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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Sep 26. 2020

네 잘못이 아니야

다음 계획은 임신

남편이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 큰 아이는 4살 반, 둘째 아이는 7개월이 막 지나던 차였다. 막상 아이오와에 가보니 덩그런 섬 같은 이 도시에서 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오전만 하고 돌아오는 프리스쿨을 잠깐 다니던 큰 아이는 한창 체조, 수영 등 액티비티를 시작했고 그 모든 과정에 도시락을 두세 개씩 싸서 돌이 안된 아기를 업고 안고 다니던 나에게 남은 5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은 시커먼 앞날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빼박으로 애만 키우게 생겼구나 하니 늘 실려 다니는 둘째가 못내 안쓰러웠다. 둘째에게 친구를 만들어 줘야겠다. 첫째와 둘째가 4년의 터울이 있다 보니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목격한 나는 둘째와 셋째는 가급적 터울 없이 연년생이면 좋겠다는 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테니 5년 후 이곳을 탈출할 때 웬만큼 애들을 키워 놓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셋째를 가져야 했다. 나도 남편도 너무 바빴고 양쪽으로 큰애와 작은 애를 끼고 십자가처럼 누워자던 나에게 임신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있어야 가능한 일종의 프로젝트였다. 노산맘들의 경험담을 충분히 숙지하고 둘째까지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배테기와 임테기를 구비하여 가능한 모든 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생산성 없는 날에는 최대한 자제하는 등 임신에 꽃힌 그당시 난 누구도 못 말리는 폭주 기관차였다.

하루는 몸살이 제대로 나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날은 마침 숙제가 있는 날이 아닌가. 하루가 미뤄지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하니 한시가 급한 나에겐 몸이 아픈 게 대수가 아니었다.


의사가 처방약을 설명해주는데 대뜸,

'지금 그 약이 혹시 임산부에게도 안전한가요?'

'Oh, wait!,,,,are you pregnant?'

그때 나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Not yet. But I’ll BE tonight.

내 비장한 표정에 순간 터질 뻔했던 웃음을 누르고 또박또박 그가 말했다.

“You'd better try next time. You need to get well FIRST.”

두 번째 문장을 힘주어 말하던 그의 속마음은 아마도 이런 황당한 환자를 봤나 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신이 어디 계획한다고 그리 쉽게 되는 일인가. 기대했다 실망하고 또 기대했다 실망하고 배테기와 임테기를 수십 개 버려가며 눈이 빠져라 임신선을 기다리기를 반복하다가 그도 나도 지쳐갈 즈음, 꼬박 5개월이 지나 임테기 두줄을 확인했다. 얼마나 기뻤던지 매직아이처럼 겨우 보이던 희미한 두 줄이 채 선명해지기도 전에 동네방네 임신 소식을 알렸더랬다. 미국 병원은 임테기로 확인하더라도 아기집을 볼 수 있는 8주가 되기 전에는 병원 예약을 잡아주지 않는다. 임신을 확인하자마자니 3주라고 보면 아직 한 달도 더 기다려야 병원에 갈 수 있으니 마침 한국행 일정과 겹쳐서 가기도 전부터 한국에 산부인과에 예약을 해두고 의기양양하게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빛나는 하루하루를 설렘으로 기다리던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하혈이 시작되었다.

생리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고 너무 선명한 선홍색의 피. 병원에 가보지 않고도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 예약을 잡았고 늘 바빴던 남편은 그날도 여느 날처럼 바빠서 큰 아이 하나 겨우 맡기고 둘째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호르몬 수치로 임신이 자연 유산되었음을 확인한 순간, 불안했던 느낌이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안고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꺽꺽 우는 나에게 의사가 둘째냐고 물었고 난 아니라고 하나 더 있다고 대답했다. 10년 동안 시험관, 인공수정 온갖 걸 다 해보고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낳고도 또 하나를 잃었다고 그토록 서럽게 우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참담한 마음으로 큰 아이를 픽업해 집에 돌아와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그래, 나에겐 이미 이렇게 귀한 보물을 둘이나 주셨지. 애써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해도 그 순간엔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위의 두 아이를 아무 문제없이 출산한 것이 더 신기할 정도로 임신 초기의 자연 유산은 생각보다 훨씬 흔한 일이었고 후기의 유산이나 사산에 비해 몸의 회복도 훨씬 수월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감히 말하건대 이미 생명을 품었던 엄마에게는 3주나 30주나 아이를 잃은 상실감은 진배없다.


