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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Nov 02. 2021

맥주 대신 율무차

가을가을한 날의 오후

가을이다.


집 앞 나뭇잎이 노릇노릇해진다 싶으면 '아, 가을이구나'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설렘보다,

'헐,,, 낙엽 치울 계절이 왔네' 하는 탄식이 앞서는 어른의 계절이다.

하루하루 가는 게 지나고 나면 아쉬울 이 시간이지만 삶의 대부분의 찬란한 순간이 그러하듯,

지금은 지나고 있기에 그 찰나의 아쉬움을 모르고 살아내는 하루일 뿐이다.

매일 목을 빼고 '우리 나가요?'라고 묻는 듯한 펌킨이에게

때로는 '그래 나갔다 오자!' 하며 옷을 챙겨 입거나,

'노, 오늘은 엄마 바빠' 혹은 '노, 오늘은 비 와서 안돼' 라며 매정하게 잘라냈던 이 가을날.

마침 좋은 날씨, 곧,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산책하기 더할 나위 없는 날씨인 오늘,

'그래! 오늘은 한번 나가볼까?' 하며 길을 나섰다.

이곳 저것 어찌나 궁금하고 신기한지 뒤적뒤적 여기 가자 저기 가자 이끄는 펌킨이에게

단호하게 '오늘은 잠깐 나온 거야' 하며 갈 길을 재촉하면서도

간만에 흥분한 우리 애기 냄새 실컷 맡으라고 기다려주고 잘했다 간식 주고 칭찬해주며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산책길을 마치고 돌아왔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는 선뜻한 날씨였는데 뛰다 걷다 한 바퀴 돌고 오니 어느새 지퍼를 열고 등 뒤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이 시간 이 느낌,

어김없이 시원한 맥주가 속을 뻥 뚫어줘야 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따뜻한 율무차 한잔이 생각난다.


지난봄부터 불과 며칠 전까지, 계절은 새 옷을 입고 찬바람을 맞고 있는데 이놈의 모기들은 죽지도 않나 집 앞에 나오면 어김없이 쏘아대는 통에 가을이 왔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창 너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높고 청량해진 가을 하늘 아래, 언제 그랬냐는 듯 귓가에 앵앵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의자를 놓고 앉아도 손이 시리지 않고 따뜻한 율무차가 금세 식어버리지 않는 며칠 안 되는 가을날의 오후를 느껴본다.


평온하라

평온하라

이 가을에 속삭여본다.


지금 내 뺨을 스치는 바람처럼,

찬란한 가을빛을 뒤로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지난한 우리 삶의 수많은 어려움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들은 지나갈 것이고 그러나 또 찾아올 것이고

지난 어려움을 통해 꽤나 성숙해진 줄 알았던 나는

또다시 유치하고 미성숙한 고집과 욕심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숲 속 한가운데 우리집에선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때 우연히 내 손등 옆으로 노오란 낙엽이 살포시 내려와 앉았다.

마치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기라도 하듯이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마른 잎이 피식 빈 마음을 달래준다.


반복되는 무너짐에도 이렇게 생각지 못한 누군가의 위로가 주저앉아 있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2021년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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