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당연히 엄마 탓이지
디.마.프.(디어 마이 프렌즈, 2016년 TVN 10주년 특별 기획 노희경 작가 작)
에서 고현정(박완 역)은 엄마인 고두심에게 말했다.
(쓰다 보니 둘 다 ‘고’씨라는 걸 지금 알았다. 큰 의미 없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작은 우연의 발견?)
https://www.youtube.com/watch?v=QnFcxbcNkZM
완이는 유학 생활 동안 뜨겁게 사랑하며 동거했던 연하(조인성 역)와 결혼을 약속했다.
완이를 만나러 오던 연하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된 후,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기 두려웠던 완은 마침, 엄마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헤어진 것도 아닌, 돌아갈 기약도 없는 어정쩡한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던 중,
완이는 유부남인 대학 때 선배 동진을 만나 위로를 받았고 그걸 알게 된 엄마가 노발대발하는 상황.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젊어서 아빠가 가장 친했던 친구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해 충격을 받았다. 어린 완이를 두고 갈 수가 없어 함께 죽으려 했다 포기했던 일이 완이에게는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장애가 있는 외삼촌을 보며 엄마가 장애는 안 된다고 못 박아왔기에 연하가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유부남을 만날 수가 있냐고 핏대 올리는 엄마에게 딸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엄마, 앞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아니, 유부남 만나지 말라는 엄마한테 그게 할 소리야?” 언성을 높이는 엄마에게 딸은 느닷없이 옛 일을 꺼낸다.
“난 엄마 꺼구나, 그러니까 무서워도 약을 먹으라고 하면 먹어야 하는 거구나.
내가 연하를 버린 건 다 엄마 탓이야.
미치도록 사랑한 남자, 아프다고 버리고 나니까 내가 내 안에서 그러더라.
나쁜 년, 막살아버려 그냥, 양심도 버리고 막살아 그냥!”
“잘못했다 그래, 나한테.”
“왜 그랬어! 나한테, 내가 엄마 꺼야?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죽여도 돼?”
주먹을 쥐고 깨버린 유리 조각 위로 짓이기는 딸에게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손을 내밀었다.
“당연 넌 내 거지, 나 죽을 생각 하면서 어떻게 널 두고 가”
뿌리치는 딸을 부둥켜안고 엄마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이어지는 완의 독백,
비열하고 비겁한 박완. 왜 넌 30년 동안 묵혀둔 그 얘길 이제와 이렇게 미친년처럼 터뜨리는 건데,
넌 그때도 엄마를 이해했고 지금도 엄마를 이해해.
근데 왜 넌 지금 엄마를 이렇게 원망하는 건데.
그때 알았다
난 연하를 버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연하를 버린 게 내 이기심만은 아니었다고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완이의 독백을 딸의 입장에서 절절히 이해하며 봤던 꽤 오래 전의 이 장면에서 잊히지 않았던 말.
엄마 맘도 알고 내 맘도 아는데 비겁한 내 결정에 대한 핑계를 찾고 싶을 때,
만만한 게 엄마가 아니던가.
나 또한 인생의 비열한 혹은 어리석은 결정에 대해서 그렇게 수없이 엄마를 원망하고 엄마 탓을 해왔기에 그 투정의 맘을, 어리고 비겁한 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면에 깊이 감춘, 나조차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나만의 찌질하고 졸렬한 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낱낱이 까발려버리는 노작가 개천재…우는 와중에도 감탄했던 디마프 최고의 명장면이라 생각했다.
한국에서 돌아온 후 2주.
여행을 가장한 한 달간의 별거는 암묵적인 휴전 상태를 가져왔고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지만 아무것도 정하지 못해 사실상 고착되어 있는 전시 상태로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우리 아이들은 매일매일 폭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 내던져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학교까지 다 빼고 짐 싸들고 한국에 갔고, 끔찍한 열흘간의 격리 후, 어딘지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는 채로 정신없이 지내다가 돌아와 집에 왔다.
긴 여행의 끝, 지친 몸과 마음을 맞아줘야 할 우리 집은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공기가 맴도는 또 다른 불안한 공간일 뿐이었다.
어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이지만 놀랍지 않게도 만 6살 막둥이부터 13살 큰 아이까지 아이들은 각자의 나이에서 느끼는 상황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돌아와서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딸내미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동생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마주쳤다 하면 화를 내고 툭하면 언성을 높이고 울고 히스테리를 부리니,
저 아이가 이 시기를 견뎌내는 방식이려니 이해가 갈 법도 하고,
엄마로서 죄책감과 미안함도 들었다가,
어쩌면 나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한 패배감에 빠져 그렇게 며칠이 갔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든 터지고 만다. 그것도 아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적당히 좀 해라,
쟤네가 먼 잘못이냐,
네가 이러는 게 더 힘들다.
안아줘도 시원찮을 판에 그동안 쌓여온 감정을 마치 아이 탓인 듯 목소리를 높이는 내게 딸이 말했다.
이게 다 엄마 탓이야
지금 이 집안에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misarable 한지 알기나 해?
아빠랑 이렇게 된 것도 엄마 탓이고
장남이가 나한테 나쁘게 하는 것도 엄마 탓이고
내가 이렇게 불행한 건 다 엄마 탓이야!!!!
엄마는 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거야?
왜 우리를 위해서 노력해줄 수 없는 거야?
내가 노력했으니까 나 혼자 너희들 다 데리고 한국까지 갔다 온 거야.
나는 지금도 매 순간 죽을 만큼 노력하면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래전 저 장면이 떠올랐다.
왜 엄마는 다 큰 성인이 된 딸에게 설명하지 않았는지,
변명하지 않았는지…
엄마와 너 사이에 있던 일은 미안하지만 너와 연하와의 결정은 니 몫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는지.
엄마가 된 이제야 딸의 원망 뒤에 감춘 투정 어린 마음 뿐 아니라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엄마의 마음이 들린다.
응… 맞아 엄마 탓이야.
억울하고 분하지?
엄마도 그래.
그치만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닌데 힘드니까 그건 엄마 탓이 맞아.
우린… 모두가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그게 답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기력한 상황에 누구라도 원망의 대상을 찾아 쏟아낼 수 있다면 그건 엄마일 것이다.
그리고 13살 딸과 43살 엄마는 같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