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그 참담한 시간의 기록 #2
2022년 1월 1일의 새 아침, 새해가 밝았다.
아니,
마치 올 해의 첫날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로,
의미 부여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유독 특별할 것 없이 보낸 2021년 마지막 날의 다음날이었다.
전쟁의 참상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흉측한 상흔으로 남지 않던가. 1년이 10년 같았던 그 끔찍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어른도 아이들도 지친 한 해를 장대하게 마무리하는 그날은 참으로 얄궂게도 지극히도 평범하고 지극히도 평온했다.
늘 시끄럽고 정신없고 결국은 싸움으로 끝나고 마는 동생들과 부대끼지 않고 조용하게 할머니랑 새해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큰 아이는 외가에 보냈다. 함께 지내는 동생과 나, 두 아들은 애 하나만 빠져도 한결 수월하고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느지막이 집 앞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 있는 회전 초밥을 먹으러 갔다.
미국에서는 연말연시만큼 떠들썩하게 보내는 날이 없다.
유학생인지 이민자인지 정체성도 애매했던 우리에게는 외지에서 맞는 새해라는 게 더없이 적적하게 느껴졌던 탓이었을까. 조용히 집에서 기도하고 보내도 되는 날을 굳이 그 밤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와 다 같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서로를 축복하고 부대끼는 따스함을 나누곤 했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에는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가족들과 모여 마치 명절날 친적들이 모이듯 먹고 마시며 서로의 적적함을 달랬다. 너무 어렸던 우리 아이들에게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이 하루를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왔다.
그리고 아마도 10년 만에 거의 차음으로 꿈에 그리던 한국에서 맞는 새해가 아니던가.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이 날을 애써 무슨 날인지 모르는 듯 덤덤하게 맞는 세밑의 저녁.
날 추운데 애들 데리고 복잡한 날 외식하기 번거로우니 가까운 백화점에서 간단히 해결하자 해서 나갔는데 백화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일찍 갔는데도 한참을 서서 기다렸다. 앉아서 기다릴 만한 곳이 없어서 다리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는 막내를 달래며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세상에.. 내가 몇 년간 특별한 저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 날의 저녁을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먹는 사람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특별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덕분에 특별하지 않은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셔틀을 타고 집에 돌아와 싱어게인 2 재방송을 보고 굳나잇 인사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맞이한 새해 아침.
여느 때처럼 늦잠을 자고 싶은 아이들을 깨워 최대한 의미 부여하지 않는 기도를 하고 동생과 함께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새해 첫 메뉴는 두근두근 대게다.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속초에 갔다가 야심 차게 홍게를 먹으러 갔는데 엄마의 어리숙한 주문 실수로 한 접시 바닥에 간신히 깔리게 시킨 게 아닌가. 간에 기별도 안 간다며 아쉬운 입맛만 다시고 왔다는 소리에 이모랑 삼촌이 며칠 전부터 분주하게 계획하더니 새해 첫날부터 수산 시장에 가서 대게를 사 왔다며 아침부터 부엌이 시끌시끌하다.
엄마 살림이라 익숙하지도 않고 동생이랑 오빠가 엄마 옆에 붙어 게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으니 딱히 내가 할 일을 없지만 글타고 애들 셋이나 델꼬 와서 받아만 먹기도 염치가 없으니 괜히 부엌 주변을 서성거렸다.
부모님 집의 부엌 한쪽 벽면에는 2018년, 우리 집에 방문하셨을 때의 사진이 붙어 있다. 아마도 평생 가장 행복하셨을 그 해 아빠의 생신날이다.
평생 일만 하고 사셨으니 가족 간 정 같은 거 나눠본 적이 없는 아바이다. 생일은 미역국 먹는 날이라는 거 외에는 선물 따위는 주고받은 적도 없으니 본인 생일이면 더더욱 멋쩍고 어색해서 밥이라도 먹을라 치면 그런 거 뭐하러 하냐고 말도 못 꺼내게 하시는 분이다. 그런 아바이가 본인 생일이라고 자식 사위 손주 다 모여 함께 축하하고 케잌을 자르고 손주들이 하나하나 준비한 선물을 꺼내보시며, 쑥스러워 싫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웬걸 선물마다 인증 사진을 찍으며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모른다.
아바이가 그렇게 활짝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내가 이 나이가 돼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내 몫까지 아빠한테 효도를 하는구나.. 했던 그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갑자기 목이 메면서 목구멍으로 무언가 차오르는 답답함에 숨이 막힌다.
