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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Mar 05. 2022

엄마는 아이에게서 용서를 배운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초보 & 경력 다 통틀어 여전히 모르겠는 육아로 힘들어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을 넘어 숭배하는 오은영 박사님은 그의 저서,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를 통해 말씀하셨다.

‘아이는 부모를 항상 용서한다’ 고.


육아의 원칙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뿐, 모든 부모에게는 ‘바른 아이(?)’로 양육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보더라인, 즉, 상황에 따른 타협이 허용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그러나 육아의 현장에서 원칙을 지키기 위한 ‘엄한 훈육’을 가장한 부모의 ‘진노’는 사실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미숙한 부모의 감정적 대응일 때가 더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그날따라 유독 힘든 날이었는지, 혹은 부부 싸움 등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더해졌는지 아니면 반복되는 상황에 지쳐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날 아이의 ‘잘못’이 엄마의 감정 폭발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중차대한 과오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꼬맹이가 잘못이라고 해봐야 무슨 대역죄를 지었을까.

그러니 아이를 향한 실망과 걱정보다 그 순간을 지혜롭게 타이르지 못하고 분노로 쏟아내 버린 내 미숙함에 대한 죄책감, 뱉어내고 만 말에 대한 속상함, 이 모든 것이 뒤섞인 좌절감이 화가 되어 화를 부른 꼴이랄까? 이쯤 되면 훈육의 정도를 논하기에 앞서 인격적인 자질을 갖춘 부모가 맞나 싶은 이 어이없는 일은 매일매일의 육아의 현장에서 종종, 아니 생각보다 꽤 자주 일어난다. 이유야 어쨌든 이미 사태는 험악해졌고 각자 방으로 쫒아보내고도 마음이 안 풀릴 때면 생각한다.


지금이 이 아이의 못된 고집을 꺾고 잘못된 태도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잔뜩 풀이 죽은 아이를 세워놓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가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지금 나의 모습에서 보이는 결핍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던가.

나의 엄마는 내가 자라는 동안 큰소리를 내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중학교 때까지 집안의 자랑일 정도로 성적도 줄곧 상위권에 모범생이었던 내가 

뒤늦은 사춘기로 고등학교 진학 후,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며 

소위 ‘날라리’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독서실 간다는 핑계로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고 

학원을 땡땡이친다던가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던가 

혼나기 마땅한 일을 하고 귀가 시간을 어기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정처 없이 방황하는 딸을 지켜보고 있었을 엄마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의 엄마는 한 번도 그 모든 일탈의 행동에 대해서, 엄마의 염려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없었다.

제 아무리 사춘기인들 (아마도 고2병이라 부르겠다, 옛날 사람 --) 그래 봐야 10대의 소녀일 뿐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실컷 놀 때의 대담함은 어디로 갔는지 현관문 앞에만 서면 잊고 있었던 죄책감이 확 살아나면서 한없이 쪼그래졌다. 집에 오는 내내 딴에는 가장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잔뜩 만들어 심호흡 한번 하고 띠띠띠띠 누르고 들어갔는데,

컴컴한 마루에 작은 노란불 하나 켜놓고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지도 않고 “또 늦었네”라는 말을 흘리고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 히 안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이후로 며칠간,

내가 마주한 엄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차가운 표정이었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훈육할 방법을 찾으며...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또 딸에 대한 실망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던 거 같다.


아이를 훈육함에 있어서 나의 미숙함의 원인을 엄마와의 관계로 돌리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용서를 구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딸은

사랑과 염려의 마음보다 감정이 앞섰을 때

용서를 구하는 법도, 용서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착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때,

어느덧 주름진 얼굴, 꼭 다문 입.

거울 속의 내 얼굴이 그때 그 엄마의 무서운 얼굴과 너무도 닮아 있음에 깜짝 놀란다.


사실, 애들은 아무리 혼나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가온다.

그러나 엄마는 아직 맘이 안 풀렸으니 이따 다시 얘기해라고 돌려보냈던 큰 아이는 이제 오지 않는다.

그리고 뒤늦게 잠든 아이 눈물 자국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내며 후회하는 건 결국 엄마 몫.




30분쯤 지났을까.

둘째가 쭈뻣쭈뻣 방으로 와서 딴청 하듯 말한다.

‘엄마 이것 좀 도와줘. 머가 잘 안돼…’


용서란 그런 것

거창한 사과나 앞으로의 다짐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누군가(그게 누구든) 먼저 손 내밀면 두 팔 벌려 안아주면 끝.

화를 낸 건 부모이고 다가가야 할 사람도 부모인데

정작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다.

딱딱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어린 나는

천진한 얼굴로 먼저 다가오는 아이를 통해 용서를 배우고 있다.


지금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이 아이도

머리가 크고 제깐에 억울한 마음이 들면 혼자 삭히거나 쌓아둘 뿐 손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그리고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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