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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Feb 06. 2022

슬기롭지 못한 격리 생활

이혼, 그 참담한 시간의 기록 #4

새벽부터 일어나 비몽사몽인 아이들을 깨워 준비시켜 겨우 차에 앉혔다. 12월 초의 부쩍 써늘해진 날씨만큼이나 찬 기운이 흐르던 차 안,  침묵 수행을 하는지 잠을 자는지 대화 한마디 없이 그저 앞만 보는 2시간의 드라이빙 후, 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출국자 외에는 공항 내부 출입이 제한되고 있어서 남편과는 차에서 짐가방 내리고 바로 헤어질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카트에 짐을 싣고 돌아서는 순간, 이제부터는 세 아이들을 혼자 돌봐야 한다는 긴장 때문이었을까 짐을 잔뜩 메고 들었던 어깨가 유난히 뻐근하게 느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자야하는 코로나 시대의 비행

비행기를 탄 건 아침인데 14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당연히 시차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티비보고 먹고 자고 일어나서 도착하니 오후 5시, 인천공항에서 격리 장소인 부모님 집인 경기도까지는 한 시간은 족히 넘게 걸리는 거리다.


오미크론의 영향으로 백신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심지어 난 부스터까지 맞은 3차 접종자였음에도) 해외 입국자는 무조건 10일 격리로 바뀐 지 불과 1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코로나에 걸리는 것보다 범법행위로 신상이 털려 온 땅에 알려지는 게 더 무서웠던 시골 아줌마는 행여 문제가 될까 싶어 방역 택시라고 이름 붙여진, 사실상 칸막이가 생긴 거 말고는 예전에 타던 리무진 택시와 머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는 택시를 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마다 오셨던 기사분께 연락을 해볼걸, 난 방역 택시가 특수 방역 처리를 한 택시인 줄 알았다. (체감상 별 차이를 못 느꼈다는 것이지 방역이 부실했다는 뜻은 아니니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어쨌든 30분쯤 지났을까… 얼마나 걸려, 지금 몇 시야,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이미 200번쯤 묻고 대답한 질문을 쏟아내던 아이들은 시차 때문에 하나둘씩 뻗어버리고,

화려한 연말 느낌이 물씬한 올림픽 대로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긴장의 끈이 탁 풀린 듯,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른다.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오랜만인 나의 나라….

아.. 왔다.

이제 왔다….

부모님을 만나는 순간 주저앉아 통곡할 것만 같은 마음을 끅끅 누르며

1시간 반이 넘는 긴 귀가 길의 끝, 이미 밖은 깜깜한 밤이 되었다

큰 짐가방만 3개에 캐리어가 2개, 아이들은 모두 골아떨어졌으니 눈물의 상봉이 될 줄 알았던 장면은 온데간데없었다. 여느 날의 방문 때처럼 그리움과 반가움 가득 양팔 벌리고 맞아주신 아바이와 짐 옮기랴 잠이 덜 깬 아이들 안아주랴 정신없는 엄마와 그저 눈인사를 주고받은 정도였다. 아니, 사실은… 세상 시름 다 짊어진 얼굴로 돌아와 그대로 주저앉아 울 것만 같던 나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모르는 부모님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던 거 같다.

부산스레 인사를 마치고 이제야 잠이 깨서 전혀 졸리지 않은 아이들을 재우며.. 3년이 채 못되어 다시 왔는데 마치 30년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친정에서의 첫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냈다.



열흘간의 격리

는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짧았던 반가운 상봉의 다음날 새벽 3시, 새벽부터 잠이 깬 아이들은 이미 자동차를 타고 마루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서럽게 울던 나를 달래주던 엄마 아빠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급격히 기력이 쇠하셨고 무엇보다 나로 인해 너무나 마음이 상하셨다. 만나자마자 전화로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게 될 줄 알았지만 모처럼 마주한 엄마빠와의 시간을 불편한 얘기로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선뜻 말이 꺼내지지가 않았다.


격리 2일째.

이 짓도 5,6년 째이다.

난 알고 있다 며칠 동안 셋 중에 누군가는 새벽마다 일어나서 밤을 꼬박 새울 것이라는 걸.