쫓기듯 재킷을 집어 들고 “엄마 잠깐 나간다” 외치고는 나와서 딱히 갈 곳 없는 집을 몇 바퀴 돌았다.
두 바퀴쯤 돌았을까.
눈물이 쏟아진다.
하…이게 다 무언가..
몇 년만에 그리웠던 새해를 부모님과 맞는 이 날, 이제야 애들 키워서 함께 누리면서 따뜻한 시간을 보낼수 있게 되었는데, 그 세월의 결과가 이혼을 앞두고 세 아이들을 끌고 친정집에 얹혀 있는 처량한 꼴이라니…
주르륵 흐르던 눈물이 흐느낌이 되어 잔디밭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둘째가 ‘엄마 왜 안 들어와?’ 찾으러 나왔길래 주섬주섬 맘을 추스르고 들어갔다.
어느새 밥상도 치우고 과일도 다 먹고 한창 놀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우리 애기들 세배해볼까’ 하신다.
애들둥절?!
세배가 모에요? 하는 아이들을 델꼬 방에 들어와 한바탕 예행연습을 시키고 얌전히 마루 앞에 세웠다.
쭈뼛쭈뼛 팔을 내리고 무릎을 굽히고 배운 대로 주섬주섬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는데
또다시 훅 무언가 감정의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이 와중에 혼자 통곡이 웬 말인가 싶어 꾸역꾸역 누르고 있는데
“XX이도 해”라고 오빠가 말했나?
“나도 할까? 그러지 머”라고 앉았는데
무릎 굽히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새해..복…마..이..받…으..세요….
그 말을 떼기가 너무 힘들어 말 배우는 애처럼 뚝뚝 끊겨가며 간신히 이어 속삭이듯 말했다.
알 수 없는 숙연해진 분위기에 애들은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가고
오빠도 어느새 사라졌고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동생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미동도 없다.
모두가 민망하고 곤란하고 난처한 그 순간 엄마가 입을 떼셨다.
그래…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니 이제부터라도 좋은 쪽으로 잘하자.
ㅇㅇ 그저 이 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 황급히 일어나려다
“아바이는?” 하고 아빠를 보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던 딸이 용기를 내어 마주한 아바이는 검고 붉은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고…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으셨다.
사랑하는 딸,
기대했던 딸,
기쁨을 줬던 딸,
그 딸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 아바이는 그렇게 속으로 우셨다.
한국에 나오기 전 이 사단을 겪고 난 후, 마지막 즈음에 아바이랑 통화를 했었다.
낯선 땅에 와 모든 걸 포기하고 10년을 남편만 바라보고 살다가 뒤통수를 맞은 건 나인데
돈도 아이들도 포기하고 내 한 몸만 나와 쫓겨나는 꼴이 된다면 지난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한 거 아니냐는 말에
그 사람 또한 너의 선택이니 이것도 니가 치러야 할 선택의 결과가 아니겠냐, 다만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싼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사람 미워하지 마라.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 맘 상하며 살지 마라.
지금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잘 얘기해서 일단 아이들 데리고 나와라 하고 전화를 끊었던 아바이는
내가 도착한 후로 지금껏 그 일에 대해서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
가만히.. 앉으셨던 나의 아바이는 그렇게 굳게 닫힌 입으로 고개만 저으셨다.
난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먼저 일어섰다.
그날 오후 아버지는 평소 불같은 성격에도 늘 감싸주고 달래주던 손주들한테 무쟈게 화를 내셨다.
“이 버릇없는 놈, 혼 좀 나야겠네”
“너 계속 그렇게 떼 쓸거면 하삐 집에 오지 마!”
다른 때 같았음 ‘아빠, 왜 애들한테 그런 소리를 해’ 라며 슬쩍 핀잔을 줬을 법도 했지만
그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었겠거니.
이 참담한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순간 생각했다.
아바이가 작년쯤 돌아가셨을면 어땠을까...
사고뭉치 맏딸이 이제야 사람 구실하며 효도하고 사는 걸 보고 남은 날들에 대한 아쉬움만 품은 채로 가셨으면 차라리 덜 아팠을까.
불과 한 달 전 팔순 생신을 맞은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안타까움의 한숨을 보며 그 딸은 아버지가 이 꼴을 안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걸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인 딸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노쇠한 아버지의 한숨울 딛고 또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으니
부모는 그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식에게 갉아먹히는 기둥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