이후로 며칠간 동네방네 뿌린 소식들을 거두는 동안 끊임없이 그 일을 곱씹고 상기하는 일은 더 고통스러웠다. 내가 셋째 타령을 시작했을 때부터 정신 나갔냐 뜯어말리고 지난주 기쁨에 차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던 나에게 마지못해 축하를 건넸던 엄마는 정작 아이가 잘못되자 무거운 한숨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쟤가 왜 저러나 아들 힘든데 대신 키워줄 거 아니니 차마 나서지 못했던 시엄니는 기다렸다는 듯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내 몸부터 추스르라며 위로인지 안도인지 몰겠는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함께 아파했고 누군가는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힘내라 격려해줬고 누군가는 당황인지 안타까움일지 모를 침묵으로 안아줄 때 정작 나 자신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 일이 정말 아이를 잃은 슬픔인지 나의 틀어진 계획에 대한 좌절감인지 혹은 내가 마치 조물주라도 된 양 생명조차도 계획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오만함에 대한 경고였는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한국에 도착하던 날, 시댁으로 직행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 집 아들의 환영파티가 열렸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고 떠드는 가운데 무릎이 까졌다가 아문 후에 ‘그때 무릎 아팠지?’라는 말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난, '왜 아무도 묻지 않지? 다들 모르나?' 의아해하며 나에게만 별일 아닌 그 일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누구도 나에게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도 꺼내지도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시외가 댁에 인사를 갔다. 이모님(시엄니의 언니)이 '그래, 혼자서 애 둘이나 키우려니 얼마나 수고가 많니'라는 인사를 건네셨고 난 무심하게 '괜찮아요. 그래도 하나 더 갖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때 엄니가 끼어들어서는 “얘가 이런다. 안 그래도 하나 흘려보냈자나. 얘가 통 먹지도 않고 약하니까 그렇지. 먹으래도 안 먹고 그러니까 이런 일을 겪지…. 참…” 그것이 잃어버린 내 아이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언급이었다.


그때 난 알았다. 내가 외면해버린 나의 감정은 죄책감이었다는 걸.

아이들에 관한 한, 엄마는 언제나 죄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서 잘못된 걸까, 그렇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라는 질문은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자책하게 했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내 몸부터 추스르고 건강을 챙기라는 염려의 말이었을지라도 결국 그 일의 원인을 '건강하지 못한 엄마의 몸'에서 찾는 그 말은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그대로 까발려버렸다.



꽤 오래전, 한 동네 살면서도 막상 마주할 일이 없던 한 동생을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 둘째 아이와 동갑인 딸이 있었는데 묻지도 않은 둘째 소식을 호들갑스럽게 전하며 이제 겨우 시작인 입덧 얘기며 두 아이 양육에 대한 상담이며 짧은 수다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 후쯤, 그 친구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때, 남편의 무심한 한 마디. “그러게 조심성 없게 다니더라니....”


헉. 우리도 겪은 그 일을 저렇게 말하다니. 그가 실제로 그 일을 그녀의 경솔함 때문이라고 단정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그 말에 되살아난 내 죄책감은 그때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게 해 주었다.


누군가에게 위로의 건넨다는 건 분명 어떤 교감의 표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교감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때 누구도, 심지어 남편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던 그 말.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일어난 일이야"

쌓여있던 감정을 쏟아낼 수 있게 해주는 그 짧은 위로가 필요할 뿐.


P.S. 셋째와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집에 있던 임테기와 배테기를 모두 처분하고 포기한 후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다음 해 겨울, 소중한 막둥이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3살 터울의 아이 셋을 키우게 되었으니 삶은 계획대로 안 살아지기에 살아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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