기대하는 건 이제 애들이 컸으니 일어나도 알아서 시간을 보내주길 바라지만…

어김없이 엄마를 부르는 one of them으로 인하여 아직은 애들이 그닥 크지 않았다는 걸 체감하고 체념할 뿐이라는 것도.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먹고 뛰고 집구석구석을 다 뒤지기까지 다 한 아이들은 하루 종일 몸을 베베 꼬며 너무너무 지루해했고 눈이 마주치는 모든 순간 어디선가 싸움이 터졌다. 윷놀이, 배드민턴, 오목, 레고 등 아이들과 격리 생활을 위해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칠순의 할머니는 무기력한 딸의 모습과 감당할 수 없는 손주들의 투정, 무엇보다 갑자기 늘어난 식구로 인한 집안일에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셨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아들놈들은 10분마다 사고를 치고 그런 동생들한테 빽빽거리는 누나와 그 셋을 향해 매 순간 언성을 높이는 엄마까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김장감이 지속되던 일주일쯤 되는 날이었나,

결국 사춘기 딸이 그 긴장의 순간을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아래 둘도 마찬가지지만 큰 애는 특히나 중학생이라서 학교 과정을 중간에 빼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원래 초등학생인 아이들 둘과 나만 먼저 입국해서 격리를 하고, 학기를 마친 큰 아이는 나중에 혼자(대한항공 한가족 서비스를 이용하면 모든 절차를 어른을 대신해 도와줍니다) 입국할 예정이었다. 큰 아이는 백신 접종 완료 자라 격리 면제였기 때문에 2주간의 방학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오미크론의 등장으로 격리를 하게 되었으니 결국 격리만 하다 돌아오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고육지책으로 학기가 끝나기 2주 전, 동생들과 함께 귀국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일부 수업이 원격으로 과제를 온라인으로 받아서 한국에서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도와줄 선생님이 없이 혼자 힘으로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마음은 만신창이가 된 아이가 격리하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방에 틀어박혀서 숙제와 씨름하고 있었으니 12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현실이었다. 엄마는 동생들을 상대하느라 하루 종일 너무 바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방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데 심심한 동생들이 자꾸 들락거리고 방해를 하니 만만한 아이들이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이래 빽, 저래 빽, 나가라고 악을 악을 쓰니 참다못해 결국 내가 나서서 나무라고야 말았다. 그리고 아무나 걸려라 마치 벼르고 있던 양, 눈을 부릅뜨고 "엄마는 쟤네만 중요해?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지?" 바락바락 대드는 아이에게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내가 상관을 안 하면 널 왜 데리고 왔겠니, 널 데리고 오기 위해서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힘들게 설득했는데, 차라리 그러지 말걸 그랬다."라고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폭발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줄곧, 지친 모습으로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우리를 대하는, 가뜩이나 상처받은 아이들이 눈치까지 보게 만드는 친정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깔려 있었다.


찢기고 상한 딸과 성숙하지 못한 엄마는 그렇게 맞서 싸웠다.

아빠한테 전화해 엄마가 날 버리려고 한다, 외할미, 할아버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친할머니한테 가겠다. 여태껏 이 아이들을 끌어안고 보듬어 줬던 모든 이들의 가슴에 비수를 꼽고 폭주하는 아이를 안아주고 다독여줄 능력이… 내게 없었다.


미국에서 전화했을 때부터 입국한 지금까지 줄곧 모른척하고 있는 시집. 이젠 차마 시댁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그들은 처음부터 아들들은 감당이 안되니 큰 아이만 보내라고 했었다. 원래도 그 집에서는 첫째에 대한 편애를 공공연히 드러내었고 그 편애에서 제외된 아이들의 마음 따위는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 큰 아이를 보내는 건 내가 마지막까지 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다.


그러나 격리가 끝나고 아파트로 옮기게 되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아들들만으로도 버거울 내가 딸램의 마음까지 돌볼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마음만으로,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닫았기에 큰 아이만이라도 조용히 자기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보내는 게 모두를 위해 나은 결정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격리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이제는 친정 부모에게도, 친가에도,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고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내 문제이며 저 아이들은 내가 책임져야 함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끌어온 부족하고 어리석은 내가 치러야 할 삶의 대가임을… 가슴을 치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옮긴 후,  큰 아이는 3일간 친가로 보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너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빈말을 달고 살던 노인들은 아이를 데려가면서도 끝까지 나에게 연락 한번 없이 아이하고만 연락했다. 어쨌거나 아이에게는 할머니이니 어떤 식으로든 휴식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진짜 격리는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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