다.
지금도 싸울 때마다 무수히 생각한다.
'애초에 알아봤을 때 진즉에 갈라섰어야 했어!'. '하나일 때, 둘일 때 그만둬야 했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 출발했어야 했어!!!'
그러나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12년 동안 그 지독한 악연을 끊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보니 때로 인생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허점을 품은 채로 그냥 간다. 그 결점 못 고치면 큰 일 날 줄 알았는데 가다 보니 운이 좋으면 고쳐지기도 하고 대부분은 그냥 결점이 있는 채로 내 인생이 만들어져 간다는 걸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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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그렇게 완벽하게 살았다고 너무 열내지 말자. 고치고 새로 시작할 열정과 결단으로 사람, 일, 꿈, 그 모든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결함들을 조금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결말이 꼭 해피 엔딩이 아니면 어떠하리. 세상의 모든 일이 장단점이 있듯 인생은 부족함을 품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걸.
열린 결말은 재미없어
어려서 읽은 공주님과 왕자님 이야기의 결말은 모두 이랬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른이들을 위한 동화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하고 그때부터 진정한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나 재미없는 결말인가.
그럼에도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