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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Jan 29. 2022

엑스와 칭구하지 않는 이유

엑스(ex-boyfriend)=구남친

보통 옛 남친으로부터의 연락이라면 늦은 밤.. 만취하고도 남을 새벽녘,


”자니…?”

로 시작되지 않던가?

모지? 잘못 보낸 건가… 아닌가?

긴가민가 급싱숭함에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게 일반적이겠으나..

그러기엔 그의 구여친인 아줌마는 싱숭함의 감정이 무언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40대 중반이었다.




"띵동~"


어?

내가 아는 그?

…!!

스팸인가?

내 카톡에 있지도 않은데?

(참고로, 나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좁고 타이트해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바로 삭제하는 간결한 삶을 추구하는 편이라 모를 턱이 없다)

"헬로 XX.."


나한테 보낸 거 맞군.

순간 나의 의식은 back to the future속, 하얀 머리 박사님 차를 탄 것처럼 되돌아가 지난날의 그를 만났다.


대략 12,3년 만인가 10년도 훌쩍 지난 나의 옛 남친(이 단어를 쓰는 것조차 민망하다).

그는 한국에, 나는 미국에 있으니 한국시간으로는  12, 주당인 그가 당연히  한잔 했을 시간이다. 너무 오랜만이긴 했지만 어려서는 흔한 일이었으니  번쯤 톡이 눌러졌을 것이라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딘가 같은 시간대에서  역시  한잔  밤이었다면, “, 오랜만이네.  지내?”  같은 아련한 추억을 품은 따뜻한 한마디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술 한잔은 커녕 더없이 말짱할 수 없는 아침 10시.

그것도 애들을 스쿨버스 태워 보내는 전쟁 같은 시간 후, 느긋한 설거지를 하고 조촐한 아침을 차려 먹고 오늘 날씨 어떤가 창밖을 보며 볼일을 보던 중이었다.

일단 폰을 그대로 둔 채 보던 일을 마무리하고 나와서는, 잘못 배달된 폭탄이 아닐까 열어보는 심정으로 찬찬히 열어보았다..


다음 달에 이 쪽으로 여행을 오게 되었는데 시간이 맞으면 밥이나 한번 먹자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그는 나의 구남친이기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다. 쭉 연락하고 지낸 절친까지는 아니지만 내 베푸의 절친이라서 졸업 이후 뜬금없는 술자리마다 만나서 한바탕 놀고 헤어지던 말 그대로 동네 친구다.

유학을 끝내고 직장생활도 솔찬히 했던 어느 무렵, 정말 상투적이게도 어느  갑자기, (우리 삶을 지배했던 모든 감정은 사실상 논리적으로 설명할  없는 어느 날의 ‘내재되어 있던 끌림이라 착각하는 ‘우연한 꼴림 아니던가) 그때는 사랑인  알았던 꼴림에 눈이 맞았고 운명처럼 연인이 되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정말 뻔하다. 우린 울고 웃었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고딩에 만나 성인이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허락된 사랑의 감정이 다 소진되었을 때 헤어졌다. 그 모든 과정이 참으로 다이나믹하게도 이루어졌던 1년 남짓의 시간 동안 우린 각자의 친구들에게 공식 민폐 커플이 되었고 “하여간 너네 땜에 같이 못 만나” 소리를 들으며 징한 이별을 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봤을 것이다.

이승철 님의 ‘네버 엔딩 스토리’ 가사처럼 ,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일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 노래가 2002년, 자그마치 20년 전에 발표된 곡이 아니던가.

영화 속 우연한 만남을 꿈꾸기에는 관계가 시작되자마자 페북, 인스타, 카톡 등 사이버 세상의 모든 연결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즘의 연인들은

사실상 관계를 맺기보다 끊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요즘 같이 SNS로 전 세계가, 전 지구인이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

맘만 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는 그의 근황을 굳이 찾지는 않지만

한 번쯤 마주치면 어떤 기분일까.


남편의 오랜 유학 생활 덕분에 한동안 이 좁은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지내다가 아이들이 크면서 한국을 오가게 되었다.

덕분에 실제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아름다운 상상만으로도 충분했을 그들의 흔적을,

이제는 사이버 세상에서가 아니고 살아있는 삶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들은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고 다소 당황스럽고 민망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슬며시 반가운 맘이 들기도 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토박이들이 많이 남아 있는 친정 동네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더니

오가는 학부형들 중에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그분들을 심심찮게 마주친다.

심지어 나에게 어정쩡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전 여친에게 돌아가 행복한 가정을 이룬, 지금은 와이프가 된 그분의 전여친을 학부형 단톡방에서 만나기도 하고

그와 똑같이 생긴 그의 아들이 우리 아들과 같은 수영 버스를 타고 다닐 때는,

'아줌마가 너네 아빠랑 친했어' 말을 걸어보고도 싶고 초코우유라도 하나 사주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록 인연이 아니라서 결국은 헤어졌지만,

한때는 누구보다 사랑했고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며,

애써 감출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어쩌면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사귀었다는 이유로,

헤어졌다는 이유로

꼭 잃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헤어졌기 때문이다"


한 때, ‘I love school’이라는 포털이 등장하며 온 나라가 불륜으로 휘청대던 시절,

‘아니, 다 늙어 만나서 새삼 추하게 무슨 짓이람’ 중년 남녀들의 추태 정도로 치부했었는데

그땐 정말 몰랐다.

나이가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고 아마 쉰이 넘어서도

스물 살 때 만난 사람을 만나면 스무 살 때 그대로의 나의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애틋했던 첫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건, 이후로 수없이 많은 구질구질한 세월을 덧입힌 남편뿐이라는 걸.


초딩때 만나서 손만 잡고 ‘우리 크면 결혼하는 거야’ 약속했던 사이가 아닌 담에야

머리 다 커서 만나 아무리 10년, 20년의 세월이 흐른 들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지 않고서야

함께 했던 시간을, 그의 얼굴과 몸을 만졌던 시간들을 모두 기억하는데

아무리 남은 감정이 없다 한들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갈수록 세상은 쏘쿨~해져서

전 남편과 전 와이프가 새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데미 무어와 브루스 윌리스 같은 new family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는 할리웃이 아니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돌이킬 감정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렇기 때문에 굳이 지난 인연을 이어가는 건

현재의 인연에게 그닥 유쾌할 일은 아닐 거 같다.


“우리가 밥을 왜 먹어. 잠이나 자”


냉랭한 반응에 당황한 듯한 그와 애틋하기보다는 유쾌한 안부를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지금은 잃은 과거의 친구에게 한마디를 보탰다.

 지내고 애들  키우고 늘그막에 동창회 하면 밥은 그때나 먹자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내 거친 표현을 누구보다 즐거워했던 그는 알아먹었을 것이다.




비록 지나온 삶의 한 순간이었을 뿐이라도, 찬란했던 인생의 한 부분을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함께 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평생 곁에 두고픈 정말 잃고 싶지 않은 인연이라면 애초에 시작을 말아야 할 것이고

이미 시작했다면 어떻게든 그 사랑을 지켜내야 한다.            

가족끼리는 정분나는 거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언젠가 남편이랑 대판 싸우고 며칠 후엔가 그가 페북에서 결혼 전 만났던 엑스를 찾은 흔적을 발견했다.

ㅎㅎ그래 봐야 어쩔겨,

걔는 걔 인생, 너는 니 인생,

어차피 지나간 인연이니 걔는 잘 살라고 두고

너는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인 현재의 니 인생을 살아야지.


굳은 신념이나 믿음과 사랑이라기보다 순리에 대한 순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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